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79화 (179/210)

# 179화.

왕조의 조건(6)

내야 안타로 1루 베이스를 밟은 레예스가 보호장구를 벗어 1루 코치에게 넘겼다. 카디널스의 일루를 지키고 있던 푸홀스가 웃으며 말했다.

“루키, 제법 빠르네.”

“빠르기만 한가요. 잘 치고 잘 던지고 잘 잡는데 빠르기까지 한 거지.”

“에이, 그건 너희 캡틴 이야기잖아. 요즘 좀 자제하는 것 같더니 오늘 달리는 것 보니까 여전하던데?”

“왜, 부러워요?”

“뭐,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언론에서야 엄청나게 비교해대지만, 솔직히 야구선수로서 정말 완벽한 건 네 캡틴 쪽이잖아.”

푸홀스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레예스가 비꼬듯 답했다.

“갑자기 웬 패배자스러운 이야기래?”

“패배자라니. 완벽하다고 했지 뛰어나다고 한 적은 없어. 다 잘하면 좋지만, 그래도 모든 위대한 선수가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건 아니지. 난 너랑 다르게 최소한 힘 하나는 네 캡틴보다 좋다고.”

“너랑 다르게? 나도 발 하나는 우리 캡틴보다 좋거든요?”

발끈한 레예스를 바라보며 푸홀스가 씨익 웃었다. 마치 오늘 그걸 보고도 네가 더 나은 주자라고 말하는 거냐는 듯한 미소가 호세 레예스의 가슴에 불을 붙었다.

리키 헨더슨이, 강진호가 대단한 주자‘였’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전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고 후자는 시대를 지배‘했’던 주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2005년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자는 늙었고 시대를 지배했던 주자는 주루 대신 장타를 선택했다. 그렇기에 레예스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메이저리그 최고의 주자는 바로 호세 레예스 자신이라고.

‘젠장.’

분명 속도는 레예스 자신이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호세 레예스 스스로도 리그 최고 수준의 주자였기에 알고 있었다. 단지 빠른 것만으로는 오늘 진호가 보여준 그것들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야디어 몰리나라는 리그 최고의 포수를 상대로 저토록 과감하게 도루한다는 것은, 그것도 3루를 훔친다는 것은 단순하게 빠른 것을 넘어 투수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훔쳐낼 때만이 가능했다.

레예스의 시선이 크리스 카펜터와 야디어 몰리나를 오갔다. 2루까지 빠듯한 거리. 아주 약간 2루를 향해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여전히 2루는 멀었다. 스파이크 안쪽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마운드의 크리스 카펜터가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타석에 선 데이비드 라이트와 시선이 부딪혔다. 눈동자를 통한 대화로 자신이 달릴 것을 알렸다. 물론 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크리스 카펜터의 오른손이 그의 귀 뒤로 넘어온 순간. 레예스의 몸이 2루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호세 레예스의 눈동자가 신통한 것인지, 개떡 같은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데이비드 라이트가 예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둘 간의 신호가 통했다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라이트의 배트가 느리게 허공을 갈랐다.

부웅!!

약간이지만 분명한 도움. 미트에 공을 받는 야디어 몰리나의 몸이 아주 잠시 지체됐다. 주자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미트에서 공을 뽑아 2루로 송구하기까지 평균 1.78초. 하지만 데이비드 라이트의 스윙 덕분에 0.05초의 여유가 더 생겨났다. 호세 레예스의 몸이 낮지만 빠르게 날아올랐다.

뻐엉!!

이루수의 글러브로 정확하게 틀어박힌 야구공. 심판의 양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호세 레예스!! 도루 성공. 아슬아슬했지만 좋은 도루였습니다.]

[어, 그런데 지금 레예스 선수가 조금 이상합니다. 통증을 호소하는 것 같은데요?]

[아, 설마 지금 도루 중에 부상을 입은 건가요?]

몰리나를 상대로 뽑아낸 도루를 기뻐할 틈도 없었다. 베이스를 짚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뉴욕 메츠 시리즈 1차전 4:3 신승!! 발로 만들어낸 승리-

-강진호 37경기 연속안타 갱신!!-

-메츠의 주전 이루수 호세 레예스. 오른손 엄지손가락 부상 15일 DL-

-타석에서 부진 하는 미구엘 카이로, 수비가 불안한 가즈오 마쓰이!! 메츠의 선택은?-

-리키 헨더슨 ‘그 애송이가 멍청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도루 장갑을 거부할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애송이 시절에 이 장갑이 있었더라면 1500도루를 넘어 1600도루도 꿈이 아니었을 것.’-

-뉴욕 양키스 – LA 엔젤스 4:7 대규모 논 웨이버 트레이드!!-

-2차전 8:2 대패. ESPN 선정 오늘의 선수는 4타석 3안타 2홈런 1볼넷의 알버트 푸홀스!!-

-강진호 8회 초 아슬아슬한 기록 연장. 4타수 1안타 38경기 연속안타!!-

-수비 중 부상!! 미구엘 카이로 시즌 아웃!! 이틀 만에 부상 병동이 돼버린 메츠의 내야!!-

***

‘빌어먹을. 안 그래도 고민할 것투성이인데 갑자기 부상이라니.’

프리드먼이 슬슬 세로 주름이 생기려는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이지 이 메이저리그의 단장이라는 자리는 온통 골칫거리투성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저 꼭대기 층에 앉아있는 어떤 개자식이었다.

“오늘도 헛소리입니까?”

“말도 마라. 이제는 꼭 예산을 오버해가면서 강진호를 데리고 있어야 하냐고 그러더라.”

제프 윌폰의 기도 차지 않는 미친 소리를 떠올리는 프리드먼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리테시 라즈풋의 얼굴은 달랐다.

“어쩌면 진짜 고민해봐야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넌 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예산은 한정돼있고 그걸로 최선의 팀을 짜야 한다면 우리 메츠의 규모에 연 3천만 달러짜리 선수는 독이 될 수도 있어요. 물론 최고의 중견수는 좋죠. 하지만 그 최고의 중견수 하나가 우승 반지를 가져다주는 건 아니잖아요. 3천만 달러면 올스타급 선수 셋을 쓸 수 있는 금액이에요. 리그 에이스급 투수 둘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돈이고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리테시 리즈폿으 얼굴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리테시를 바라보던 프리드먼이 먼저 크게 웃었다. 리테시 리즈폿 역시 참지 못하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제프가 너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던?”

“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왈왈거리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한바탕 시원하게 웃음을 토해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돈은 여전히 부족했고 써먹을 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양키스 놈들 돈 지랄 생각하면 그거 반이라도 좀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놈들은 진짜 미친놈들이고. 약물 빤 게 분명한 고액연봉자들을 유망주랑 세트로 해서 논 웨이버라니.”

최근 양키스가 보여주는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 물론 선수의 클래스는 영원하다지만 그래도 약물을 끊은 여파로 폭망하는 것이 너무 분명해 보이는 선수들을 유망주를 대가로 데리고 오는 그 트레이드들은 그야말로 돈 지랄을 넘어섰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최소 4, 5년은 어마어마한 적자로 운영해야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움직임. YES 네트워크가 아무리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해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그저 웃고 넘어갔을지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캐시맨이 그렇게 멍청한 단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랜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상식선에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프리드먼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전화가 울렸다.

“단장님.”

“어, 무슨 일이야?”

“뉴스!! 지금 당장 뉴스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뉴스?”

프리드먼이 TV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그리고 그 순간 TV를 통해 나오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제프?”

“제프가 TV에는 왜?”

[버나드 메이도프 폰지 사기!!]

“이건, 저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제 개인적 피해도 피해이지만 몇몇 지인들에게 그를 추천했다는 사실이 참 당혹스럽습니다.”

“폰지사기의 특성상 초기 투자자들은 투자금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제프 위폰씨의 경우 투자금 상당 부분을 회수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것은 연방검사와의 만남에서 자세히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빡빡한 상황에서 덮친 놀라운 소식.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구단주실에 있던 제프 윌폰을 바라보는 프리드먼과 리테시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이런 미친!! 폰지 사기? 그 바쁘다는 사업이 이거였어?”

“단장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폰지사기라니? 대체 그게 뭐고 제프는 저기 왜 나온 거예요?”

구단에 취업하기 전까지 월가에서 일했던 프리드먼이였다. 인도 공대에서 숫자만 가지고 놀던 리테시보다는 지금 사태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버나드 메이도프라 함은 월가에서도 가장 신뢰도 높은 투자가였다. 그런데 그의 이름 높은 펀드가 폰지 사기였다니.

“그러니까 폰지 사기가 뭐냐면 투자금 받아서 배당을 약속하고 투자금으로 고배당을 나눠주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투자금을 잔뜩 모으고 그걸로 또 배당하는 사기지.”

“배당을 하는데 그게 사기라고요?”

“그게 그러니까 실제로는 돈이 안 늘어나는데 신규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배당을 하는 거야. 그러다가 돈이 모이면 들고 튀는 거야.”

“그러면 지금 제프가 TV에 나온 건 사기 피해자라서 나온 거예요?”

“아니,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메이도프라면 20년째 월가에서 활동 중인 거물이라고. 아마 초기 투자자는 투자금 다 뽑고 훨씬 많이 건졌을 거야. 사실상 피해자라고 하기도 우습다고.”

“그러면 우리는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니에요? 최근에 돈을 뽑기까지 했다고 뜨는 거 보면 이제 정신 차리고 구단 운영에만 돈 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야,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잘못하면 공범으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젠장!!”

프리드먼의 눈앞에 구단의 성적, 그리고 운영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부터 무너지는 메츠의 미래가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어때, 일은 잘 돼 가나?”

“네, 뭐 이런 딜을 받아들이지 않을 머저리가 단장질을 할 수는 없죠. 그나저나 저희 페이롤이 2억7천만까지 올라왔습니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1억6천만까지 떨어집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자신의 턱에 까끌까끌하게 올라온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말이지, 이 턱수염이 참 싫어. 너무 지저분하잖아.”

“그런가요?”

“지저분하게 수염이나 기르는 놈들은 양키스에 어울리지 않지.”

갑자기 나오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캐시맨이 뭐라 답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고민하는 사이 조지가 전혀 맥락 없는 이야기를 또 뱉었다.

“과거 그레이트 양키스가 어떻게 시작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군림했을까?”

“그거야 당시 자본의 규모가 지금과는 달랐고 좋은 선수들을 수급하는데 지금과 같은 제한이 없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틀렸어.”

“그럼 뭡니까?”

캐시맨이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캐시맨을 어린애처럼 바라보던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말한다.

“베이브 루스.”

“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로저 매리스!!”

“아니, 그야 당연히 대단한 선수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단순히 대단한 선수가 아니야. 그 시대를 지배한 팀에는 항상 시대를 지배한 선수가 있었어. 왕조는 대대로 왕을 배출했기 때문에 왕조인 법이야.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현재의 왕이 새로운 왕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줬기 때문이지. 조 디마지오는 테드 윌리엄스보다 못했지만, 그 시대 가장 많은 MVP를 따낸 선수였어.”

늙어빠진 노인의 사리에 맞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선과 후, 과정과 결과가 뒤바꾼 혼란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기이한 열기가 그의 말에 강력한 권위와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캐시맨은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조지 스타인브레너라는 거인이 MLBPA의 얼간이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 봐야 딱히 설득력은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캐시맨.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 받아온 유망주들이 펼쳐나갈 미래 양키스의 왕조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렇게 달콤한 미래를 꿈꾸는 캐시맨을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현재로 끌어내렸다.

“재료는 충분히 모았을 거야. 이제 그를 데리고 와.”

“네?”

“이 말똥 자식이. 대체 뭘 들은 거야. 새로운 그레이트 양키스를 위해서는 새로운 루스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이왕이면 턱수염도 없고 뉴욕의 왕으로, 아니 메이저리그의 왕으로 양키스의 새로운 왕조에 군림할 녀석으로 말이야.”

“에, 그러니까 지금 설마······.”

“설마는 무슨!! 내가 지금 비기를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 하겠어? 이 소똥 자식이. 마침 상황도 좋잖아. 재료도 잔뜩 쥐여줬고.”

“하지만 지금 데리고 온 유망주들이 터지기만 한다면!!”

“그래, 내가 늙어 죽은 다음에 양키스가 잘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왕조는 그렇게 시작되는 게 아니야.”

늙어서 흐려진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카디널스와의 3차전에서 11일 만에 자신의 시즌 31호 홈런을 기록한 새로운 뉴욕의 왕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