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다섯 번째(2)
파드리스와의 디비전 시리즈가 3연승으로 끝난 덕분에 메츠의 선수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주어졌다. 이 뒤에 있을 카디널스 혹은 브레이브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를 생각한다면 이 휴식은 앞으로 일정을 매우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꿀 같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이 꿀 같은 휴식이 메츠의 모든 선수를 행복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3연전 동안 등판조차 하지 못했던 투수, 성준의 91마일 속구가 미트를 파고들었다.
뻐엉!!!
5경기 출전 2경기 선발 17.1이닝 평균자책점 4.68 승리 없이 1패 1홀드. 몇 가지 불운으로 메이저 데뷔가 늦춰졌던 하지만 자신의 실력만큼은 메이저급이라 확신했던 성준의 성적이었다.
‘젠장.’
덕아웃 저편 성준의 공을 받아 준 불펜 포수가 미트를 팡팡 두들기며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현실들로 머리가 복잡한 성준에게 그의 격려는 닿지 못했다.
성준의 시선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등판하지 못했던 종운에게 닿았다. 33경기 선발등판 194.1이닝 평균자책점 3.8. 시즌 막판 떨어진 체력으로 고전하긴 했지만, 성공적인 풀 타임 데뷔였다. 하지만 성준이 진정 부러운 것은 종운의 성적이 아니었다. 올 시즌 자신보다 조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시간만 있다면 성준 역시 저 정도는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말이지.’
종운과 자신 사이에는 결정적인 장벽이 존재했다.
병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27살. 이제 슬슬 병역을 연기하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올 시즌 성적을 생각한다면 내년 빅리그 풀 타임 데뷔도 확신하기 힘든 상황. 그 경우 성준
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갈까?’
만약 한국에 돌아가서 프로구단에 입단한다면 특별계약금은 물론이거니와 2006년 아시안게임의 참가 티켓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꿈인가, 현실인가. 성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SJ. 아직 연습 안 끝났는데 조심해야지.”
“아!! 라이터 씨.”
복잡한 표정으로 불펜 의자에 앉아 있던 성준의 어깨에 두꺼운 투수 점퍼가 올라왔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가 유력한 불펜의 리더 알 라이터였다.
“그냥 알이라고 부르라니까.”
알 라이터가 성준을 향해 이온 음료를 하나 건넸다.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아, 네. 뭐 조금.”
우물쭈물 하며 음료를 받아드는 성준에게 알 라이터가 말을 건넸다.
“디비전 시리즈에 공을 던지지 못했던 것 때문에 그런 거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조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 테니 말이야.”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기는. 얼굴에 딱 쓰여있는데. 이번 시리즈에 널 투입하지 않은 건 널 그냥 불펜으로 쓰기보다 선발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걸 거야.”
“네? 선발이요? 포스트시즌인데요?”
성준의 질문에 알 라이터가 웃었다. 이 어린 친구를 보고 있자면 알 라이터 자신의 과거가 생각났다. 너무 많은 부상과 어려움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했던 그 과거들. 확장 로스터를 통해 빅리그에 올라온 이 동양인 루키는 프리드먼이 생각하는 두 번째 메츠의 커다란 조각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능구렁이가 슈퍼 2를 이렇게 의식할 이유가 없었겠지.’
게다가 그가 판단하기에 올해 성준이 보여준 피칭은 단순히 기록으로 남은 것 이상이었다. 아마 겨울 시즌 떨어진 악력을 보강하고 서클 체인지업을 다시 가다듬는다면 96년의 자신이 보여줬던 것만큼 대단한 변신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어차피 올해를 끝으로 떠나갈 팀이었지만 98년 이후 무려 8년이나 함께했던 메츠였다. 누군가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정을 붙이고 산 곳이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알 라이터에게 고향 팀은 바로 이곳 메츠였고 그는 자신이 떠나간 이후에도 이곳 메츠가 꾸준히 좋은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봐, SJ. 내가 메이저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 뭔지 알아?”
“가장 중요한 사실이요?”
그렇기에 알 라이터는 자신이 건넬 수 있는 모든 것을 메츠의 어린 투수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지금은 이 어린 동양인 투수의 차례였다. 성준에게 알 라이터가 자신의 21년 프로 생활을 꾹 눌러 담아 말했다.
“야구 선수가 정답을 써볼 수 있는 시험장은 전 세계에 오직 30개밖에 없어.”
뜬구름 잡는 알 라이터의 이야기. 병역으로 고민하는 성준에게는 약간의 도움도 되지 않는 그 말을 끝으로 알 라이터가 멋지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알 라이터가 그 30개의 시험장 중 하나.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섰다. 올해를 끝으로 철거가 예정된 카디널스의 홈구장. 알 라이터 자신보다 1살 어린 그 낡아빠진 구장이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
‘네 녀석도 마지막 정도는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겠지.’
알 라이터가 야구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딱!!
켄 그리피 주니어라는 거인에 가려있던 비운의 거포. 짐 에드먼즈의 배트가 알 라이터의 초구를 받아쳤다. 높게 뜬 타구가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담장을 향해 뻗어갔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지켜본 광경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할 수 없는 광경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타구의 끝을 살폈다.
[Kang!!!]
그곳에는 캡틴이라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자리를 맡았음에도 올 시즌 자신의 커리어 하이, 아니 그것을 넘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즌을 작성한 현역 최고의 선수가 있었다. 이 정도 수비에는 몸을 날릴 필요도 없다는 듯, 가볍게 팔을 뻗어 타구를 처리한 진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시리즈 스코어 3:1. 뉴욕 메츠가 월드 시리즈 진출을 한걸음 남긴 상황에서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경기!!! 1회 말 두 번째 아웃 카운트를 Kang이 만들어냅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뭐,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됐건 루스의 23년에 필적하는 1년을 보낸 선수 아니겠습니까? 테드, 루 게릭,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 혼스비, 칼 립켄, 타이 콥. 최근에 배리 본즈까지.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누구도 루스의 23년은커녕 21년이나 27년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거든요. 그나마 야즈 정도만이 유일하게 단 한 번 27년의 루스에 필적해본 게 전부였습니다. 뭐가 됐건 루스의 23년을 언급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Kang을 저 위대한 전설들에 필적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이제 8년 차밖에 되지 않은 29살짜리 선수에게 조금 이른 평가가 아닌가 싶긴 합니다만 어쨌든 지금과 같은 모습을 앞으로 몇 년 정도 꾸준히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동의할만한 의견일 것 같군요.]
[자, 타석에 알버트 푸홀스. 알버트 푸홀스 선수가 들어옵니다.]
동료의 안타를 가볍게 잡아버리는 진호를 매섭게 노려본 푸홀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2001년 데뷔 이후 5년 만에 982개의 안타와 201개의 홈런. 커리어 통산 0.332/0.416/0.621의 성적을 기록 중인 괴물. 진호가 98년 데뷔 이후 꾸준하게 성적을 상승시켜왔다면 푸홀스는 데뷔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완성된 타자였다고 볼 수 있었다. 그의 불행은 진호가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기 시작한 2001년이 그의 데뷔년이었다는 점이었다.
[Kang의 압도적인 활약에 조금 가려진 감이 있긴 합니다만 푸홀스 선수도 결코 만만한 선수가 아닙니다. 타격 성적만 보더라도 Kang과 비교해 아주 근소하게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게다가 어제 경기 홈런을 생각해보면 시즌 막판부터 조금씩 떨어졌던 타격감이 슬슬 살아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번 타석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합니다.]
[사실 커리어 평균성적만 보면 여전히 Kang보다 타격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예요. 아무래도 Kang의 경우는 데뷔 해의 성적이 조금 많이 떨어지는 편이니까요. 물론 이것은 지금 괴물 같은 기록을 보여주는 Kang과 푸홀스 선수의 성적에 비교해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죠. 사실 데뷔 해부터 이렇게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푸홀스 선수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봐야 합니다. 덕분에 일각에서는 푸홀스 선수가 나이를 속인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니까요.]
[하하, 물론 남미 쪽 치안이 어지럽긴 합니다만 푸홀스 선수의 경우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건너와서 하이스쿨을 미국에서 졸업하고 정상적인 드래프트 과정을 거친 선수예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자신이 아닌 진호를 쫓는 푸홀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알 라이터는 흥분하지 않았다. 타석만으로 한정 지었을 경우 푸홀스는 강진호만큼, 아니 강진호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25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역대 최강의 우타자.’ 그를 상대로 알 라이터의 투심이 존의 한구석을 찔렀다.
‘좋았어!!’
노린 곳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89마일의 빠른 공. 제아무리 좋은 타자라 해도 이런 공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다. 쳐낸다고 해도 기껏해야 내야 땅볼. 푸홀스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그리고 알 라이터가 다시금 깨달았다. 현역 최강, 아니 역대 최고를 논하는 우타자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를 말이다. 타석에서만큼은 강진호급. 알버트 푸홀스가 쳐낸 타구가 부시 메모리얼의 낡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푸홀스!! 홈런!! 홈런입니다. 지난 경기 1호 홈런에 이은 시리즈 두 번째 홈런!! 1회 말, 카디널스가 1:0으로 경기를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방금은 나무랄 곳 없이 좋은 공이었거든요. 디비전 시리즈부터 조금 부진했던 푸홀스 선수의 타격감이 이제는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라운드를 여유롭게 돌아 들어가는 알버트 푸홀스. 그럭저럭 잘 풀려가던 중요한 경기 선제 홈런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늙은 투수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한다.
뻐엉!!
“스트라잌!!”
[아, 알 라이터!!! 여기서 구속이 올라갑니다. 91마일! 91마일입니다.]
[와우, 91마일이면 알 라이터 선수, 올 시즌 최고 구속 아닌가요?]
[맞습니다. 올 시즌에는 지난 7월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보여줬던 90마일이 최고구속이었어요.]
[알 라이터하면 빅 게임 피쳐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지금 순간이 얼마나 힘을 쥐어짜야 하는 순간인지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거죠. 참고로 알 라이터가 가지고 있는 커리어 7개의 반지는 역대 공동 6위에 해당하는 반지 숫자입니다. 양키스의 선수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우승 커리어, 게다가 투수로서도 가장 많은 우승 반지를 낀 선수입니다.]
알 라이터가 던진 71마일 체인지업에 레지 샌더스의 배트가 흘러나왔다. 삼루수 정면으로 흐르는 땅볼 타구. 데이비드 라이트가 가볍게 공을 잡아 1루로 뿌렸다.
뻐엉!!
“아웃!!”
10월. 이제는 쌀쌀한 계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알 라이터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알 라이터가 조 매든에게 말을 건넸다.
“조, 그 때 이야기했던 대로 해야 할 것 같군요.”
“알겠어. 준비하도록 하지.”
조 매든의 눈짓에 벤치 코치인 샌디 아로마가 불펜으로 연결된 낡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 라이터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 답안을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내밀었다. 그가 내민 답안이 정답일지, 아니면 오답일지 이제 남은 이닝은 여덟 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