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아무 가치없는 것(1)
“단장님 우리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추가 자금 투입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그러니깐 어떻게 하냐고요.”
리테시 리즈폿의 질문에 프리드먼이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새하얀 비듬들이 선풍기 바람에 흩날렸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맞은 리테시 리즈폿의 얼굴은 평온했다. 구단주의 폭망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고작 얼굴을 강타하는 비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선.”
“우선?”
“저녁부터 먹자.”
“지금 이거 야근하자는 소리죠?”
“비싼 거로 먹자.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어휴······, 내가 진짜 꼭 성공해서 양키스로 팀을 옮기든지 해야지.”
“그래, 양키스에 가려면 일단 지금 이 위기부터 극복해야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추가자금 투입이 아예 없는 것을 고려한 플랜이 없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역시 팔아야겠죠?”
“누구? 피아자?”
“피아자는 파는 게 아니라 못 잡는 거죠. 선발투수들 말이에요.”
“하긴, 지금 페이롤 감축하려면 역시 선발진을 정리해야겠지.”
“아, 골치 아프네요. 안 그래도 알 라이터 빈자리 메우려면 답도 없는데. 어디 하늘에서 쓸만한 선발투수 하나 뚝 떨어지지 않으려나?”
“왜? 마이너에 지금 레디 된 친구들 좀 있잖아. SS만 하더라도 골절에서 완벽하게 회복됐다고 하지 않았어?”
“마이너 선수 빅리그 올라온 이후 성적이야 올라와 봐야 아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SS는 예상해둔 선수잖아요. 제가 지금 말하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이득이라고요. 지금 생각하지 못했던 구단주의 빅똥이 덮쳐오는 것처럼 말이에요.”
한숨을 내쉬는 라예시. 그때 사무실의 전화기가 울려왔다. 이미 비서도 퇴근한 상황. 프리드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손에 든 프리드먼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흘러나온다. 프란시스코 리리아노, 채드 빌링슬리, 라스팅스 밀리지. BA 리포트 30위권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최고의 유망주들. 아니, 올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활약을 생각한다면 내년 초 BA 리포트 10위 안쪽으로 이름을 올릴 것이 분명한 빅네임들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프리드먼이 크게 화를 내며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예시는 전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완벽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프리드먼의 입에서 나온 유망주들의 이름은 최근 이어진 양키스 대형 트레이드들의 주인공이었다.
‘양키스, 이 자식들 진짜 미친 게 분명해.’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오는 프리드먼에게 라예시가 말을 건넸다.
“몇이나 준대요?”
“둘.”
“와우!! 아무리 강진호라도 1년 써먹는데 특급 유망주를 둘이나요? 그 정도면 그렇게 화낼 제안도 아닌 것 같구만.”
“젠장 약오르잖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그 자식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우리 Kang까지 데리고 가면 3억 달러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양키스라고 해도, 3억 달러면 좀 너무 터무니없잖아요.”
“겨울 이적시장에서 좀 정리하겠지.”
“끌어모은 선수들이 정리한다고 될 선수들이 아니잖아요. 고액연봉에 성적폭망인데요. 게다가 공공연하게 말만 안 하지 다들 약 끊어서 근육에 바람 빠진 선수들인 거 아는데 누가 데리고 가겠어요.”
라예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가 빅리그도 작년부터 샐러리캡제도 도입했잖아요. 저대로면 양키스 엄청 적자 볼 것 같은데? YES 네트워크가 그렇게 돈이 많이 되는 건가?”
“정확히는 샐러리캡은 아니지. 사치세는 그보단 약한 제도니까. 내년이면 4년 차니까 최고비율 사치세일 테고 아마 사치세 라인은 1억 4천만 정도일 테니 사치세로 8천만 달러 정도 추가지출이겠네.”
“어우, 샐러리캡이 아니라도 현기증 날 것 같네요. 8천만이라니. 사치세로만 올해 토론토 2개 팀을 굴리는 거잖아요.”
“뭔가 수를 쓰기는 쓰겠지. 아무리 양키스가 돈이 많고 YES네트워크가 잘나간다고 해도 한해에 4억 달러 가까운 돈을 내면서 팀을 굴릴 수는 없을 거야.”
“근데 그 팀의 그 미친 영감탱이가 오늘내일한다면서요. 죽기 전에 우승 한 번 더 보고 죽을 생각이면 그렇게 탕진할 수 있지 않을까요?”
4억 달러. 본래 돈을 다루던 프리드먼이었기에 그 금액이 주는 아득함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조지 스타인브레너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프리드먼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돈이라는 것이 그저 수단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보여준 적 있는 인물이었다.
‘젠장. 그렇다면 저렇게 돈 지랄로 모은 유망주들을 즉전감으로 다 바꿔먹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실체를 가진 분명한 예감이 오한과 함께 프리드먼을 덮쳐왔다.
“젠장. 돌도끼를 들고 기관총 진지로 달려들어야 하는 기분이로군.”
“핵무기가 날아오는데 투창으로 요격하라고 하는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요?”
“젠장, 다행은 무슨. 어차피 죽는 건 똑같잖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힘든 무기가 ‘아직은’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
침대에 누워있는 조지 스타인브레너에게 캐시맨이 물었다.
“조지, 설마 이것도 당신이 한 일입니까?”
“뭐가? 아, 메이도프 그 사기꾼 자식 일 말인가?”
“네, 우연이라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군요.”
스타인브레너가 웃었다.
“나를 높게 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내가 아니야. 뭐 애초에 그런 사기꾼 같은 이야기에 돈을 투자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지. 애당초 정상적인 사업가라면 그딴 것에 투자할 시간에 자기 사업을 해야지. 어쨌든 그런 사기꾼 자식도 이번에는 도움이 된 건가?”
“네, 매우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호성적으로 메츠는 꾸준히 규모를 키워왔지만, 이번 일로 아주 제대로 제동이 걸릴 겁니다. 페이롤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강진호를 데리고 있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뭐 이전 텍사스처럼 선수 하나가 전체 페이롤의 25%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든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그 선수가 아무리 대단한 성적을 기록한다고 해도 성적이 바닥을 친다는 걸 모를 만큼 메츠의 새로운 단장이 바보는 아니니까요.”
“바보는 아니다라······. 그래서 거래는 어떻게 됐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져뒀습니다.”
올해의 알 라이터를 대신할만한 유망주와 진호에게는 비견될 수 없지만 그래도 주전급 외야수로 충분히 성장 가능한 유망주였다. 심지어 단순히 실링만 높은 것이 아니라 현재 선수로서도 상당히 완성된, 당장 내년에라도 메이저에 투입이 가능한 자원들. 비록 당장이야 메츠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를 넘긴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넘어올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상에 Yes를 받기 전까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없어. 메츠 자식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얹어주고 Yes를 받아오도록 해.”
“가장 원하는 거라면?”
“지갑에 구멍 난 자식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뭐겠어? 줄줄 새는 지갑을 틀어막아 주라고. 돈값 제일 못하는 자식 하나 데리고 오라고.”
스타인브레너의 이야기에 캐시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이 끝나기까진 두 달이나 남았습니다. 천천히 진행해도 충분합니다.”
“젠장!! 이 말똥 같은 자식이 도무지 한 번에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 없군!!”
“그게 제가 이 비싼 연봉을 받는 이유잖습니까. 할 만큼 하셨으면 나머지는 비싼 연봉 꼬박꼬박 받아가는 연봉도둑놈이 해결할 테니까 가만히 누워서 지름이나 하십시오.”
“빌어먹을 말똥 자식.”
침대에 누워 투덜거리는 조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
최고의 재능을 지닌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항상 이길 수는 없는 것. 야구와 인생은 그렇기에 재밌는 법이었다. 그리고 오늘 야구에서 승승장구하던 나는 그 인생의 재미를 여지없이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의 기습적인 한방이었다. 본래라면 버나드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는 지금보다 훨씬 나중 시점에서 들통나야 했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폰지 사기를 통해 한탕 크게 치고 도주할 쪼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나스닥 금융거래소의 위원장까지 해먹을 만큼 저명한 사회 인사였고 그의 폰지 사기는 무려 20년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 별일이 없었더라면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됐을지도 모를 그 폰지 사기가 들통나는 것은 앞으로 3년 뒤 다가올 모기지론 사태라는 미증유의 금융위기에서였다. 어차피 투자도 안 하는 사기가 모기지론 사태에 무슨 영향이 있었겠냐 싶겠지만 바로 그 점이 그 사기의 발목을 잡았다. 세상은 미증유의 금융위기로 휘청이는데 금리의 변화가 없는 투자상품? 그것은 마치 사막의 얼음, 한밤중의 태양 빛처럼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금전적으로 마르기 시작한 투자가들이 금리 상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돈을 회수했던 것 역시 큰 타격이었다. 정상적인 투자상품이었다면 투자금을 돌려준다고 손해를 보지 않겠지만 애초에 버나드 메이도프의 금융상품은 존재하지 않는 상품이었다.
‘윌폰이 돈을 빼기 시작한 것이 방아쇠를 앞당긴 건가?’
메이도프의 투자상품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그와 20년 가깝게 교분을 나눠 온 윌폰가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들이 메이도프의 상품이 사기임을 알면서도 돈을 빼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이 사기는 사기꾼이 돈을 챙겨 달아나기 직전까지는 투자가들에게도 이득이 된다.’ 그것은 즉 신규투자가들의 돈을 빨아들여 기존투자가들에게 배당이 되는 특성상 최대한 마지막까지 돈을 빼지 않는 쪽이 이득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제프 윌폰이 돈을 뺀 것은 아마도 나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이 사기임을 눈치챘다는 위기감. 그리고 그 외부인이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라는 점은 그의 위기감을 더 확대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능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무능할 줄이야.’
상식이 있다면 다른 이들은 모르게, 그리고 본인 역시 피해자인 것처럼 꾸미는 형태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이 멍청한 자식은 마지막 잔돈푼까지 아끼기 위해 저렇게 오물을 뒤집어쓴 것이다. 저 아득바득 부린 욕심으로 인해 치르게 될 소송비용과 시간, 그리고 윌폰이라는 가문이 뉴욕 메츠의 구단주로 쌓아 올린 명예를 생각한다면 저 금액 따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골치 아프게 됐군.’
어차피 일어나게 될 윌폰가의 폰지 사기 연루. 그리고 그로 인한 메츠의 악영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MVP를 수상한 이후 나는 확신했다. 내가 이대로 이곳 메츠에 남아 커리어를 쌓아간다면 나는 뉴욕 메츠라는 팀에 불멸의 프랜차이즈로 남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양키스나 카디널스같이 뛰어난 프랜차이즈들을 다수 보유했던 전통의 명문구단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왕 위대한 커리어를 목표로 한다면 양키스의 전통을 잇는 제2의 루스보다는 어메이징 메츠가 아닌 그레이트 메츠를 만들어낸 메츠의 강진호가 되는 편이 더 구미에 맞았다.
하지만 2005년은 너무 빨랐다. 준비되지 않은 것은 너무 많았으며 해결해야 할 문제들 역시 너무 많았다. 당장 올해 말 결정 날 셰이 스타디움을 대신할 메츠의 신구장, 그리고 아마 빅리그 최고액을 당연히 경신할 나의 재계약 문제도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어쩌면 메츠를 포기해야 할지도.’
나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옵션이 하나 더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