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다섯 번째(3)
5회 말 원아웃 주자 없음. 점수는 3:2. 카디널스가 1점 뒤지는 상황에서 짐 에드몬즈의 안타가 우측 담장을 직격했다.
[짐 에드몬즈!! 1루 지나 2루까지!!]
[프레스톤 윌슨이 침착하게 타구를 처리합니다만 타구가 너무 좋았습니다.]
[원아웃 주자 2루 상황. 알버트 푸홀스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푸홀스 선수 오늘 타격감이 정말 좋거든요. 첫 번째 타석에서 솔로 홈런, 두 번째 타석 외야 희생 플라이였는데 그 공도 외야수가 강진호만 아니었다면 무조건 안타가 됐을 그런 공이였습니다.]
[자 1점 차. 원아웃 주자 2루에서 타석에는 알버트 푸홀스. 음, 이건 고의 사구가 나올 법도 한 상황 같은데요?]
[그렇죠, 레지 샌더스 선수도 물론 좋은 선수입니다만 알 라이터 선수와의 상대전적을 보면 2할 1푼밖에 되지 않거든요. 여기선 푸홀스를 1루에 내보내고 병살을 유도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싶군요.]
해설자의 이야기처럼 지금 가장 현명한 선택은 고의 사구라는 것을 마운드의 알 라이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마운드에서 잠시 내려와 로진백을 매만진 그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거칠어진 손가락 끝으로 잘 관리된 가지런한 손톱이 보였다. 잠깐의 망설임. 알 라이터가 힘차게 주먹을 쥐었다.
꾸욱
4.1이닝 69개. 오늘 경기 마치 불펜 투수처럼 매 이닝 최선을 다해 던졌다. 슬슬 한계에 다가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악력이 멀쩡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마운드에 올라선 알 라이터의 얼굴이 딱딱했다. 어지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그의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 순간 피아자가 직감했다. 이것은 그들의 에이스가 보이는 흔치 않은 욕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이크 피아자가 미트를 들었다.
‘몸쪽 깊숙하게.’
표정만으로 자신의 의지를 읽어주는 파트너의 미트를 향해 알 라이터가 지금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초구 헛스윙.
알 라이터의 공이 통했다.
두 번째, 바깥쪽 빠지는 유인구. 푸홀스가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파울 라인을 크게 벗어난 타구가 내야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아, 푸홀스!! 완전히 빠지는 공에 배트가 나갔어요.]
[알 라이터 선수. 체인지업이 아주 제대로 먹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바깥으로 완전하게 하나 빼보자고.’
유리한 볼카운트. 굳이 좋은 공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다. 알 라이터가 세 번째 공을 던졌다. 노리는 것은 존에서 공 하나 반 빠져나간 코스 체인지업.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야구공의 실밥을 강하게 낚아챘다.
따악!!
높게 떠오른 타구. 알 라이터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결정적인 순간에 실투가 나왔습니다. 몰려나온 밋밋한 공을 푸홀스가 정확하게 두들깁니다!!]
[좌중간 깊숙한 코스!! 리키 헨더슨!! 위치가 좋지 못합니다!!]
[어? 강진호? 강진호!! 빠릅니다!!]
현재 수비 범위에 관련된 가장 대중화된 수비스탯인 레인지팩터의 경우 리그의 평균적인 중견수가 기록하는 수치는 2.5 정도, 2.7만 넘기더라도 골드글러브 급 중견수라고 볼 만했다. 그리고 2002년 BIS가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한 이래 측정된 진호의 평균 수치는 3.14.
이는 그가 리그의 평균적인 중견수보다 25% 가깝게 넓은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진호가 자신의 역량을 증명했다. 물론 정상적인 중견수의 커버범위를 벗어난 타구를 완벽하게 잡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더 멀리 3루타가 될 만큼 빠질 수 있던 공을 진호가 낚아 챘다. 그렇게 원바운드된 야구공을 달리던 자세 그대로 낚아챈 진호가 반 바퀴 몸을 돌렸다.
[강진호!! 또다시 강진호입니다.]
[정말 완벽한 수비. 단순히 발만 빠른 것도, 어깨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 보시면 공을 잡을 때 굳이 오른발을 한 걸음 더 떼고 공을 잡습니다. 저렇게 잡아줘야 다음 동작으로 바로 연결이 되거든요.]
도움닫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진호가 던진 공이 바닥을 한번 찍고 그대로 피아자의 미트에 꽂혀 들어갔다. 자리에서 발을 뗄 필요도 없는 완벽한 송구, 공을 받아낸 피아자가 달려오는 2루 주자 짐 에드몬즈를 막아섰다.
퍼억!!
“아웃!!”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아웃이 될 수 없는 타구였다. 하지만 주자와 주루코치의 마음속 망설임이 승부를 갈랐다. 진호의 사기적인 수비는 이미 상수였다. 절대 잡을 수 없는 타구임에도 그래도 혹시 강진호 라면이라는 생각이 2루 주자의 출발을 늦췄다. 거기에 2루 주자였던 짐 에드몬즈가 그리 좋은 주자가 아니었다는 점 역시 알 라이터를 도왔다.
“젠장!!”
피아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드몬즈의 욕지거리 때문은 아니었다.
‘슬슬 한계인 것 같은데.’
원아웃 주자 2루에 장타를 허용했지만, 결과는 실점 없이 투아웃 주자 2루. 마운드의 알 라이터가 소매를 들어 얼굴의 땀을 훔쳤다. 각오를 다지고 올라온 마운드였다. 본래라면 더 힘들 상황에서 진호의 고군분투가 그의 수명을 조금 늘려주었다.
[알 라이터 선수. 오늘 경기 현재까지 4.2이닝 2실점. 여러모로 운이 따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평소보다 공 자체가 매우 좋아요.]
[지금까지 구속을 보면 시즌 평균보다 1에서 2마일가량 잘 나오고 있습니다.]
피아자가 직전 장타를 허용했던 공을 떠올렸다. 단순히 손에서 빠진 공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이닝 앞서 안타를 허용했던 공 역시 그의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이제 타자 하나 남았는데.’
하지만 승리투수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5이닝 종료까지 이제 한 명의 타자만이 남은 상황. 게다가 앞서 내야 땅볼과 삼진으로 처리했던 레지 샌더스가 그 상대였다. 상대전적 역시 알 라이터 쪽에 매우 유리했다. 이번 이닝은 버텨보자는 생각이 피아자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때, 마운드의 알 라이터가 피아자를 향해 손짓했다.
“무슨 일이야.”
“손 한번 내밀어 봐.”
알 라이터의 뜬금없는 요청에 피아자가 미트를 끼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꾸욱
그리고 그 오른손을 알 라이터가 움켜쥐었다. 하지만 약했다. 이런 악력으로는 결코 공을 제대로 낚아챌 수 없었다.
“어때?”
“······.”
함께 공을 주고받은 지 8년. 대답은 필요 없었다. 알 라이터가 희미하게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갑자기 이러네. 투수 교체 요청해줘.”
“하지만!!”
“포스트 시즌이잖아. 게다가 욕심은 이미 충분히 부렸으니까.”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5회 말 3:2. 2아웃 주자 2루. 1998년 이후 8년. 메츠의 마운드를 지켜왔던 에이스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그 마운드를 향해 25살의 투수. 성준이 뛰어왔다.
[알 라이터가 교체됩니다. 아, 몸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글쎄요, 단순히 지친 게 아닐까요? 오늘 1회부터 조금 무리해서 던지는 느낌이었거든요.] [단순히 지친 거라고 하기에도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레지 샌더스와의 상대전적을 생각하면 이번 타자까지는 상대하는 편이 나아 보이거든요.]
[알 라이터를 대신해서 SJ. SJ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난 보스턴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메츠에 입단했던 SJ. 이 선수가 프리드먼 단장이 주도했던 첫 트레이드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선수 올 시즌 성적이 5경기 출전 2경기 선발 17.1이닝 평균자책점 4.68 승리 없이 1패 1홀드였던가요?]
[네, 당시에는 굉장히 큰 기대를 받던 유망주였는데 두 번의 부상으로 현재는 평가가 많이 내려온 상황입니다. 특히 부상 전 마이너에서 결정구로 사용했던 서클 체인지업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게 된 것이 결정적입니다.]
“SJ. 오늘은 내 답안지를 빌려줄 테니까 어디 멋지게 한번 해보라고.”
“네?”
알 라이터가 성준에게 야구공을 건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만 40세. 한국 나이 41세 아저씨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성준이 마운드 위에 섰다. 부시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가득한 카디널스 팬들의 적의가 성준에게 오롯하게 꽂혀왔다. 찌릿한 긴장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올 시즌 다섯 차례나 메이저 무대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시즌 무대가 주는 긴장감은 특별했다. 알 라이터가 건네준 야구공을 꾹 쥐었다.
‘답안지.’
몇 년간의 미국 생활로 영어는 제법 자신이 있었음에도 알 라이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맡긴 야구공은 단순한 야구공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운드 위, 늙은 에이스가 물러나고 젊은 유망주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아래 그라운드에는 그것을 지켜보는 여덟 명의 야수가 있었다.
***
투수 교체의 짧은 시간. 저 멀리 서 있던 프레스톤이 나에게 다가왔다.
“진호.”
“왜?”
“우리 올해에 똥폼 잡으면서 저 아저씨한테 승리 챙겨주자고 했던 경기들 죄다 실패하지 않았냐?”
“망할, 생각해보니 그렇네.”
타선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 올 시즌 알 라이터의 피칭은 너무 형편없었다. 타선이 5점을 내면 6점을 주는 피칭. 게다가 운도 없는 것이 간신히 승리투수 요건을 채우고 내려갔을 때는 불펜이 크게 방화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저 아저씨, 아무래도 승리 챙겨가기 엄청 싫은가 봐.”
“그러게 말이다.”
“방금 네 수비 진짜 죽였잖아. 이쯤 되면 승리 하나 챙겨 갈 법도 한데, 이번엔 대체 왜 자진해서 교체를 요청하는 거야.”
“사람이 좋아서 그렇지 뭐. 자기 승리 챙기려다가 팀이 패배하는 것보다 팀에 확실하게 승리했으면 해서 그런 거겠지.”
“젠장, 그거 타자 하나 더 상대한다고 이길 경기 패배한 데? 게다가 저 애송이가 아저씨보다 잘 던진다는 보장도 없잖아.”
알 라이터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성준이 마운드에 올라오는 시간 동안 굳이 나에게 다가와 투덜거리던 프레스톤이 자기 자리로 부리나케 돌아갔다. 나의 시야에 알 라이터에게 건네받은 공을 움켜쥐는 성준이 들어왔다. 다른 형태이긴 했지만, 나 역시 떠나고 싶지 않던 그라운드를 억지로 떠나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알 라이터가 성준에게 공을 건넬 때의 심정이 짐작됐다.
오기, 분함, 욕심, 슬픔. 그리고 승리에 대한 갈망.
‘성준아 잘 하자.’
부디 알 라이터가 건넨 그 갈망이 성준에게 전달됐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기록으로 남지 못할 알 라이터의 승리가 이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새겨지기를 바란다.
마운드의 성준이 레지 샌더스를 향해 공을 뿌렸다.
딱!!
5회 말. 하늘을 가르는 공을 향해 내가 전력을 다해 달렸다.
***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는 저기 뛰고 있는 녀석들한테 하고.”
조 매든 감독의 무뚝뚝한 이야기에 알 라이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멀뚱히 서있지 말고 빨리 가서 어깨에 얼음이나 둘러. 아직 남았어.”
“네?”
“이왕이면 양키 쪽이면 더 좋겠군.”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뉴욕 메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시리즈 스코어 4:1로 격파!! 2년 만의 우승 도전!!-
-송성준 4.1이닝 6피안타 1실점 호투!!-
-강진호 커리어 두 번째 챔피언십 시리즈 MV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