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89화 (189/210)

# 189화.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5)

성준이 땀과 송진으로 끈적한 손끝으로 우둘우둘한 실밥을 낚아챘다.

‘망할!!’

마지막 순간의 뒤틀림. 손끝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볼카운트 2-2. 카를로스 델가도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던진 이 공은 밋밋할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스플리터란 배팅 볼에 불과했다. 찰나의 순간. 성준이 하늘의 도움을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타석에 선 타자는 킹 카를로스. 그는 93년 데뷔 이후 커리어 두 번의 올스타와 세 번의 실버슬러거. MVP 2위라는 수상실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시대 최강의 ‘청정’타자 중 하나였다. 그의 시선이 한가운데로 힘없이 들어오는 공을 포착했다.

따악!!

시원하게 돌아간 배트가 정확하게 공을 두들겼다. 적당한 각도, 적당한 세기로 날아가는 야구공. 잠시 자리에 서서 자신의 타구를 살핀 카를로스가 1루를 향해 달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성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점.’

2.2이닝 2실점. 괜찮다. 고작 2실점에 좌절하기에 그가 경험했던 6년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준이 어느 마이너 구장 샤워실 구석에 새겨진 문구를 떠올리며 다시 이를 악물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경기는 길었다. 메츠의 타자들은 강하고 2점의 실점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마치 비극적인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채찍질 하는 성준. 하지만 이 순간 그라운드의 주인공은 공을 던진 성준이 아니었다. 관중석을 반쯤 채운 팬들도, 공을 쳐낸 카를로스도 그리고 경기를 진행하는 메츠의 야수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진호!! 강진호!! 달립니다!!]

카를로스의 배트가 공을 쳐내는 그 순간 진호의 몸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이곳이 메츠의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이었다면 진호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돌핀스 스타디움. 본래 NFL팀인 마이애미 돌핀스가 사용하는 광활한 구장이었다.

‘충분해.’

진호가 자신의 삐걱거리는 몸에 한 번 더 박차를 가했다. 그가 예측하는 지점은 우중간 펜스 즈음. 펜스의 높이를 고려한다면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거나 펜스 상단을 맞추는 타구였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진호의 몸이 날아올랐다.

퍼억

푹신한 펜스가 진호의 몸을 받아냈다. 시속 30km/h를 상회하는 속도다. 아무리 푹신한 펜스라고 해도 충격이 적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에 들어온 충격보다 중요한 것은 글러브 안에 들어온 작은 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호가 글러브에서 뽑아든 공을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

[아웃!! 아웃입니다!! 멋진 점핑 캐치. 강진호 선수가 또다시 수비에서 클래스를 보여줍니다.]

[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말린스의 홈구장, 이곳 돌핀스 스타디움은 외야가 넓기로 유명한 곳이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원래 NFL구장으로 쓰는 곳을 좌측 펜스만 들어 올려서 야구장으로 쓰는 구장이예요. 우중간 외야가 정말 터무니없이 광활합니다. 그런데 정위치에 있던 중견수가 우중간 외야 깊숙한 곳의 펜스를 넘어갈 홈런을 훔쳐냈어요.]

[이건 뭐, 여덟 번째 골드글러브 얌전히 가지고 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수비네요.]

치켜들었던 공을 외야로 휙 던지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진호에게 성준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성준의 어깨를 툭 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진호. 그 뒤를 따라온 프레스톤도 성준의 엉덩이를 한번 두들겼다.

“믿고 맡겨 두라고. 좀 두들겨 맞아도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공이면 얼마든지 잡아줄 테니까 말이야.”

“분명 프레스톤씨 올해 에러만 여덟 개인가로······.”

“크흠, 그거야 그 워낙 레인지가 넓다 보니까 사람이 잡을 수 없는 공까지 아슬아슬하게 놓친 거고. 아!! 내 타석 돌아올 때가 다 됐네. 어서 준비해야겠다.”

***

따악!!

볼카운트 2-1. 나의 배트가 몸쪽 속구를 두들겼다. 빠른 타구. 하지만 이번에도 방향이 좋지 않았다. 우익수 정면. 팔을 높게 든 후안 엔카나시온이 나의 타구를 잡아냈다.

[아, 우익수 정면으로 흐르는 타구!! 강진호. 잘 맞은 타구였는데 첫 번째 타석에 이어 이번 타석도 운이 좋지 않네요.]

[힘이 충분히 실린 타구였는데 이게 계속 야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돌핀스 스타디움은 외야가 넓기로 유명한 구장이거든요. 보통 저정도 타구면 2루타는 예약 된 타구라고 봐도 무방한데 말이죠.]

[그래도 앞선 수비 이닝도 그렇고 오늘 강진호 선수의 컨디션이 정말 좋아 보이거든요. 그리고 이제 4회예요. 아직 비관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입니다.]

‘스윙은 괜찮았어.’

수비할 때 펜스에 부딪혔던 어깨가 조금 걱정됐지만 스윙하는 데 아무런 위화감은 없었다. 물론 좋은 타구가 두 번이나 연달아 잡혀버린 지금 상황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일은 노력을 해서라도 잊어야 한다. 살다 보면 주사위를 굴려 두 번 연속 1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경기가 이어졌다. 사력을 다해 던지는 성준이도, 말린스라는 약팀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낭비하고 있는 조시 베켓도 모두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회까지 이어진 팽팽한 투수전.

[강진호 선수 세 번째 타석입니다.]

[오늘 조시 베켓 선수의 볼이 상당히 좋거든요. 다섯 번째 타석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앞선 두 타석 모두 공을 상당히 잘 골랐고 타구 질도 좋았거든요. 그렇게만 두들기면 결국 안타는 나올 거라고 봅니다.]

두 번의 기회가 사라진 세 번째 타석. 나의 등 뒤로 사람들의 기대가 느껴졌다. 하지만 부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운드의 조시 베켓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세찬 몸짓의 끝에 날아드는 95마일 초구를 향해 나의 배트가 뛰쳐나갔다.

딱!!

밀어친 타구. 하지만 손끝이 가벼웠다.

‘넘어간다.’

치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나의 291번째 홈런이다. 배트를 내려놓고 높게 날아오른 타구를 잠시 관찰했다. 그때 나의 시야 구석 누군가가 질주하는 것이 들어왔다.

[미기!! 미기!! 미기!!!]

베네수엘라 출신의 근육 덩어리가 허공을 날았다.

“아웃!!”

[아!! 펜스 앞!! 잡혔습니다. 미겔 카브레라!! 터무니없는 호수비. 강진호의 장타를 잡아냈어요.]

[아, 이거 오늘 정말 갑갑합니다. 좋은 타구들이 번번이 야수 정면으로 간 거로 모자라서 미겔 카브레라가 자신의 인생 수비라고 할만한 수비를 보여줍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았어요. 게다가 중요한 점은 오늘 삼진이 하나도 없고 타구 역시 모두 외야로 날아가는 강한 타구였다는 점입니다. 충분히 기록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망할.’

우연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스윙에 수비 이닝에서 펜스에 부딪혔던 오른쪽 어깨가 욱씬했다. 좋은 스윙 좋은 타격이었지만 완벽하게 힘이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안타까웠다. 만약 여기가 돌핀스 스타디움이 아니었다면? 미겔 카브레라가 저런 터무니없는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더라면? 앞선 두 번의 안타가 야수 정면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신경을 낭비하지 말자.’

그리고 네 번째 타석. 어깨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강진호 연속 안타 행진이 끝나다.-

-4타수 1삼진. 65경기 연속 안타!! 안타까운 기록 종료.-

-조시 베켓 ‘운이 좋았다. 특히 6회 미겔 카브레라의 호수비가 컸다.’-

-강진호 어깨 부상? 시리즈 2, 3차전 결장!! 지정 병원에서 MRI 촬영. 시즌 아웃의 가능성도?-

-조 매든 ‘진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71경기를 쉬지 않은 선수이기에 정밀 진단을 들어간 것뿐.’-

-강진호가 세운 65경기 연속 안타의 위대함을 알아보자.-

-송성준 메이저 선발 데뷔전 7이닝 무실점 노디시전.-

기록이 깨진 바로 그 날. 조 매든 감독이 나에게 직접 찾아왔다.

“오늘 경기는 아쉽더군.”

“뭐, 운이 없던 건 어쩔 수 없죠.”

“내가 할 이야기를 대신 하는군. 그래,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그런 타구들이 죄다 잡히는 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의 위로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조 매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시리즈 남은 경기는 푹 쉬자. 병원 정밀검진도 좀 받아보고.”

“괜찮습니다. 몸도 나쁘지 않고요. 이 정도야 그냥 시즌 치르면 흔히 있는 타박상 수준이에요.”

“나도 그게 별것 아닌 것 정도는 잘 알아.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지. 기록이 진행 중일 때는 괜찮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팽팽하던 긴장이 끊기는 법이야. 그리고 그때야말로 정말 위험한 시기야. 사실 진작에 휴식을 줬어야 했는데 네가 타격감이 워낙 좋아서 쉽게 빼질 못했던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팀에 여유가 있을 때 완전히 회복해두자고.”

“후, 알겠습니다.”

***

진호의 예상대로 그의 몸에서 특별한 이상은 찾지 못했다. 그저 몸에 피로가 잔뜩 쌓여있으니 푹 쉬라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언론에서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을 떠들었다. 물론 진호는 자신과 이야기가 통하는 기자들을 통해 단순한 휴식임을 밝혔지만 극성맞은 뉴욕의 언론들은 그의 말보다 자신들의 추측을 더 많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들이 떠드는 것 따위 진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플로리다와의 시리즈 이후 이어진 내셔널스와의 시리즈.

[첫 번째 타석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던 강진호. 이 선수가 올 시즌 루킹 삼진은 열두 개밖에 되지 않거든요. 이게 시즌 하반기 팽팽하게 이어오던 기록이 깨진 만큼 그간 쌓인 마일리지가 한 번에 들어와서 밸런스가 좀 무너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글쎄요, 일단 정밀 진단 결과 부상이 없다고 하니 그런 걱정은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군요.]

마운드에 토니 아르메스가 던진 슬라이더가 진호의 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바짝 끌어당긴 오른팔. 그의 상체가 시원하게 돌아갔다.

딱!!

[쳤습니다!!! 강진호!! 쳤습니다!!]

[큽니다!! 큽니다!! 강진호의 잡아당긴 타구, 우측 담장을, 우측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시즌 43호 홈런. 강진호. 시즌 43호 홈런입니다.]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대단한 기록이었고 매우 큰 가치가 있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강진호라는 선수의 가치는 연속 안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연속 안타 기록은 2005년의 강진호가 그만큼 위대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방증에 불과했다.

2005년. 65경기 연속 안타 종료 이후 14경기. 시즌 최후의 경기까지 진호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616타수 224안타(2루타 35개 3루타 9개) 46홈런 139타점 158득점 110볼넷 39도루 9도루실패. 0.364/0.468/0.674

112승 50패. 뉴욕 메츠가 포스트시즌 모든 경기에 홈어드밴티지를 가진 채 시즌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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