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아무 가치없는 것(3)
전성기 수많은 타자들을 돌려 세웠던 스플리터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하찮았다.
뻐엉
[강진호 선수!! 로저 클레멘스의 스플리터를 침착하게 잘 골라냅니다.]
[볼카운트는 2-0. 로저 클레멘스, 상당히 까다로운 공을 두 개 연속 던졌는데 강진호 선수를 속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연속 경기 안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만 강진호 선수는 커리어 타출갭이 8푼이 넘는 타자예요. 연속안타보다 그리 주목받는 기록은 아닙니다만 지난 2001년의 61경기 연속 출루는 현역선수 중에서 최장기간 출루 기록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조마조마하게 TV를 시청 중인 팬분들이 많을 텐데, 1회부터 마음 푹 놓고 경기를 즐길 수 있게 이왕이면 시원한 안타로 경기를 시작해줬으면 좋겠어요.]
[하하,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출루도 요즘 주목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기록이라고는 합니다만 야구는 역시 시원한 안타죠. 게다가 지금 1루에 나가 있는 호세 레예스 선수가 발이 정말 빠른 선수거든요. 2루타 하나면 충분히 홈까지 들어올 수 있는 선수예요.]
[자,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 세 번째 공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짐짓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양키스 시절과 다르게 짧은 수염이 숭숭 나 숫제 산도적을 연상케 하는 흉악한 얼굴의 로저 클레멘스였다. 하지만 양키스 시절 의 그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 그의 몸짓이 사냥 직전 호랑이의 위협적인 숨죽임이었다면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몸짓은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의 그것에 불과했다.
로저 클레멘스의 속구가 날아들었다. 존 안쪽 낮은 코스. 84년 데뷔한 그가 무려 21년의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재미를 봤던 공이다. 만 42세 11개월. 약물로 역행하던 세월이 한 번에 그를 덮쳐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속구 구속은 92마일을 웃돌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의 스윙은 80, 90년대를 지배했던 낮은 공을 극복하기에 가장 완벽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설사 전성기의 로저 클레멘스라고 해도 신체적, 기술적으로 절정기에 다다른 나에게는 그리 두렵지 않은 상대였다. 하물며 약물이 빠지고, 늙었으며, 법정 다툼으로 인해 멘탈까지 온전하지 못한 로저 클레멘스 따위 절대 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딱!!
시원하게 돌아간 배트가 로저 클레멘스의 공을 두들겼다. 빠르게 날아든 공이 우측 담장의 상단을 직격했다. 약간의 아쉬움. 타구 속도는 좋았지만, 타구 각도가 조금 낮았다.
[담장 직격하는 타구!! 아!! 타구 속도가 너무 빨랐고 우익수의 커버가 좋았네요. 강진호 2루에서 멈춰섭니다. 그 사이 1루 주자 호세 레예스는 홈까지!! 1회 초 강진호의 1타점 적시타. 강진호가 42경기째 연속안타를 이어갑니다.]
[와, 이제 역대 공동 4위의 기록입니다. 윌리 킬러 선수의 단일시즌 44경기 연속시즌 45경기 기록의 경우 현대 야구와는 조금 별개로 생각하는 데드볼 시대의 기록인 만큼 실질적으로 강진호 선수보다 많은 연속 경기 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이제 56경기의 조 디마지오 선수와 44경기의 피터 로즈 선수뿐입니다.]
[강진호 선수가 조 디마지오 선수의 기록을 처음 언급한 게 지난 25경기 연속 안타 때였죠? 그때만 하더라도 정말 많은 사람이 너무 이른 이야기라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14경기가 남았는데 정말 한 경기 한 경기가 고비일 겁니다. 기록을 향한 중압감. 시즌 막판 체력적인 문제. 거기에 메츠는 지금 외부의 우환까지 겹친 상황이거든요.]
[하지만 우리 강진호 선수, 지금까지 기록을 살펴보면 외부의 압박에 참 강한 선수거든요. 그 모든 조건을 이겨내고 충분히 대기록을 수립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자, 타석에는 이제 3번 타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이 선수도 참, 로저 클레멘스 선수와는 악연이 깊죠?]
[네, 그런데 이게 재밌는 것이 이미지로는 로저 클레멘스 선수의 일방적인 괴롭힘에 가깝습니다만, 근데 또 상대 성적을 보면 피아자 선수가 로저 클레멘스 선수를 압도한단 말이죠. 일곱 경기 31타수 11안타에 볼넷이 네 개인데 사구만 세 개에 이루타가 한 개, 홈런이 무려 여섯 개예요. 0.355/0.474/0.968. 그러니까 거의 만나는 경기마다 홈런을 하나씩 쳐내고 두 경기에 한 번꼴로 사구를 얻어맞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대기 타석의 피아자가 자신의 배트를 쓸어내렸다. 긴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저 야수는 그 많은 일 중 하나였다. 솔직히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사구를 던질 때도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동업자끼리의 예의는 있는 법이고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법 긴 시간이 지나서일까? 아니면 그토록 사납던 야수가 너무나도 초라하기 때문일까. 그 불쾌했던 일조차 이제는 그저 지나간 일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딱!!
타석의 진호가 장타를 쳐내고 2루에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홈플레이트를 향해 몸을 날린 호세 레예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했어. 루키.”
“나야 언제나 잘하고 있죠.”
피아자의 오른손이 건방진 루키의 뒤통수를 가볍게 두들겼다.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레예스를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친 그가 타석으로 걸어갔다. 마운드에는 시퍼런 수염으로 빽빽한 로저 클레멘스가 서 있었다.
가장 위대했던 투수의 가장 처참한 몰락이 보인다. 이제 막 데뷔하는 애송이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저 투수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그 찬란함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는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저 남자는 은퇴의 순간까지 가장 찬란할 의무가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장 위대한 투수로 남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피아자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역경이야말로 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많은 이들이 로저 클레멘스를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피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는 로저 클레멘스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중했다. 하지만 도금이 벗겨진 자리 남은 것은 하늘 높이 빛나는 슈퍼스타가 아닌 그저 별을 흉내 내는 형광 스티커뿐이었다.
마이크 피아자가 방망이를 강하게 움켜쥔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노력은 가치있는 것이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노화라는 시련 앞에 비겁한 방법을 택했던 에이스를 향해 긴 세월 메이저에서 군림해 온 늙은 포수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마이크 피아자!! 홈런!! 홈런입니다!! 시즌 22호 홈런!! 커리어 통산 400번째 홈런을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만들어냅니다.]
[포수 최초의 400홈런!! 마이크 피아자가 마침내 메이저 최초로 포수 400홈런 고지를 밟습니다.]
[물론 일루수와 지명타자로 출전한 경기들을 제외한다면 아직 19개의 홈런이 부족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대부분 경기를 포수로 출전하면서 400홈런이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기록입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로저 클레멘스를 향해 코웃음을 보인 피아자가 천천히 내야를 돌았다. 그것은 가장 지저분한 시대를 가장 지저분한 방법으로 헤쳐나온 에이스의 마지막에 대한 진정한 슈퍼스타의 마지막 예의였다.
-포수 최초 400홈런 기록. 이 시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 마이크 피아자를 만나 본다.-
-강진호 3타수 1안타 2볼넷. 42경기 연속안타!! 1978년 피터 로즈의 기록까지 이제 2경기!!-
-시즌 118승의 압도적인 페이스로 달려나가는 뉴욕 메츠. 휴스턴과의 시리즈 1차전 14:3 압승!!-
-끝없는 부진 로저 클레멘스 4.1이닝 6피실점 조기 강판!!-
***
휴스턴과의 2차전.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늦은 아침 일어나 식사를 하고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오늘 선발로 출전하는 투수에 대해 한 번 더 공부하고 전체적인 컨디션을 점검받는다. 가벼운 스트레칭. 그리고 그라운드로 나가 배팅볼을 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여기요!! 여기예요!!”
최근 우리 팀의 호성적, 그리고 구단주의 멍청한 짓으로 인해 불안해진 팬들의 응원이 맞물리며 평소 300장 내외의 판매를 유지하던 BP 티켓은 연일 600장 매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올 시즌 메츠의 티켓 평균 가격은 17달러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제법 비싼 편에 속했다. 심지어 BP티켓의 경우 시즌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무려 50달러의 추가 요금을 받아가며 특별히 판매하고 있었던 만큼 이것이 연달아 매진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타격 연습을 끝내고 습관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건네는 야구공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우리 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나였다. 인종의 문제는 압도적인 야구 실력 앞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메츠 프랜차이즈 사상 가장 위대한 커리어를 써 내려가고 있는 선수였다.
40분 정도 팬서비스를 끝내고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사인을 떠나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팬들이 있었지만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팬들 역시 최근 팀의 상황.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나를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이봐, 진호.”
“응?”
라커룸에 앉아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는 나의 어깨를 프레스톤이 흔들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격앙되어 있다. 본래 감정표현이 활발한 프레스톤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은 탓인지 최근에는 이 정도로 격렬하게 감정을 표하는 일은 없었다. 호기심이 밀려왔다.
“무슨 일이야?”
“잠깐 따라와 봐.”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그때 그 애야.”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나를 끌고 가는 프레스톤. 그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원정팀의 연습이 다가옴에 따라 절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BP존이었다.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다시 그라운드로 걸어 나온 나를 보며 수군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지저분한 금발 머리의 덩치 좋은 청년이 있었다.
“강!!!”
나의 이름이 마킹된 자그마한 유니폼을 흔드는 남자. 그 유니폼 아래 흐릿하게 나의 사인이 보였다.
‘저건?’
지난 8년간 내가 했던 사인만 하더라도 수만 개. 그 모든 것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98년의 유니폼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럭저럭 풀타임 메이저리거의 싹수 정도를 보여줬던 그 시절 휴스턴 원정에서 나에게 사인을 요청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제는 더는 어리지 않은 소년이 씨익 웃으며 나에게 커다란 유니폼을 내밀었다.
“부모님은?”
“오늘은 휴스턴에 계신답니다. 비행기 티켓값이 좀 비싸야죠.”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휴스턴 원정 경기 때나 보러 와도 됐을 텐데.”
“휴스턴은 재작년부터 BP를 공개 안 하잖아요. 그래서 2년이나 열심히 아르바이트로 모았죠. 보시다시피 이 유니폼은 이제 너무 작잖아요.”
“그러게, 그때만 하더라도 무슨 원피스처럼 커다란 유니폼이었는데 말이지.”
유니폼에 나의 이름을 적어 건넸다. 고작 나의 사인 하나를 받기 위해서 무려 1400마일을 날아온 소년, 아니 청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찡하게 달아올랐다. 녀석에게 쪽지 하나를 부탁해 나의 전화번호를 적어 건넸다.
“뉴욕에는 언제까지 있는 거야? 이왕 뉴욕까지 왔으니 밥은 한 끼 먹고 가야지.”
“설마!?”
“그래, 뉴욕까지 왔으니 밥이나 한 끼 사고 돌아가라고. 2년이나 아르바이트했으면 지갑도 두둑할 테니 말이야.”
감격으로 어쩔 줄 모르는 녀석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최근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 따위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정말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