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4)
시즌의 막판. 다섯 달 가깝게 달려온 몸의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단순히 투수들이 던진 사구로 인한 타박상만이 아니었다. 수비를 위해, 주루를 위해, 적극적인 타격을 위해 순간, 순간의 무리함이 쌓인 몸은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 됐을 때는 그야말로 만신창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자기야 괜찮아?”
“어? 아, 이거? 뭐 1, 2년 이런 것도 아니고 괜찮아. 그보다 자기가 고생이지. 혼자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힘들잖아.”
“헤헤, 그래도 내가 엄청나게 고생하는 거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등 뒤에서 내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재키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냥 전문가들한테 다 맡겨 버릴까?”
“아니야!! 내 결혼식인데 내가 골라야지!! 자기는 그냥 열심히 응원이나 해 달라고,”
“응원이야 항상 하고 있지만 자기가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사실 이미 각오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아시아 쪽 문화는 힘들긴 힘든 것 같아. 뉴욕에서 하는 결혼식이야 순전히 내 마음대로라지만 한국에서 하는 식은 조율해야 할 게 너무 많거든.”
확실히 그녀의 이야기처럼 내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님에게 자식의 결혼식은 그냥 자식이 배우자를 얻는다는 느낌보다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신 것 같았다. 며느리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전세기로 뉴욕의 결혼식에 친척들과 친한 지인들 몇몇을 초대하는 거로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자신의 친구분들과 이름도 모를 친척들까지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강권하시는 탓에 부득이하게 결혼식은 미국과 한국 두 곳에서 열어야 했고, 한창 시즌으로 바쁜 나를 대신하여 재키가 홀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집 정도면 제법 양호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미국도 동남부 쪽은 엄청 심하잖아. 그거랑 비교하면 그리 크게 차이 안날 걸?”
“하긴, 그거 생각하면 또 그런가? 아, 그보다 뉴욕 쪽 결혼식 프레스톤은 어떻게 하겠데? 두 자리? 아니면 내 친구 옆자리?”
“글쎄, 지금은 두 자리라고 이야기하고 있기는 한데, 그 자식 하는 거 생각해보면 그때쯤 되면 친구 옆자리가 필요할 것 같단 말이지.”
결혼식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떠드는 사이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있던 그녀의 몸이 스르륵 나의 옆으로 미끄러져 왔다. 자연스럽게 혀가 섞이고 묘한 눈빛의 그녀가 나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허벅지가 나의 오른 팔뚝을 슬쩍 건드렸다.
‘윽.’
나도 모르게 지어진 인상. 그녀의 눈이 그것을 예리하게 캐치했다.
“자기야 팔 많이 아프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결혼 준비로 예민한 재키다. 최근 함께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이런 좋은 분위기를 그냥 이렇게 넘겨버릴 수는 없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찜질팩이 붙어있는 오른팔을 들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음을 어필했다.
“어? 아냐. 충분히 움직일 만해.”
나의 목소리에도 그녀 얼굴에 어린 걱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냐, 팔도 안 좋은데 푹 쉬어야지.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재키의 몸이 나의 허벅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
[강진호 선수가 새로운 역사를 쓴 이래 벌써 아홉 경기가 지나왔습니다.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절대 깨질 것 같지 않던 기록을 넘어 이제는 66경기 연속 안타에 도전하는 강진호 선수!! 오늘 상대는 조시 베켓!! 올 시즌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 중인 투수입니다.]
[이 선수도 정말 볼이 좋습니다. 직구 평속이 95마일까지 나오거든요. 거기다가 공이 굉장히 묵직해요. 전성기 박찬화 선수와 비교하면 구속은 좀 느리지만 대신 코너웍이 좋습니다. 사실 조금 불안한 것이 최근 열 경기 강진호 선수를 보면 완급조절용으로 들어오는 느린 변화구에 정말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반해서 빠른 공에는 그리 좋지 못하거든요.]
[물론 그 좋지 못하다는 점이 다른 공에 비해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도 충분히 기록 연장을 기대해봐도 좋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자, 게다가 오늘 볼거리는 강진호 선수만이 아닙니다!! 지난 9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으로 메이저에 진출했던 송성준 선수가 무려 6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드디어 빅리그에 선발로 데뷔합니다.]
[이 선수도 참 다사다난했어요. 콜업을 앞두고 두 번이나 부상으로 무산됐으니 말이죠. 사실 올해도 선발로 뛰기에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메츠의 선발진이 전체적으로 노후화됐다는 것이 운으로 작용했습니다. 선발 로테이션 전체에 하루의 휴식을 주는 차원에서 이렇게 기회가 온 거거든요.]
[지금 메츠의 선발진을 보면 이름값이야 물론 대단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나이가 있어요. 오늘 경기에서 송성준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앞으로 정말 유리해질 수 있습니다.]
불펜의 한구석. 80년생. 26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머리숱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동양인 투수 송성준이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팜 최고의 유망주로 꼽힌 지도 어느새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트레이드. 콜업 직전의 부상 그리고 또 부상. 기나긴 재활. 그리고 잃어버린 서클 체인지업과 다가오기 시작한 군대까지. 수많은 악조건이 그의 머리숱을 앗아갔다.
‘가자.’
하지만 그 어려움이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머리숱뿐이었다. 마이너 시절 샤워실 벽에 쓰여있던 싸구려 글귀가 떠올랐다.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서점에 널린 싸구려 자기개발서마다 한 줄씩은 쓰여있을 것 같은 그 말이 마지막이라고 느꼈던 순간마다 그를 움직이게 했다. 마른세수를 하던 성준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빅리그 첫 번째 무대의 압박감에 후드득 머리털이 흩날린다. 오늘 그의 맞대결 상대는 조시 베켓. 운명이라면 운명 같은 상대였다. 99년 드래프트 전체 2위의 투수. 한때 성준은 그와 비견될만한 유망주로 손꼽혔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이야기 자체가 부끄러울 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글러브를 챙겨 든 성준이 그라운드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
“휘유, 진호. 네 고향 후배 생각보다 괜찮은데?”
“뭐 기본적으로 재능은 있는 녀석이니까. 게다가 오늘 평소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실전에 강한 타입 인가? 긴장할수록 더 힘을 발휘하는?”
“글쎄다, 뭐 그런 거면 좋겠네. 메츠에 있는 한 앞으로 큰 무대에 설 일이 많아질 테니까 말이야.”
1회 초. 성준이가 플로리다의 타선을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두 개의 삼진과 하나의 땅볼. 92마일가량의 속구도 속구였지만 번번이 타자들의 배트를 헛돌게 만든 스플리터가 아주 일품이었다. 그것은 평소 불펜 피칭에서 보여주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구위였다.
덕아웃 구석, 투수용 점퍼를 걸친 성준이가 음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선발 등판일에 예민해지는 선발 투수는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던 만큼 못 본 척 나의 타석을 준비했다. 최근 부쩍 리키 헨더슨을 대신해서 1번으로 들어가는 호세 레예스가 헬멧을 챙겨 쓰고 타석으로 향했다.
대기 타석에서 조시 베켓의 피칭을 지켜봤다. 묵직하고 빠른 공이다. 다만 구위 자체는 데뷔해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하지만 존 구석구석을 찌르는 로케이션은 매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따악!!
[2구째!! 아!! 배트 밀렸습니다. 인필드플라이입니다!! 최근 1번 타자로 자주 나오고 있는 호세 레예스 선수. 뭐 발도 빠르고 출루율도 괜찮고 참 좋은 선수입니다. 하지만 전 이런 장면들이 너무 아쉬워요. 1번 타자는 출루나 주루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많은 공을 보면서 후속 타자들에게 심판의 성향이나 그날 투수의 컨디션 같은 걸 알려 줄 필요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 선수 올 시즌 평균적으로 지켜본 공 개수가 2.79개밖에 되지 않아요. 초구 아웃도 정말 많거든요. 너무 성급합니다.]
[그도 그렇지만 조시 베켓 선수의 공도 정말 좋았어요. 저 선수의 경우 박찬화 선수와 정말 비슷한 타입의 선수거든요. 주력 구종이 포심,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이에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 그 자체입니다. 게다가 성격도 정말 올드스쿨 하거든요. 포심이 좀 잘 들어간다 하는 날에는 주야장천 포심 패스트볼만 던져요. 그런데 또 이게 기가 막힌 게 그게 먹힌다 이 말이죠. 방금도 몸쪽 포심이었거든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덕아웃에 돌아가는 레예스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섰다. 몸은 조금 뻐근했다. 하지만 상정 범위 이내다. 몇몇 팬들은 2달 동안 한 번도 쉬지 못하고 몇 번이나 사구를 허용한 나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빠진 컨디션 이상으로 나의 감각은 예리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시 베켓의 초구가 날아왔다.
‘빠졌어.’
뻐엉!!
바깥쪽 낮은 코스. 예리한 코스였지만 너무 깊었다. 심판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다시 배트를 치켜들고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아슬아슬한 공이었는데, 강진호 잘 골라냅니다.]
[조시 베켓 두 번째 와인드업.]
몸쪽 낮은 코스 95마일 포심 패스트볼.
따악!!
시원하게 돌아간 배트가 조시 베켓의 포심을 걷어냈다.
[아, 아쉽습니다. 파울라인 살짝 벗어나는 공!! 배트가 조금 밀렸네요.]
[그래도 강진호 선수 배트가 완벽하게 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저런 코스로 들어오는 속구는 정말 치기 힘들거든요. 시즌 막판인데도 타격감은 완벽하게 살아 있네요.]
[자, 볼카운트 1-1. 조시 베켓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볼카운트는 1-1. 2구 연속 포심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그럴 리가.’
1, 2년 멍청한 짓을 한다면 그것은 그냥 멍청이다. 하지만 그 멍청한 짓이 5년이나 계속된다면 그건 그냥 고집불통이라고 봐야 했다. 멍청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고집불통. 그리고 속구가 쭉쭉 뻗는 날의 조시 베켓은 바로 그 고집불통이었다. 절묘하게 제구되어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을 향해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따악!!
[쳤습니다!! 강진호!! 잘 맞은 타구!! 아!! 하지만 우익수 정면, 우익수 정면입니다.]
[후안 엔카나시온이 타구 잡아냅니다.]
[아쉽습니다. 완벽하게 잡아당긴 좋은 타구였는데 하필 이게 우익수 정면으로 향하네요.]
[하지만 오늘 강진호 선수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입니다. 지금 속구도 94마일이었는데 타이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거든요. 속구까지 이 정도로 때려내는 날의 강진호 선수라면 안타를 넘어 큰 것도 하나 기대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하긴 최근 홈런이 조금 잠잠하긴 했죠? 슬슬 하나 정도 터져 줄 때가 되긴 했습니다.]
약간의 아쉬움. 하지만 잘 맞은 타구가 외야수의 손에 잡히고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는 것이 야구다. 이런 것 하나하나를 머리에 새겨둘 필요는 없었다. 성준이의 호투 속에 경기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