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2)
뻐엉!!
“스트라잌!! 아웃!!”
[루킹 삼진!! 앤디 페티트의 뚝 떨어지는 커브에 노마 가르시아파라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합니다.]
[1회 초, 리키 헨더슨에게 이루타를, 그리고 강진호 선수를 상대로는 히트 바이 피치를 허용하며 기우뚱했던 앤디 페티트, 하지만 이어지는 피아자 선수를 삼진으로, 프레스톤 선수를 외야 플라이로 그리고 노마 가르시아파라 선수에게 두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무사히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잔루 1, 2루. 앤디 페티트가 위기를 무사히 수습합니다.]
[이닝 초반만 하더라도 제구력에 난조를 보였던 앤디 페티트. 베테랑답게 노련하게 이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나저나 강진호 선수 공에 맞은 부위가 살이 많은 부위가 아니거든요. 그래도 일루에 그냥 서 있는 걸 봐서는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대기록을 앞두고 있는 만큼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모자를 고쳐 쓰고 가볍게 발끝을 톡톡 마운드에 두들겼다. 그리고 눈알을 슬쩍 움직여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괴물을 바라본다. 비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비겁자로 남을 이름이다. 자신의 희생이 양키스라는 프랜차이즈의 전설에 보탬이 된다면 약간의 비겁이 더해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 따윈 없었다.
덕아웃에 돌아가 팔뚝에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진호. 앤디 페티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차례 휘휘 팔을 돌린 진호가 태연하게 벤치에 주저앉는다.
‘좋았어.’
팔뚝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엉덩이, 혹은 허벅지 쪽이 좋았다. 오늘 경기 그의 몸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자신 있었다. 저 괴물이 아무리 위대한 타자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투수와 타자의 싸움이란 투수에게 7할의 승률이 담보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괜히 더 위험한 부위를 맞춘다면 그래서 오늘 경기 자체를 빠져버린다면 기록은 끊기지 않는다. 0타석 경기는 연속 경기 안타 기록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한 타석, 필요한 것은 오직 한 타석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앤디 페티트가 왼 주먹을 움켜쥐었다.
***
누군가의 인생에서 8년이란 충분히 긴 시간이다. 양키스, 토론토 그리고 플로리다를 거쳐 메츠까지. 19년의 커리어 중 8년. 39년이라는 인생 중 8년. 뉴욕 메츠는 알 라이터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직장이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맞부딪히며 싸워왔던 상대들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비록 90년대 그 시절의 그들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타자들은 여전히 군청 빛의 언더웨어에 붉은빛의 용기가 새겨진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일 거야.’
무려 8년 동안이나 다퉈왔던 숙적과의 마지막 승부였다. 포수 마스크를 눌러쓰고 미트를 팡팡거리는 늙은 동료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언제나처럼 등을 돌려 야수들을 향해 모자를 벗는다. 투지로 가득한 어린 동료들이 보였다. 오늘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캡틴이 슬쩍 모자를 치켜세웠다. 이제 막 하이스쿨을 졸업한 것 같았던 앳된 청년이 이제는 누구보다 듬직한 팀의 캡틴으로 성장했다. 언젠가 손자를 무릎에 앉혀두고 내가 그 위대한 미스터 메츠와 함께했었노라고 이야기하는 광경이 눈앞에 스쳤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역시 해피엔딩이 좋았다. 라이벌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질질 짜는 마지막은 역시 내키지 않았다. 뻑뻑한 카스텔라로 시작했다면 마지막은 시원한 콜라 한 잔은 들이켜 주는 것이 매너인 법이다.
알 라이터의 전력을 다한 87마일 투심 패스트볼이 날아들었다.
딱!!
시원하게 돌아간 배트. 바닥을 한번 찍은 공이 크게 떠올랐다. 방망이를 휘두른 라파엘 퍼칼이 빠르게 1루를 향해 질주한다. 하지만 호세 레예스가 한 발 더 빨랐다. 폴짝 뛰어 공을 낚아챈 그가 바닥에 채 발이 닿기도 전에 몸을 획 돌려 1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불안한 송구. 하지만 그 불안한 송구를 노마 가르시아파라의 미트가 안정적으로 받아냈다.
“아웃!!”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54경기 41승 13패. 메츠의 내야가 에이스의 마지막 라이벌전을 전력으로 돕기 시작했다.
***
따악!!
치퍼 존스의 배트가 공을 두들기는 그 순간 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잡을 수 있다. 달리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려 정확한 위치를 한 번 더 파악했다. 그리고 전력으로 달리던 몸이 붕 떠올랐다. 쫙 벌린 글러브의 포켓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서둘러 오므린 글러브 안쪽으로 퍼덕거리는 야구공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강진호 선수의 호수비!! 1루 막 지난 치퍼 존스 선수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봅니다. 저 선수도 벌써 몇 년째 저런 수비를 보고 있는데 저만하면 적응할 법도 한데 말이죠.]
[하하,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벌써 몇 년째 강진호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고 있긴 합니다만 저런 수비를 볼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지거든요.]
[저런 수비 때문에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유행하는 세이버매트리션이라는 야구를 분석하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클래식 스탯에도 불구하고 강진호 선수야말로 가장 과소평과된 선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관중들을 향해 가볍게 던져 주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프레스톤이 가볍게 달려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뭐가?”
“그거.”
그의 시선이 나의 팔뚝을 향했다.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자욱. 뼈가 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육의 실핏줄 정도는 터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흔적이다. 프레스톤이 이를 드러냈다.
“알 씨한테 이야기할까?”
“모자까지 벗어가면서 사과했는데 그럴 순 없잖아.”
“그깟 모자 벗은 게 뭐라고. 우리 알 씨도 모자 엄청 잘 벗는다고.”
“그거야 우리한테나 그렇지. 오늘 기세 좀 봐라. 브레이브스 엉덩이 제대로 걷어차 주겠다고 벼르고 있잖아.”
“하긴, 역시 올해가 마지막이겠지?”
“라커룸에 보충제도 더 안 들여놓더라. 진짜 마지막이야.”
프레스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원래 이런 짠내나는 라이벌전은 이겨주는 게 미덕이잖아.”
“그래, 저 양반 브레이브스 통산 전적이 14전 5승 3패니까 더블 스코어 정도는 만들어 주자고.”
“겸사겸사 네 녀석 그것도 경신 좀 해주고.”
“우와 이 자식 보통 그런 기록 경신 같은 건 본인 배려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정상 아니냐? 아까 라커룸 보니까 애들도 아무도 나한테 말도 안 걸던데.”
“그래서, 내가 말했다고 경신 안 할 거야?”
“뭐, 그건 아니지만.”
두 번째 타석.
앤디 페티트의 공이 구석구석을 공략했다. 아슬아슬하게 존을 넘나드는 공들. 평속 90마일이 채 되지 않는 선발 투수가 아메리카리그 동부지구에서 ERA 3점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딱!!
[쳤습니다!! 강진호!! 강진호!!]
[아, 파울라인 아슬아슬하게 넘어갑니다.]
[1회 초 빈볼로 인해 몸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배트 휘두르는 걸 보니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참 다행이에요.]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그 정도다. 훌륭한 선발 투수, 약팀이라면 에이스가 될지도 모르는, 하지만 시대의 지배자로 이름 올리기에는 한참 부족하고, 리그 에이스급이라고 하기에도 한 끗 부족한 딱 그 정도의 투수. 내 오른팔이 온전하지 않다고 해서 이 정도를 감당하지 못할 리는 만무했다. 존에 슬쩍슬쩍 걸치는 공을 정확하게 잡아당겼다.
‘젠장.’
하지만 오른팔에 실린 힘이 완전치 않았다. 조금 더 끌어당겼다면 확실히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을 공만 벌써 두 개. 하지만 괜찮다. 던지는 공이 늘어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저쪽. 난 그저 침착하게 기다리면 된다.
뻐엉!!
바로 이렇게.
[강진호, 바깥쪽 낮은 볼을 잘 골라냅니다.]
[1회 초에 이어 두 번째 출루입니다.]
[아, 그런데 이게 참. 좋아할 일인데 좋아할 수만 없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기록이라는 것이 걸려있다 보니 이게 출루에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어요.]
[조금 불합리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뭐 어쩔 수 없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전 매덕스 선수와의 승부와는 다르게 오늘 앤디 페티트 선수는 적극적으로 승부에 나서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망이를 내려놓고 1루로 향했다. 나의 보호장비를 받아든 1루 코치가 도루 장갑을 건넸다.
‘너무 험하게 뛰지 말고 조심해.’
하지만 1루 코치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달릴 기회 따위는 남지 않았다. 땅볼, 그리고 또 외야 플라이. 나의 두 번째 출루가 허무하게 끝났다.
알 라이터는 분전했다. 압도적인 구위로 상대 타자들을 찍어 누르지는 못했다. 치퍼 존스와 앤드루 존스, 제프 프랑수아까지. 현역 최고 수준으로 이름을 날리는 30대 초중반 팔팔한 타자들을 억누르기에 그의 87마일 속구는 너무 느렸다. 하지만 끈질긴 외곽 승부, 그리고 중간중간 섞여 들어오는 변화구들이 그들의 스윗스팟을 벗어났다. 내 외야의 야수들이 평소보다 훨씬 바쁘긴 했지만, 알을 위해 그 정도 수고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알과 특별한 친분이 없는 루키, 혹은 이적생들 역시 프레스톤 녀석의 성화에 평소보다 반의 반 박자 정도는 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나의 세 번째 타석.
‘이 자식. 승부할 생각이 없구나.’
매덕스가 대놓고 볼넷을 던졌다면 오늘 앤디 페티트는 자기 자존심을 살려가면서 볼넷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까다로운 승부를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 볼넷이 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세 번째 출루. 적당히 리드를 벌이고 있던 나를 힐끔 바라보던 녀석이 재빨리 1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기습적인 견제구. 나의 앞섶이 누런 흙으로 물들었다.
“세이프!!”
견제의 달인이니 뭐니 하지만 나 역시 주루에 있어서만큼은 현역 최고를 자부하는 몸이었다. 아, 물론 현재 폼이 기준이다. 그런 것 없이 그냥 현역 최고를 자부하기에는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현역 생활을 영위중인 주루의 신이 하나 있으니 말이다.
견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아자, 프레스톤을 상대하는 동안 무려 네 차례나 이어진 견제구.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녀석이 던진 빈볼로 인해 팔도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 이런 짜증 나는 견제라니.
딱!!
[프레스톤 윌슨!! 큽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을!!]
프레스톤의 타구가 우측 담장을 직격했다. 견제로 조금 지친 몸을 채찍질했다. 소중한 1점이었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세이프!!!”
6회 초 드디어 점수를 만들었다. 알 라이터에게 건네줄 선물의 첫걸음을 뗀 셈이다. 그리고 알이 그 선물을 스스로 확실하게 챙겼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알 라이터, 여섯 번째 삼진!! 알 라이터가 켈리 존슨을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6이닝 무실점. 이대로 경기에 승리한다면 1승을 더 챙기겠군요.]
마운드에서 내려온 알이 아이싱을 시작했다. 39세의 투수에게 6이닝 97개의 투구 수는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오늘 그는 서른아홉의 투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피칭을 보여줬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 그리고 나의 기록이었다.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까?’
존에 들어오는 공이라면 얼마든지 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승부를 피하는 투수에게 승부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벌써 강진호 선수의 네 번째 타석입니다.]
[앞선 타석에서 힛 바이 피치, 볼넷, 볼넷으로 세 번의 출루에 성공했던 강진호 선수. 오늘 타격감은 절대 나쁘지 않은 것 같거든요. 하지만 투수가 이런 식으로 승부를 피해서야 방법이 없죠.]
[뭐 그래도 0타석이 될 경우 기록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웃 카운트만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
뻐엉!!
바깥쪽 체인지업. 강진호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고 심판의 손 역시 올라오지 않았다.
‘슬슬 된 것 같은데.’
오랜 시간 계획해왔던 것을 실행시킬 마지막 한 조각만이 남았다.
볼카운트는 3-2 풀 카운트. 강진호의 동작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사그라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늘 자신이 승부를 피하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 더해 한가지. 오늘 강진호를 상대로 단 하나도 던지지 않았던 공이 더해진다.
빌어먹을 약쟁이, 하지만 그에게 누구보다 큰 도움이 됐던 로저 클레멘스에게 전수 받았던 메이저 최고의 마구 스플리터가 바로 그것이었다.
공을 던지기 직전 좌측 전거근이 한 번 더 꿈틀거린다.
딱!!
‘어?’
타석의 강진호가 3초가량 공을 관찰하고 방망이를 툭 던져놓은 채 슬렁슬렁 1루를 향해 움직였다. 야구의 불문율을 벗어난 그 배트 플립에 메츠의 라이벌 브레이브스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앤디 페티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56경기······.’
그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생일선물로 받았던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념 야구 카드만이 맴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