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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84화 (184/210)

# 184화.

아무 가치없는 것(5)

2005년 현재 아직 힙합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제이지는 톱스타 비욘세의 남자친구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미국 최고를 다투는 힙합 뮤지션.

그리고 그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음악적 재능 이상으로 뛰어난 사업 감각을 지닌 비즈니스맨.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그가 입을 열었다.

“메츠를 인수 할 생각입니다.”

“자금은요?”

현재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메츠의 가치는 약 15억 달러. 한화로 1조7천억을 웃돈다. 이것은 먼 미래 그가 각종 사업을 성공시켰을 때에나 노려볼 수 있을 만한 거액이었다. 2005년. 아직 힙합 레이블이나 몇 개 소유했을 뿐인 그로서는 감히 넘보기 힘든 거액이었다. 하지만 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서린 자신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컨소시엄을 구성 할 생각입니다.”

“지금 메이도프의 일로 자산가들이 모조리 위축된 상황에서 컨소시엄을 통해 15억 달러를 모으겠다고요? 아니 15억 달러도 아니죠. 제프 윌폰이 팀을 매각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이상 인수 금액은 얼마가 될지 모릅니다.”

“메이도프의 일이 터졌으니 자금을 모으기 더 쉬운 겁니다.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복잡한 금융상품을 표방했죠. 하지만 우리가 구성할 컨소시엄은 심플합니다. 실제 눈에 보이는 뉴욕 메츠라는 팀을 소유하고 발전시켜 우리를 더 부유하게 만드는 일이죠.”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좋은 딕션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듯한 제이지의 목소리가 그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포장하여 나의 귀에 꽂아 넣었다.

‘옥장판이라도 팔면 판매왕 자리는 떼 놓은 당상이겠는데?’

만약 그가 판매하려는 것이 옥장판이었다면 나도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구매해줄 수 있는 호소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판매하려는 것은 고작 옥장판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아니 사실 좋은 건 아니지만 일단 그 부분은 뒤로 미뤄보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더 중요한 일이요?”

“완전 비탄력적인 물건은 구매자가 구매 의사가 있다고 해서 구매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경제학 교과서 첫 페이지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제프 윌폰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윌폰가가 쌓아 온 자산은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고작 이 정도 위기에 제이지 씨가 말하는 것처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메츠라는 팀을 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물론 윌폰가의 자산은 막대하죠. 하지만 제프 윌폰 그 머저리는 너무 멍청했어요. 지금 그가 직면한 소송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진짜는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그의 멍청한 짓 덕분에 손해를 본 건 개미들만이 아닙니다. 윌폰에 못지않은 자산가들 역시 막대한 손해를 봤어요. 물론 그들 역시 윌폰처럼 초창기에 들어갔던 사람들인 만큼 그 손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본래 손해란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이익에서 부족한 만큼을 손해라고 하는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윌폰가는 아주 제대로 찍혔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제이지의 이야기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본래의 역사와는 달랐다. 그 당시 메이도프 폭망의 원인이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던 모기지 버블의 붕괴였다면 이번 사건은 제프 윌폰이라는 명백한 방아쇠가 존재했다. 물론 가장 나쁜 놈은 사기꾼인 메이도프였지만 그가 사기를 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던 몇몇 자산가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기가 됐건 뭐가 됐건 간에 황금알을 낳아주던 거위의 배를 제프 윌폰이 찢어버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움직임이 있나요?”

“글쎄요, 일단은 ‘우리’가 되는 게 먼저 아닐까요?”

제이지가 능글맞게 웃으며 계약서를 건넸다. 컨소시움에 나의 이름을 올리는 것에 관한 계약서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죠.”

“그러니까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사인을.”

“아니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건 메츠의 인수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부분이었죠. 거기에 내가 왜 합류해야 하는지는 빠져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뭐 Kang의 자금이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겠죠?”

제이지의 이야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은 나의 재산을 정확하게 모른다. 물론 나 역시 15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현금으로 단번에 동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무리가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현재 나의 재산은 여기저기 분산된 것들을 다 모으면 메츠만 한 구단을 두 개는 사고 남을 만큼 막대했다. 손해를 각오하고 자산을 다 처분한다면 15억 달러쯤이야 너끈했다.

“얼굴마담이 필요한 건가요?”

“얼굴마담이요? 그럴 리가요. 조금 자기자랑 같긴 합니다만 얼굴마담이라면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이지가 말을 이었다.

“필요한 건 역시 신뢰죠. 메츠라는 팀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Kang의 돈이 필요한 이유는 저 자산가라는 머저리들은 그 신뢰를 오직 돈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츠와 재계약을 할 거라는 증거가 필요하다 이 말이로군요. 이거 저를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전혀요. 데뷔 8년 차. 일곱 시즌 동안 세 번의 MVP와 일곱 번의 골드글러브. 네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선수라면 한 팀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증거로 충분하죠. Kang의 재계약만 담보된다면 컨소시엄에 투자하겠다고 나설 인간들이 넘칠 겁니다.”

“그래서 제이지씨는 어떻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답했다.

“제 돈만 충분했다면 당신을 컨소시엄에 끌어들일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팀만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무조건 메츠와 재계약할 테니까요.”

“호,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나의 질문에 제이지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돈은 중요하죠.”

“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종 잊곤 하더라고요. 그 돈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 없는 종이쪼가리라는 걸요.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인해 가장 중요한 가치 자체를 헤아리지 못하게 돼버린 거죠. 하지만 해서웨이 양이 그러더군요. 자신이 인생을 건 남자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 사람은 타고난 사업가다. 남을 기분 좋게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만드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고작 이런 사탕발림에 넘어가기에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제이지가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필사적으로 참여해서 안 되는 이유를 찾으려고 하시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합리적 판단을 위해서? 가장 좋은 선택을 찾기 위해서? 설마요. Kang은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라난 제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연고지 전통을 잇는 뉴욕 메츠를 사랑하는 것처럼 뉴욕 메츠에서 데뷔해 뉴욕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살아온 Kang 역시 메츠를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시다. 다른 하찮은 이유는 얼마든지 맞춰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제이지의 이야기가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제2의 루스보다 최초의 강진호를 원한다?’ ‘불멸의 명예?’ 물론 다 옳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핑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모든 핑계를 만들어낸 근간에는 메츠라는 팀에 대한 나의 애정이 있었다. 부상으로 가능성 없던 아시안을 28살까지 데리고 있던 메츠가 좋았다. 이제 막 메이저에 데뷔한 외야수를 반짝이는 눈으로 쫓아다니던 메츠의 어린 팬이 좋았다.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퀸스의 시민들이 좋았다. 나는 메츠를 사랑하고 있었다.

“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한다고 치더라도 제가 컨소시엄에 자금을 투자하는 순간, 저의 재계약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요.”

“장기계약에 관한 이야기는 컨소시엄에 자금을 투자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Kang이 왜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중요한 건 결국 Kang이 얼마나 야구를 잘하느냐 아닌가요? 앞서 이야기했던 골치 아픈 일들은 모두 저에게 맡겨 주세요. Kang은 그저 지금처럼 야구만 잘 해주면 됩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훗날 명예, 그리고 Kang의 가치에 걸맞은 달러를 손에 쥐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제이지의 이야기에 마침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계약서는 조금 수정해야겠군요. 사실 제가 그 아무런 가치 없는 그 종이쪼가리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아서요.”

“네?”

***

제이지는 생각만큼 유능했고 그의 말은 옳았다. 그가 음악보다 잘하는 일이 사업인 것처럼 내가 사업보다 잘하는 일은 야구였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끄고 다시 오롯하게 야구에 집중하는 순간 잠시 내려왔던 나의 타격감이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세 경기 연속 멀티 안타 강진호!! 피터 로즈의 44경기 연속안타기록경신!! 1941년 7월 17일 조 디마지오의 The hitting streak 이후 최장기록!!-

-강진호 애틀랜타와의 시리즈 2차전 시즌 30번째 도루 성공!! 커리어 여섯 번째 30-30 돌파!!-

-시즌 39호 홈런!! 강진호 시즌 막판 괴력의 몰아치기!!-

-끊기지 않는 안타 기록!! 강진호 2타수 1안타 3볼넷 1삼진. 54경기 연속 안타!!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두 경기뿐!!-

그리고 마침내

딱!!

[7회 말!! 강진호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우측 담장을 향해 쭉쭉, 쭉쭉 뻗어 나갑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강진호!! 강진호!! 3타수 무안타로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강진호 선수!! 마침내 55경기 연속 안타 시즌 40호 홈런으로 달성합니다!!]

[존 스몰츠, 오늘 정말 완벽한 피칭으로 메츠 타선을 침묵시키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강진호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존 밖으로 공 하나만큼 빠지는 투심을 저렇게 쳐내는 타자를 상대로 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어느새 55경기 연속 안타입니다. 이제 메이저 최다 기록인 조 디마지오 선수의 기록까지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았어요.]

[최근 타격감을 보면 기록 달성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봐야겠죠? 최근 열 경기 중에서 멀티 안타만 무려 여섯 경기에 삼진은 단 두 개뿐입니다.]

[물론 안타라는 것이 그렇게 확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만 저도 역시 최근 강진호 선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충분히 신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며칠 전 생일이 지나 이제는 만 29세, 그야말로 타자로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메이저 130년 역사 속에서 절대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으로 칭송받는 The hitting streak를 깨기에 한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

암막 커튼으로 깜깜한 호텔 방. 스트라이프를 빼앗긴 야수가 어둠 속에 파묻힌 자신의 왼손을 응시했다.

‘고작 아시안에게, 그것도 메츠 따위에게 영광을 넘겨 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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