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8화 (178/210)

# 178화.

왕조의 조건(5)

크리스 카펜터에게 공을 건네는 몰리나의 동작이 사나웠다. 타석에 서서 어울리지 않게 이죽거리는 표정을 보이는 피아자의 모습이 보인다.

‘저 아저씨가?’

나는 트래쉬토크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선수 중 몇몇은 그것을 순수하게 실력을 겨루는 프로 스포츠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프로 스포츠에서 도의적으로, 그리고 규칙으로 금지되지 않은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야구에서 트래쉬토크를 가장 잘하는 포지션은 당연히 상대 타자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포수였다. 그리고 마이크 피아자는 무려 14년이나 메이저 최정상급의 포수로 이름을 날려온 남자다.

[볼카운트 1-1. 마이크 피아자가 잘 참아냈습니다.]

[올해 서른여섯 살이죠? 올 시즌 마이크 피아자 선수의 성적을 보면 지명타자로의 출전이 상당히 늘었음에도 예년 같지가 않습니다. 작년까지 커리어 성적이 0.315/0.385/0.562에 연평균 30홈런가량을 기록하던 타자인데 올 시즌은 0.258/0.336/0.472에 홈런 수도 17홈런밖에 되지 않아요.]

[사실, 그에 관해서는 최근 메이저에 약물 관련으로 이슈가 조금 있는데 테스트가 빡빡해지고 성적이 급락하는 선수들에게 팬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글쎄요. 단순히 그렇게 연관시키기도 힘든 것이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피아자 선수는 올해 성적이 급락한 것이 아니라 이미 2003년부터 꾸준히 성적이 하락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포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커리어 말년에 성적이 급락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피아자 선수 올해를 끝으로 다시 FA로 나가는 만큼 조금이라도 좋은 계약을 따내려면 힘을 내야 합니다!!]

피아자가 아주 제대로 몰리나를 흔들고 있었다. 슬쩍 3루를 바라본다. 하지만 흔들리고 있다고 해도 상대 포수는 야디어 몰리나. 도루 저지에 관해서는 현역 최고. 아니 어쩌면 역사상 최고일지도 모르는 포수다. 하지만 3루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진다. 조 매든 감독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달리겠습니다.’

바비 발렌타인과 다르게 덕아웃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짓이 한순간 멈췄다. 고민에 잠긴 표정. 망설임은 짧았다. 조 매든이 어깨를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모자챙을 강하게 한번 움켜쥐었다.

조 매든은 데뷔 이후 야디어 몰리나가 단 한 번도 3루 도루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2루에 나가 있는 주자가 데뷔 7년 만에 300도루를 돌파했던 선수라는 점이었다. 애당초 그가 나에게 도루 자제를 권한 것은 순전히 나의 안전 때문이었다. 조 매든이 나의 판단을 지지했다.

‘Go’

방심은 하지 않았다. 네 걸음. 자세를 낮추고 신중하게 투수를 살폈다. 야디어 몰리나가 훌륭한 도루 저지를 보여주는 것은 상수였다. 피아자가 그를 도발하여 변수를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것은 덤에 불과했다. 노리는 것은 슬로우 커브를 던지는 크리스 카펜터의 타이밍을 뺏는 것이었다. 크리스 카펜터가 세 번째 투구자세에 들어갔다.

‘지금? 아니, 아직이야.’

투구폼으로 그의 공을 알아채긴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커브가 들어갈 타이밍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사용한다면 마지막 삼진을 뽑아내는 결정구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예상이 적중했다. 카펜터의 손에서 90마일에 육박하는 빠른 공이 날아갔다.

딱!!

[아, 마이크 피아자!! 아깝습니다. 3루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울타구!!]

피아자의 배트가 공을 후려쳤다. 하지만 타구방향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3루 내야 관중석에 피아자의 타구가 명중했다. 타석에 선 피아자가 또 뭐라고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안면에 재밌다는 미소가 가득한 것이 몰리나의 반응이 그의 마음에 딱 드는 것이 분명했다.

볼카운트 1-2. 이제 공 하나면 승부가 나는 상황. 오늘 크리스 카펜터의 커브 구위를 생각한다면 뚝 떨어지는 커브로 삼진을 잡으러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자세를 낮췄다.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바라본 크리스 카펜터가 네 번째 공을 뿌리기 위해 한껏 다리를 치켜들었다. 내가 노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2루 주자!! 2루 주자 달립니다!!]

[강진호!! 강진호의 도루 시도입니다!!]

네 걸음가량을 뗐을까? 타이밍상 크리스 카펜터의 발이 마운드를 찍고 그의 손에서 공이 날아오를 시점이었다.

‘제발, 슬로우 커브!!’

하지만 그의 공을 지켜볼 여유는 없었다.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3루 베이스뿐. 세차게 진자운동을 하는 양팔 아래 두꺼운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이제 3루 베이스까지는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응?’

그런데 극도로 좁아진 시야 틈으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세차게 돌아가는 3루 코치의 팔이 그것이었다. 나의 판단 따윈 필요 없었다. 매우 급한 상황. 중요한 판단을 하는 것은 코치들이다. 나는 그저 그들의 판단에 맞춰 최선의 플레이를 선보일 뿐이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준비하려던 몸을 다시 곧추세웠다. 왼쪽으로 크게 기우는 상체. 나의 왼발이 3루 베이스를 밟고 크게 돌아 홈을 향해 쏘아졌다.

[크리스 카펜터!! 폭투!!! 맙소사!! 공이 완벽하게 뒤로 빠졌습니다!! 마이크 피아자. 1루로 달립니다!!]

[그 사이 강진호!! 강진호가 3루 돌아서 홈으로!!]

포수 마스크를 집어 던진 야디어 몰리나가 공을 잡기 위해 홈플레이트 뒤편으로 달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 빠르지 않은 피아자도 1루를 향해 달리는 상황. 야디어 몰리나가 그라운드를 구르는 공을 주워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야디어 몰리나 공을 주웠습니다만 홈으로의 커버가 늦습니다!! 홈에서 공을 받아 줄 선수가 없어요!!]

[크리스 카펜터!! 여기선 바로 홈으로 커버를 왔어야죠!! 물론 강진호 선수가 워낙 빨랐습니다만 그래도 3루까지 완전히 도착하지 못했던 강진호와 마운드에서 바로 뛰면 되는 카펜터 선수의 거리 차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커버올 수 있었거든요. 잠깐의 어리바리함이 뼈아픕니다.]

[야디어 몰리나 어쩔 수 없이 1루를 선택해보지만 역시 늦습니다. 세이프!! 메츠가, 아니 강진호가 순식간에 1점을 만들어냅니다.]

여유롭게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뒤늦게 달려온 크리스 카펜터.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야디어 몰리나의 표정이 모두 썩어있다.

[투수도 투수이지만 지금은 야디어 몰리나의 반응도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물론 평범한 포수라면 방금 공을 충분히 놓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디어 몰리나. 비록 빅리그 2년 차에 불과하지만, 도루 저지, 그리고 블로킹만큼은 이미 정평이 난 선수거든요. 그러니까 팀에 타.출.장 모두 높은 베테랑 포수를 두고 야디어 몰리나 선수를 주전으로 쓰는 거란 말이죠.]

[물론 출중한 선수입니다만 그래도 아직 어린 포수인 만큼 가끔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죠.]

[사실 폭투도 폭투입니다만 득점까지 이어진 데에는 역시 주자가 강진호 선수였다는 점이 큽니다. 야디어 몰리나 선수,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 3루 도루를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참, 여러 가지로 메츠에는 운이 따르는 경기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기록은 어떻게 되는 거죠?]

[폭투가 나오기 전에 달리기 시작했으니 강진호 선수에게는 1도루. 그리고 점수는 투수 책임의 폭투이니 투수 자책점으로 기록됩니다.]

[강진호 선수, 이걸로 시즌 23번째 도루를 기록합니다.]

***

“지금 이걸 제안이라고? 허허, 사무국이 미쳤군요.”

커다란 회의실. 커다란 덩치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테이블을 '탁' 치고 일어났다. 그곳에서 분노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테안경을 쓴 이지적인 중년 남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철을 세차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약물복용 선수의 선수자격 정지 개정안.-

“저 역시 약물복용에 강경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건 그저 부진 하는 고액 FA 연봉자들을 트집 잡아서 배제할 수 있는 룰이될 겁니다. 이건 우리 노조 차원에서 강하게 항의해야 합니다.”

도널드 페어를 견제하는 쪽에서 집어넣은 NBPA(National Basketball Players Association. NBA선수노조)의 사무원 출신 알렉스 도웰의 항의에 도널드 페어의 숨이 턱 막혀왔다.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제안에 넘어가긴 했지만, 그 역시 이번 제안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잠깐의 어물거림. 하지만 뜻밖의 구원자가 도널드 페어를 대신했다.

“하지만 여기 두 번째 장의 다섯 번째 줄을 읽어보면 약물 검사에서 이미 적발된 자에 한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지 않나. 그리고 약물 검사의 결과에 불응하고 사실관계를 다투는 사람들의 자격을 정지시킨다는 내용인데. 지금 약물에 대한 언론, 그리고 사회의 분위기를 봤을 때 이걸로 우리가 반발한다면 오히려 역풍이 불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점점 비중을 높여가고 있는 도미니칸 출신의 이사 호세 가린쵸의 이야기에 알렉스 도웰이 강하게 반박했다.

“언론,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양보해서야 노조라고 할 수 없죠. 우린 공익단체가 아니잖습니까.”

여전히 망설이는 도널드 페어. 하지만 알렉스 도웰에게 반박하는 이는 호세 가린쵸만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공익단체는 아니지. 하지만 신중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네. 지난 1994년의 파업에서도 처음에는 우리를 지지하던 팬들이 결국 언론의 프레임에 넘어가서 우리의 파업을 백만장자들의 배부른 투정이라 매도했던 걸 생각해봐야지. 지금 빅맥 그 친구의 청문회 발언 때문에 안 그래도 메이저 선수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싸늘한 상황이야.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가 있어.”

“베너씨······.”

호세 가린쵸에게 강하게 반박하던 알렉스 도웰도 이번에는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마이클 베너는 알렉스 도웰 자신과 함께 도널드 페어에게 맞서는 가장 든든한 동료였다. 차기 노조위원장을 노리는 상황에서 확실한 아군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다.

“사무국에서도 우리에게 먼저 초안을 보내준 것은 충분히 협상할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당장 여기 분쟁조정 중에 선수자격을 정지당했던 선수의 연봉 정지에 관해 추후 조사 결과 약물복용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면 보상금을 더 높게 조절한다면 구단주들의 무분별한 악용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협상이라니. 다들 미친 건가?”

처음 의자를 강하게 박차고 일어섰던 노인이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존, 우선 좀 앉아보죠. 안 그래도 최근 약물 때문에 노조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약물로 인해서 사실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구단주나 팬들이 아닌 우리 스스로이지 않습니까.”

“허!! 도널드, 자네도 정말 미쳤군!! 내가 알던 도널드가 맞나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야. 지금 목줄을 채우겠다는 녀석들에게 목을 들이밀면서 목줄이 너무 죄니 느슨하게 채워주세요.라고 협상을 하겠다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만. 게다가 지난 2003년의 테스트는 비공개를 전제로 했던 테스트잖아. 그런데 그걸 핑계로 선수 정지를 시도한다고? 막말로 선수 시절 안드로 한번 안먹었던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존, 지금 2003년 테스트에서 당시 합법이던 약물을 먹은 걸로 걸고 넘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에 우리와 사무국이 금지약물로 합의했던 약물을 몰래 먹었던 선수들을 제제하겠다는 이야기죠.”

“어쨌든 난 이따위 안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네!!”

도널드 페어가 좌중을 둘러봤다. 그와 시선을 맞추며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이사들, 그리고 죽일 듯 노려보는 이사들. 무언가 죄라도 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이사들까지. 그들의 숫자를 헤아려본 도널드가 깨달았다. 이것은 이미 결정이 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안 그래도 힘든 몸으로 하루 동안 무려 다섯이나 되는 사람을 만나느라 녹초가 된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멍청아. 내가 뭐라고 했어. 다 잘 될 거라고 그랬지? 노동자의 권리니 뭐니. 애초에 수천만 달러씩 받아 챙기는 놈들이야. 죄다 자기 욕심들뿐이라고. 그냥 그럴싸한 명분이나 하나 던져주고 원하는 구석만 콕콕 찔러주면서 평소보다 조금 더 후하게 던져주면 다 넘어오게 돼 있는 법이지.”

“그렇······, 군요.”

지친 몸. 하지만 기분만은 좋은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힘있게 말했다.

“자, 난 이제 다 해줬으니 남은 건 네 몫이야. 우리 집 열다섯 살짜리 손자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설마 망치지는 않겠지?”

“그 열다섯짜리 손자를 제 자리에 앉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기는 합니다만,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해보도록 하죠.”

브라이언 캐시맨이 의욕을 불태웠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약물복용으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선수들의 선수자격 정지에 대해 알고 있는 단장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리고 브라이언 캐시맨은 그런 놀라운 우위를 허투루 놓칠 만큼 무능력한 단장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이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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