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아무 가치없는 것(4)
푹 젖은 모자챙 끝으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저 자식은 어제까지만 해도 안 저렇더니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28 라운드라는 하위픽으로 시작해서 4년. 그리고 충격적인 빅리그 데뷔 이후로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말은 로이 오스왈트가 저 지긋지긋한 강진호를 만난 지도 벌써 5년째라는 의미였다.
‘올해는 좀 잘나가보나 했더니. 망할.’
무려 29.2이닝 무실점. 올 시즌 리그 전체에서 두 번째로 낮은 평균자책점과 두 번째로 많은 삼진을 기록 중인 오스왈트였다. 어쩌면 97년 이후 오직 페드로 마르티네즈만이 기록했던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그 원대한 야망은 오늘 강진호를 만남으로 인해 완벽하게 부서졌다.
[강진호!! 대단합니다!! 로이 오스왈트의 높은 공을 골라내며 결국 풀카운트를 만들어냅니다.]
[이번 타석 두 개의 스트라이크를 연달아 내줄 때만 하더라도 이번 타석은 좀 힘들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런데 투스트라이크 이후 정말 귀신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게 바로 강진호입니다!! 앞선 1회와 3회 두 번의 타석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으면 이제 쉬어갈 수도 있거든요. 사실 타자에게 홈런이란 정말 짜릿한 기억이라 저렇게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스윙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헛스윙 두 번 했다고 바로 자신의 스윙으로 귀신같이 돌아와서는 존에 걸치는 공은 커트해내고 밖으로 빠지는 공은 완벽하게 골라내면서 공 여섯 개만에 결국 풀카운트를 만들었어요.]
[사실 투수 입장에서 홈런만큼 묵직하게 타격이 들어오는 건 없다지만 0-2의 카운트를 저런 식으로 풀카운트로 만드는 건 홈런과 다른 의미로 투수를 지치게 만들거든요. 지금 로이 오스왈트 선수 굉장히 짜증 날 겁니다.]
로진백을 두들긴 손가락으로 모자챙을 매만졌다. 모자챙의 흥건한 땀과 송진 가루가 섞여 손가락 끝에 끈적한 접착력이 생겨났다. 오늘 6.2이닝 동안 오스왈트가 내준 점수는 넉 점. 그리고 눈앞의 타자가 생산한 타점 역시 넉 점이었다. 저 괴물을 거른다고 해도 딱히 그를 욕할 이는 아무도 없는 상황. 하지만 로이 오스왈트라는 에이스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멍청한 선택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바로 그 자존심이야말로 6피트의 작은 에이스, 로이 오스왈트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조각이었다. 로이 오스왈트가 올해 그를 최고의 에이스로 만들어 준 투심 패스트볼을 가장 자신 있는 코스로 찔러 넣었다.
***
컨디션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인 부분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인지 오늘 또 한 번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휴스턴에서 찾아온 그 녀석을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노곤하던 몸이 바싹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달아오른 몸이 연타석 홈런이라는 최상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 3-2 카운트에 로이 오스왈트의 공이 날아왔다.
‘쟨 바본가?’
투수는 귀와 귀 사이의 뇌로 피칭한다는 매덕스의 허세 가득한 이야기를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칭에 최소한의 생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에는 나도 충분히 동의했다. 물론 알아도 제대로 쳐내지 못하는 공은 존재한다. 하지만 앞선 타석 이미 두 번이나 홈런을 허용한 공이 한순간 그런 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양심 없는 생각이었다. 낮은 코스 살짝 휘어져 들어오는 로이 오스왈트의 투심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딱!!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타구가 또다시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오늘 경기 세 번째 홈런이었다.
[홈런!! 강진호 홈런입니다!! 맙소사. 최근 홈런 페이스가 조금 주춤했는데 오늘 경기!! 무려 로이 오스왈트를 상대로 홈런을 몰아칩니다.]
[이번 시즌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던 로이 오스왈트 선수거든요. 애리조나의 브랜드 웹, 세인트루이스의 크리스 카펜터 선수와 함께 사이 영을 다투던 로이 오스왈트!! 오늘 이걸로 사이 영 레이스에서 한 걸음 정도 뒤지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고작 오늘 한 경기 만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박빙으로 다투는 최정상급 선수들 사이에 한 경기는 충분히 크거든요.]
[강진호 선수는 오늘 이걸로 시즌 35번째 홈런입니다!! 아직 40경기 가깝게 남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40홈런을 넘기는 건 거의 확정적이라고 봐야겠죠?]
[하반기에 특히 더 타오르는 강진호 선수의 경향을 생각하면 지난 2001년처럼 50홈런을 돌파할지도 모르겠네요.]
-뉴욕 메츠 시리즈 2차전 11:9 아쉬운 패배.-
-홈런포 재가동? 강진호 괴력의 5타점 3홈런!!-
***
휴스턴에서 찾아온 손님과의 저녁. 물론 농담처럼 녀석에게 저녁을 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녀석의 지갑을 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하려는 찰나 모처럼 집에서 빈둥거리던 재키가 끼어들었다.
“자기야, 그러지 말고 집으로 부르자.”
“집으로?”
“어, 그 아이 나도 만나고 싶어.”
확실히 재키와 함께 움직이기에 레스토랑은 많이 불편했다. 나야 그저 얼굴이 알려진 스포츠 스타였지만 재키와 내가 함께하는 순간 우리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셀럽 커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음식은 어쩌지?”
“음식? 간단하게 피자 시키고 나초 좀 데우지 뭐. 어차피 그 나이면 푸아그라보다 피자가 더 좋을 나이라고. 게다가 그런 열성 팬이면 좋아하는 선수의 집을 방문한다는 게 더 감동일걸?”
“겸사겸사 유명 연예인 얼굴도 보고?”
“긴장해. 네 가장 열정적인 팬이 내 팬으로 돌아설 수도 있으니깐 말이야.”
재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레스토랑이 아닌 집으로 초대받는 녀석은 거의 기절할 듯 기뻐했고 16살 건장한 청소년의 입맛에는 11.99달러짜리 피자가 200달러짜리 프랑스식 디너보다 훨씬 훌륭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아이스크림 컵을 하나씩 들고 둘러앉은 테이블. 재키와 녀석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기는요. 제이슨이 결국 패배를 인정했죠.”
휴스턴에서 온 소년, 아니 소년이라기에는 너무 커다란 그 녀석의 이야기에 재키가 돌고래 비명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녀석이 어째서 나의 팬이 됐는지, 그리고 나의 활약에 결국 그의 형도 내가 훌륭한 선수인 것을 인정했다는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우리 자기의 수비가 화려하긴 화려하지. 사실 나도 처음 야구를 본 게 진호의 경기였는데 거기서 부웅 뛰어오르는 진호를 보고 야구 선수는 전부 그렇게 플레이하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럴 리가요!! 메이저리그에서 그렇게 수비하는 야수는 오직 Kang뿐이죠!!”
“저기 사람 앞에 두고 그렇게 칭찬하면 좀 민망하거든? 게다가 앤드루도 그 정도는 한다고.”
“에이, 앤드루 존스 선수는 조금 다르죠. 솔직히 Kang의 수비는 미스터 에브리씽이랑 비교해야죠.”
“미스터 에브리씽?”
재키의 물음에 내가 대신 답했다.
“윌리 메이스라고 야구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외야수야. 근데 상당히 옛날 선수인데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옆집에 버튼 할아버지한테 Kang의 경기를 보여줬더니 할아버지가 이야기해줬어요. ‘흠흠, 저 녀석은 마치 미스터 에브리씽처럼 뛰어다니는군,’ 이렇게요.”
녀석이 할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나이라면 윌리 메이스를 직접 봤을 확률이 높은 나이다. 그리고 윌리 메이스를 직접 봤던 사람에게 저 이야기는 야구선수를 향해서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일 것이다. 안 그래도 붕붕 떠다니던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즐거웠던 만남이 끝나고 녀석의 품에 녀석이 가지고 온 레플리카 저지 대신 예비용으로 주어진 나의 유니폼 하나와 예비용으로 구비해둔 글러브 하나, 그리고 오늘 친 284호 홈런볼을 건넸다. 메츠 구장의 경우 외야의 중앙이 잔디밭이라 관중들이 공을 받아내지 못한 경우 구단에서 회수하여 나의 사인을 받아다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했는데 계약상 판매액의 대부분이 나에게 돌아오는 만큼 약간의 수수료만을 지불하면 되는 일이라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Kang!! 평생 보물로 할게요. 가문 대대로 보물로 삼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용품들을 품에 꼭 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진다. 다 큰 어른들이 글러브를 끼고 그 작은 공 하나를 쫓아 뛰어다니는 것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주는 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가문의 보물은 모르겠고, 나중에 옥션에만 안 올라왔으면 좋겠다.”
“절대요!!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나의 농담에 좌우로 고개를 저어대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나와 함께 녀석을 바라보던 재키가 나의 허리에 손을 감아온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능청 떨지 말고.”
나의 반문에 재키가 나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눈을 흘겨왔다.
“그런데 좀 웃기지 않아? 난 그냥 선수잖아.”
“어차피 나중에 할 생각이었잖아. 그냥 조금 빨라졌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지금 같은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잖아.”
“그야 그렇지만.”
얼마 전 재키가 나에게 제이지를 만나지 않겠냐 물어왔다. 미래 각종 스포츠 에이전트와 성공적인 사업가로 이름을 떨칠 제이지였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뉴욕의 왕을 자칭하는 유명 래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처음 그가 나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재키를 통해 건네왔을 때 들었던 생각은 그가 에이전트로 나서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가 지금 나에게 접근한 이유는 그것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이유였다.
‘뉴욕 메츠를 인수할 컨소시엄의 구성.’
놀랍게도 제이지는 메츠의 현역 선수인 나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메츠를 인수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것을 앞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둘 사업가다운 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야구 업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래퍼의 객기라고 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메츠의 인수에 대해 계획해둔 것이 있었다. 다른 것은 오직 시점뿐이었다. 본래 내가 계획했던 것은 궁지에 몰린 윌폰이 메츠의 지분을 매각하려 했던 2011년이었다. 고작 6년의 차이가 얼마나 다를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6년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내 계획 속에서 2011년의 나는 두 번째 장기계약을 끝내고 10/5룰에 따라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자동으로 획득한 확고부동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물론 지금의 나도 대체불가의 자원이자 메츠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프랜차이즈 스타다. 하지만 임팩트 이상으로 누적 커리어를 중요시하는 야구의 특성을 생각할 때 8년의 커리어는 너무 짧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FA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컨소시엄에 내가 끼어들게 된다면 모양새가 너무 웃겨질 수밖에 없다.
온통 부정적인 이유로 가득한 제안이다. 하지만 웃긴 것은 그런데도 나의 입에서 칼로 자르는 것 같은 거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성적 판단으로 마이너스밖에 없음에도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묘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래퍼가 나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Kang!! 반갑습니다. 결국 뵙게 되는군요.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승낙한 건 아닙니다.”
“하하, 제 이야기를 듣는다면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