# 177화.
왕조의 조건(4)
“난 자네를 굉장히 높게 생각하고 있어.”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이야기야. 생각해봐. 지금 리그에서 선수들이 이만큼이나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가. 자기가 받는 돈이 어떤 식으로 굴러서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그 머저리들이 백만장자가 돼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누구 덕분이냐 이 말이야. 이건 모두 자네 덕분 아닌가.”
“그게 제 덕분은 무슨 제 덕분입니까. 선수들이 노력한 덕분이죠.”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피식 웃었다.
“노력? 그래 노력 좋지. 하지만 그 노력이라는 놈은 저기 지하철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들도 나름의 노력이라는 걸 하고 산다네. 그러니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얼마나 적절한 곳에 투입하느냐이지.”
잠시 말을 멈춘 스타인브레너가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음, 몸이 이 꼴이 되고 나니 마음대로 술도 한 잔 못하게 돼버렸지 뭔가. 아, 혹시라도 한잔하고 싶다면 말하게. 나야 술을 못 하지만 미리 사둔 녀석은 여기 있으니 말이야. 몰트위스키인데 아주 좋은 녀석이야.”
“지금 술을 마실 때는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제 칭찬이나 할 때는 더더욱 아닌 것 같고요. 약물복용이 확정나지도 않은 선수들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것이 어째서 선수 협회와 저에게 나쁜 일이 아닌지를 설명하실 수 없다면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참. 급하기는. 보채지 않아도 이제 말하려고 했다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느긋하게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라 도널드 페어에게 건넨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말을 이어갔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인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를 주겠네. 명분 역시 충분해. 룰을 어긴 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은 사용자도, 혹은 소비자도 아닌 자신의 동료들이니 말이야. 그리고 명성 역시 주도록 하지.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슈퍼2의 확대. 그리고 연봉협상 제도의 개선에 대한 논의도 다음번 CBA(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 노사단체교섭.)에서 내가 직접 안건으로 건의하지. 그에 더해 구단주 중에서 30%는 내가 설득해줄 수 있네.”
도널드 페어가 자신도 모르게 스타인브레너가 건네준 위스키를 들어 벌컥 마셨다. 분명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명분이니 뭐니해도 결국 저 제안은 선수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침해의 범위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난 94년 대파업을 주도하고 그것을 통해 상상 이상의 이익을 끌어낸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도널드 페어는 훌륭한 노조위원장이자 노련한 협상가였다. 하지만 1960년대 전설적인 노조위원장이었던 마빈 밀러를 경험해 본 원로선수들은 도널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게다가 이미 큰돈을 벌어들인 스타들 역시 도널드 페어가 메이저리그 최저임금과 연봉협상 제도의 개선 등 메이저에서도 최하층에 있는 선수들의 대우개선에 열을 올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자네도 이제 내년이면 세 번째 재신임일 텐데. 흐음, 내가 듣기로는 당장 이번에 버드 그 친구가 발표했던 커리어 말소 때문에 시끄러운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
게다가 이번에 터진 PED사태. 물론 약물을 한 선수들을 협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비호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했고 그런 노조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약물을 복용한 선수들 대부분은 이미 빅리그에서 자리를 잡은 선수들이었고 그렇기에 노조에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도널드 페어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영향력을 통해 도널드 페어를 비난하고 있었다.
“게다가 선수들 처지에서도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네. 생각해보게. PED가 금지되는 이유는 결국 공정성. 그리고 선수들 본인의 건강 때문이 아닌가. 아닌 말로 구단주들 입장에서는 선수들이 약을 빨건 뭘 하건 경기만 더 잘 뛰면 그만일세. 내가 보기엔 오히려 선수협에서 나서서 더 적극적으로 약물에 대해 비난해야 마땅해.”
도널드 페어가 말없이 잔에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것을 보는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흐릿한 눈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노조위원장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방법은 악용될 소지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아니, 악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약물복용이 의심되는 선수의 선수자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다니요. 애초에 죄의 유무가 밝혀지기 전에 소급해서 처벌하는 게 말이 됩니까?”
“약 빨고 뛴 자식들이 정당하게 경기한 선수들에게 돌아갈 돈을 빨아들이고, 2억 달러짜리 팀이 4천만 달러짜리 팀한테 패배하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물론 투자가 항상 성공할 수는 없지. 오늘 잘한 선수가 내일 잘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하지만 이건 투자가 아닌 고의적인 사기나 다름없다는 것 자네도 잘 알잖나. 약물로 성적을 뻥튀기해서 돈과 명예를 얻다니.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는 다른 모든 선수, 아니 당장 현역으로 뛰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이미 은퇴한 선수들의 기록까지도 더럽혀지고 있는데, 이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도널드 페어는 알고 있었다. 지금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정당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끌어당겨 자신의 이야기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지 스타인브레너 역시 도널드 페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타인브레너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자네는 지금 내 말에 설득되지 않겠지. 괜찮네. 자네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자기가 버는 돈이 어떤 식으로 굴러서 어떻게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들이야. 어떤가. 그 머저리들도 이 말에 설득이 안 될까? 자네가 직접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는 않아. 다만 명민하기 짝이 없던 도널드 페어도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요사스러운 언변에 넘어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몇몇 약을 빤 자식들을 제외한다면 모두 믿고 넘어가고 싶을 이야기야. 자네도 그 나이쯤 됐으니 이제 알지 않나. 사람은 본래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걸 말이지.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네는 마빈 밀러에 못지않은 업적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협정을 끌어낸 노동전문가로 이름을 남기게 될 거야. 내 장담하지.”
도널드 페어가 이를 악문 채로 텅 빈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봐도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도널드 페어의 이성이 아니다. 그의 감정이다. 마침 그의 손에는 이성을 없애고 감정을 증폭시키는 마법의 물이 있었다. 스타인브레너가 몰트위스키 병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 어느새 그걸 다 마셨구먼. 내가 몸이 이렇게 되고 나니 눈도 어두워서. 그걸 이제 봤구만. 자 어때 한잔 더 하겠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얼마든지.”
도널드 페어가 내민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스타인브레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렇게 해서 스타인브레너 씨가 얻는 게 뭡니까. 양키스라면 그깟 2, 3천만 달러 따위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잖습니까. 아니 오히려 CBA 개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더 큰 손해가 올 텐데요.”
토하듯 묻는 도널드 페어에게 꽉 찬 위스키 잔을 내밀며 스타인브레너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구단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네.”
“뭡니까.”
“프로야구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뿐이지.”
***
뻐엉!!
공을 받아낸 데뷔 2년 차의 포수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2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부드러운 동작. 그리고 어마어마한 속도. 단언컨대 양대 리그를 통틀어, 아니 양대 리그의 역사를 통틀어도 보기 힘든 최고 수준의 도루 저지였다.
하지만 2루를 향해 달린 주자는 지난 7년 반 동안 무려 300개가 넘는 도루를 적립한 최고의 주자 강진호였다.
“세이프!!”
심판의 양손이 올라왔다. 2루 베이스를 밟고 일어선 진호가 자신의 앞섶을 툭툭 털어낸다. 1루에 서 있던 알버트 푸홀스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역시 대단해.’
항상 스스로를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였지만 눈앞의 진호에게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진호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라운드를 내달렸다. 세 번의 출루. 그리고 두 개의 도루. 그라운드에 서 있는 선수라면 누구나 강진호가 달릴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그의 도루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오늘 커리어 7년 만에 300개가 넘는 도루를 해낸 주자란 이런 것인지를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강진호 선수!! 강진호 선수가 시즌 22호 도루를 가볍게 성공시킵니다.]
[와, 정말 대단합니다. 아니 대체 누가 카디널스를 상대로 이렇게 달릴 거라고 예상했겠습니까. 게다가 누가 이렇게 완벽하게 도루를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겠습니까.]
야디어 몰리나가 포수 마스크를 벗고 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젠장.’
고작 데뷔 2년 차. 최고의 포수라고 하기에 너무 많은 것이 부족한 몰리나였다. 하지만 도루 저지라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도 리그 최고를 자부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의 도루 저지율은 작년 51경기에서 47%. 그리고 주전 포수로 올라온 올해에는 오늘 경기 전까지 82경기에서 무려 64%라는 터무니없는 수치였다. 리그 평균의 2배 그리고 3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도루 저지율. 첫 번째 도루야 기습적으로 당했다손 치더라도 지금 도루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가 피칭모션이 크고 그에 비해 구속은 좋지 않은 크리스 카펜터라고 해도 말이다.
‘엿 같은 기분이 들 때는 마운드의 투수를 보라고. 투수 표정은 더 엿 같을 테니 말이야,’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큰형 벤지 몰리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미 메이저리거로 큰 돈을 벌어들인 우상의 이야기처럼 마운드를 바라본 몰리나의 눈에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크리스 카펜터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아직 이닝은 끝나지 않았고 도루를 아무리 해봐야 점수는 더해지지 않는다. 몰리나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어린 친구 아까웠어.”
“뭐, 영감님 눈에는 그랬겠죠. 그런데 저야 워낙 수비가 좋아서 딱히 아까운 줄은 모르겠더라고요.”
따악!!
마이크 피아자가 바깥쪽 낮은 공을 후려쳤다. 빗맞은 타구가 1루 내야관중석을 직격한다.
“저런, 난 아무리 타격이 좋아도 방금 같은 공은 항상 아까운데 말이야. 게다가 자네 형들은 방금 전 같을 때는 정말 아쉬워했었고. 역시 젊어서 그런가? 아웃 카운트 하나 아까운걸 모르는구만.”
“영감님 타석에나 집중하시죠. 그러다가 또 울면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글쎄, 그래도 아는 녀석의 동생을 만났는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나. 이렇게 반갑게 인사라도 해줘야지.”
첫 번째 타석에서부터 꾸준히 친한 척을 해오는 마이크 피아자.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경기가 진행됨에따라 이제는 정말 심하게 거슬렸다. 하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몰리나가 미트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