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1)
진호가 타임 슬립을 하게 되면서 이전과 가장 다른 삶을 살게 된 개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장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은 메이저리그 팀들이 어디인지는 확실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그리고 뉴욕 양키스.
본래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절대적인 패자로 북미 4대 리그를 통틀어 가장 긴 연속 지구 우승을 기록했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우리 팀에게 밀려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만년 2위 팀이 돼버렸다.
양키스의 경우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라는 이름 자체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무언가에 올드라는 이름이 붙기 위해서는 그것이 과거가 돼야 하는 법이다. 양키스에게 새로운 그레이트는 생기지 않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시절은 여전히 루스부터 M&M까지의 그 시절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운드에는 그 두 팀 모두와 관계된 투수가 올라올 예정이었다.
앤디 페티트. 양키스 코어 4의 일원이자 로저 클레멘스와 사이 좋게 P.E.D.를 복용했던 선발 투수. 2004년 재계약에서 양키스는 앤디 페티트와의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덕스와의 계약이 마무리됐던 애틀랜타는 그런 앤디 페티트에게 3년 계약을 주고 데려왔다. 약물 복용자인 것이 들켰다고는 하지만 다른 자들과 달리 부상의 빠른 회복을 위해 저지른 부적절한 행위였음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사과함으로써 여론이 부정적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몸값이 실력에 비해 시세보다 싸게 형성됐다는 점 역시 주요하게 작용했지만 말이다.
[뉴욕 메츠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시리즈 3차전입니다.]
[올해도 역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와 2위를 다투는 두 팀의 맞대결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사실 1위와 2위의 맞대결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이제 조금 밋밋해지지 않았나 싶군요.]
[지금 두 팀의 승차가 9승 차이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번 시리즈도 이미 메츠가 2연승을 거뒀습니다.]
[30경기를 남기고 9승 차이라니. 사실상 동부지구의 우승은 메츠로 결정 났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브레이브스도 아직 시즌을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물론 지구우승과는 멀어졌다지만 아직 와일드카드가 남았거든요.]
[선발 대진운 역시 나쁘지 않아요. 오늘 경기 브레이브스의 선발은 앤디 페티트. 작년 약물복용을 솔직하게 털어놔서 화제가 됐던 선수죠? 올 시즌 작년까지의 부진이 거짓말인 것처럼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물복용 선수에 대해 최대 선수 기록 삭제까지 하겠다고 선언한 사무국입니다만 앤디 페티트 선수의 경우에는 그 선언 이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죠. 덕분에 이전 룰에서 명시돼있던 최대수위의 벌금을 선고받았습니다. 덕분에 징계 수위에 관한 논란이 조금 있었습니다만 04년 연봉 전체를 기부함으로써 여론을 반전시켰어요. 게다가 야구 선수의 미덕은 역시 야구를 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상의 회복 때문에 약물을 복용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상 전, 전성기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물론 시즌 중에 있었던 몇 차례의 약물검사를 완벽하게 통과한 상태입니다.]
[반면 메츠의 선발인 알 라이터 선수는 올 시즌 성적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하락세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빠른 공의 평속은 약 1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평균자책점은 2점 가깝게 상승했어요.][이렇게 되면 올해를 끝으로 은퇴절차를 밟는다고 봐야겠죠.]
앤디 페티트가 자신의 왼손을 몇 차례 쥐락펴락했다. 팔꿈치 부상, 그리고 재활을 거치며 생긴 버릇이었다. 단단한 근육의 갑옷으로 덮여있는 왼팔을 바라본다. 그 최악의 순간들이 그저 악몽처럼 느껴졌다.
‘후회하지 않아.’
비겁했으며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의 선택은 같을 것이다. 비록 스트라이프는 뺏겼지만, 그에게는 아직 마운드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스트라이프 역시 앞으로의 활약에 따라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 공을 던질 수 있는 팔을 되찾은 이상 나머지는 모두 이 팔로 찾아올 것이다.
앤디 페티트가 오직 투수에게만 허락된 그라운드의 성지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그의 시야에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 그리고 그 뒤편에서 대기 중인 강진호가 보였다.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가로막은 타자. 그리고 뉴욕의 야구팀 하면 양키스였던 인식을 ‘메츠도 있다.’까지 끌어 올린 위대한 야구 선수였다.
‘그래, 좋아. 아마 넌 역사에 이름을 남길 거야.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하라고.’
그가 위대한 기록을 남길 선수라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이 양키스의 전설을 밟고 올라가게 둘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양키의 전설을 경신하는 것은 오직 양키여야만 했다. 아시아 출신의 퀸즈 녀석에게 그것은 너무 과분하다.
앤디 페티트의 두꺼운 팔뚝이 꿈틀거렸다. 세차게 날아드는 커터. 리키 헨더슨이 자신의 몸 바깥쪽을 휘어지는 그 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건방진 약쟁이 자식이 감히 누구를 무시하는 거야.’
작정하고 휘두른 방망이가 폴짝 뛰어오른 유격수 라파엘 퍼칼의 키를 살짝 넘어갔다. 앤디 페티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리키 헨더슨!! 초구 강타!! 내야를 넘기는 안타입니다!!]
[리키 헨더슨!! 1루 돌아 2루까지!! 2루에서 무사히 세이프입니다.]
[최근 다섯 경기 외야로 공을 내보내지 못했던 리키 헨더슨 선수가 오래간만에 장타를 기록합니다.]
[올 시즌 여섯 번째 이루타!!]
[메이저 현역 최고령 리키 헨더슨!!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선수입니다. 지금 나이가 만으로 46살. 한국식으로는 48살인데 메이저 리그에서 아직도 2할 2푼을 치고 있어요.]
27년간 빅리그에서 살아남은 괴물이 2루에서 마운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46살. 커리어 출루율 4할이 무너진지도 벌써 2년. 이제는 커리어 장타율조차 4할이 위험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리키 헨더슨은 앤디 페티트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메이저 리그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부상에 꺾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렇기에 리키 헨더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야구가 재밌는 것은 한계까지 몰아붙인 자신의 기량을 타인과 겨루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에는 부상 역시 포함된다. 자신에게 불리한 점을 다 제거한 채 비겁한 싸움을 벌여 승리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재미를 줄 수 있을까?
‘방심했어.’
벌써 몇 경기째 제대로 된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한, 사실상 이름값으로 메이저에 붙어있는 리키 헨더슨이었기에 방심했다. 다음 타자에게 신경이 쏠려 커터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앤디 페티트가 2루에 선 리키 헨더슨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리고 타석에 강진호가 들어왔다.
***
‘확실히 성적이 다시 좋아질 만한 투수야.’
앤디 페티트가 던지는 커터의 각이 예리했다. 사실 작년 하반기부터 그런 기미는 있었다. 다만 양키스의 내야진이 이름값에 비해 수비능력이 그리 좋지 못했던 탓에 성적에 극적인 반등이 없었지만 라파엘 퍼칼, 치퍼 존스, 마커스 자일스라는 걸출한 내야수들이 버티고 있는 애틀랜타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방금의 이루타도 올 시즌 대부분의 출루가 내야 땅볼이었던 리키 헨더슨의 타구를 생각해 평소보다 깊숙하게 들어와 있던 수비 위치가 아니었다면 2루타는커녕 단타도 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몸쪽 깊숙하게 파고드는 커터. 배트를 휘둘러봐야 내야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외치는 자신감 넘치는 공이였다. 동시에 내가 예상한 구질의 공이기도 했다.
‘큭 좀 깊숙한데?’
예상과 달랐던 점은 조금 더 몸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공이였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몸쪽 깊숙한 커터!! 강진호!!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좌측 담장을 향해 날아갑니다.]
[아, 그런데 바람이 좋지 않습니다. 공이 좌측으로 너무 꺾이고 있어요!! 아!! 아쉽습니다. 라인을 벗어난 좌측 모퉁이에 떨어지는 공. 파울, 파울입니다.]
[참 아쉬운 장면이네요. 그래도 마운드의 앤디 페티트 선수는 가슴이 철렁했을 거예요. 지금 이게 조금만 오른쪽으로 휘어 들어갔으면 그대로 장타였거든요. 리키 헨더슨 선수의 발을 생각하면 점수는 무조건 내주는 거였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행인 점은 오늘 스윙을 보니까 강진호 선수의 타격감은 여전히 좋아 보인다는 점이에요. 지금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데 이게 거의 담장 근처까지 날아갔거든요. 이런 타격감이라면 오늘 56경기 연속 안타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런 대기록이 달린 경기에서는 기록을 경신해야 하는 선수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분들도 긴장하지만, 이걸 중계하는 저희 해설들도 굉장히 긴장되거든요. 그런데 오늘 경기는 이상하게 크게 긴장되지를 않아요. 강진호 선수라면 너무 당연히 기록을 경신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MLB.COM 선정. 메이저에서 가장 위대한 기록 1위. 가장 경신되지 않을 것 같은 기록 1위에 랭크됐던 조 디마지오 선수의 56경기 연속 안타와 타이기록까지 1안타만이 남은 상황입니다.]
큼지막한 파울. 조금 깊숙하게 들어오기는 했지만 조금만 더 배트를 끌어당겼다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공이였다. 타석 밖으로 잠시 물러나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덕아웃의 동료들이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나를 응원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타석에 들어가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56경기째의 안타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 마운드의 앤디 페티트가 두 번째 투구자세에 들어갔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녀석의 손끝에서 출발한 누런 공. 찰나의 순간 그 공이 그릴 궤적이 나의 머릿속에 예상됐다.
‘이런!!’
살짝 높은 코스의 공이였다. 하지만 몸쪽으로 너무 가까웠다. 물론 나에게는 몸에 공을 맞아서라도 출루하겠다는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황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공이 너무 깊숙했다.
뻐억!!
[악!! 힛 바이 피치!! 힛 바이 피치입니다. 강진호 선수 몸을 빼봤습니다만 앤디 페티트 선수의 공이 너무 깊었어요.]
[강진호 선수 팔뚝을 맞은 것 같은데요? 지금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아, 이건 아니죠. 몸쪽 공을 이런 식으로 던지는 건 좀 아닙니다. 방금은 강진호 선수가 굉장히 빠른 시점에 피했거든요. 그만큼 깊숙한 공이었어요. 그런데 심지어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였어요.]
[어? 앤디 페티트 선수. 지금 강진호 선수에게 사과하는 것 같은데요?]
[아, 그렇네요. 지금 모자까지 벗고 사과를 합니다.]
[메이저 리그 팬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이건 메이저 리그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메이저에선 이런 것도 그냥 경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올해로 메이저 중계만 7년 차인데 빈볼을 던진 투수가 사과하는 걸 보는 건 처음입니다.]
맞은 부위는 오른팔 하박.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욱씬거리는 팔뚝에 일루 코치가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시원한 감각이 팔을 덮었다. 하지만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운드의 앤디 페티트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메이저에서 보기 드문 히트 바이 피치에 대한 사과였다.
‘망할 자식.’
물론 사과를 받았다고 짜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구도 안 되는 자식이 몸쪽 승부를 하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신기록 경신을 앞둔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잠깐만, 그런데 페티트가 원래 제구가 안되는 자식이었나?’
노아웃 주자 1,2루. 앤디 페티트가 존을 넘나드는 피칭으로 마이크 피아자를 요리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약물복용을 시인했던 투수를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 기묘한 상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