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다섯 번째(5)
월드 시리즈 내내 진호는 흡사 맞설 수 없는 재앙과도 같았다. 시리즈 내내 진호가 보여준 모습에 비하자면 01~03시즌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는 차라리 쉬웠다. 그는 그저 타석에서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메츠의 타선을 생각한다면 본즈를 거르던 것처럼 진호를 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이크 피아자는 노쇠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명예의 전당급 타자였고, 프레스톤 윌슨은 남은 커리어에 따라 충분히 명예의 전당을 노려볼만한 전성기의 타자였다.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이름값만큼은 아니었지만 제 몫 정도는 충분히 해주는 타자였으며 호세 레예스, 데이비드 라이트, 제이슨 바틀렛으로 이어지는 유망주들 역시 2할 후반대의 타율에 4할 중후반의 장타율을 기대할 수 있는 평균 이상의 타자였다.
게다가 발이라도 리그 평균이었던 01~03시즌의 배리 본즈와 달리 진호는 주루마저도 리그 최정상급이었다. 볼넷으로 나가면 2루까지 달렸고, 안타 하나면 가볍게 홈을 밟았다. 더욱이 진호의 가치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가끔 나오는 터무니없는 그의 호수비에 열광했지만, 매리너스를 진짜 괴롭힌 것은 그런 터무니없는 호수비가 아니었다.
[높게 뜬 타구!! 강진호가 잡아냅니다.]
[타구 속도는 괜찮았는데 방향이 조금 좋지 못했습니다.]
별다른 환호도 나오지 않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수비들. 공을 잡아낸 진호 자신 마저도 시크하게 툭 송구하는 그 수비들이 문제였다. 마이크 하그로브가 보기에 자신의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은 거의 놓치지 않는 그 완벽한 수비 능력에 비한다면 차라리 우익수와 좌익수의 수비 범위를 커버하는 그 터무니없는 범위 쪽이 더 인간적이었다.
“올해도 텄군 텄어.”
91년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세 번의 월드 시리즈 진출. 마이크 하그로브가 커리어 세 번째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4타수 3안타 2홈런 1볼넷. 킹 펠릭스도 막을 수 없었던 강진호의 질주-
-차세대 최강의 투수, 현역 최고의 타자에게 무릎 꿇다.-
-지금 우리는 Kang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즈키 이치로 ‘같은 동양인이라 믿기 힘든 피지컬. 아니 같은 인간이라고도 믿기 힘든 피지컬이었다. Kang은 천년에 한 번 나올 재능이 틀림없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감독 마이크 하그로브의 탄식 ‘타석에서는 배리 본즈. 베이스를 밟으면 리키 헨더슨. 글러브를 끼면 윌리 메이스. 감독으로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매 경기 4점을 가지고 오고 2점을 덜 내주는 선수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강진호로 시작해 강진호로 끝난 2005년. 강진호 챔피언십 시리즈 MVP에 이어 월드 시리즈 MVP!!-
-끝나버린 마이크 하그로브의 마법. 시리즈 스코어 4:0. 일방적으로 끝난 2005년의 월드 시리즈.-
-내년 시즌을 끝으로 FA를 맞이하는 강진호. 최소 시작 금액은 3억?-
-강진호 8년 연속 골드 글러브!! 그리고 커리어 세 번째 실버 슬러거. 메이저리그 최고의 중견수임을 증명하다.-
-야구 전문가들이 만든 필딩 바이블 어워드, 강진호 최고의 점수로 수상!!-
-강진호 커리어 네 번째 정규 시즌 MVP. 2005년이 자신의 해였음을 증명하다.-
***
“여어, 요즘 너무 잘나가는 거 아니야? 신수가 너무 훤한데?”
“하하, 고맙습니다. 단장님도 이번에 빅똥 하나 치우셨던데 내년에는 좀 달리셔야죠.”
“글세, 쓸만한 매물이 좀 있어야지. 그보다 후년이나 노려볼까 생각중이야. 이왕 달릴거면 제일 좋은 걸 노려봐야지.”
“어허, Kang은 곤란합니다.”
월드 시리즈가 끝나고 이뤄지는 윈터 미팅. 프리드먼이 제법 노련하게 단장들을 상대했다.
“이번에 새로 취임한 구단주는 좀 어떤가? 연예인 구단주라니.”
“글쎄요, 생각보다 합리적입니다. 사업 감각도 괜찮고요. 무엇보다 우리에겐 돈 조금 뜯어가고 자기 돈 팍팍 집어 넣어주는 구단주가 최고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주 괜찮은 구단주죠.”
“하긴 그건 그렇지. 사실 윌폰 그 애송이는 좀 문제가 많았어. 뉴욕이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는 구단이 성적이 그렇게 나오는데 고작 신구장 문제 정도 가지고 그렇게 쩔쩔매서야 쯧쯧. 그보다 이번에 양키스는 좀 어떻다던가? 거기 아주 난리 난 것 같던데.”
“글쎄요, 사실 같은 뉴욕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뭘 알아야죠.”
3억 달러에 육박하는 페이롤. 그리고 든든한 후원자의 병원행. 뉴욕이라는 마켓을 공유하는 라이벌의 몰락에 프리드먼의 입가가 씰룩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프리드먼의 그 즐거움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커미셔너가 입장하고 시작된 윈터 미팅. 몇 가지 가벼운 주제가 오가던 회의장 위에 커미셔너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약물 의심 선수들의 선수자격을 정지시키다뇨. 선수노조에서 그런 걸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이미 협의를 끝냈습니다. 사실 약물을 복용한 부도덕한 선수들이 리그의 페이롤 대부분을 차지하고 25인 로스터에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선수들에 대한 피해니까요.”
“협의를 끝내요?”
커미셔너의 폭탄 발언에 프리드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터무니없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의 소요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프리드먼의 시선이 단장들의 얼굴을 훑었다. 흥분, 당황, 침착함, 담담함, 즐거움, 난감함. 그리고 꾸며낸 무표정 속의 의기양양함까지.
‘이런 개자식들이?’
그 순간 프리드먼의 머릿속에 수 많은 숫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군가는 1700만, 누군가는 2300만, 누군가는 800만. 그리고 누군가는
‘1억 2천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아득한 숫자였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사전에 미리 정보를 알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를 악문 프리드먼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건 안 된다. BA기준 10위권 유망주 중에 넷이나 되는 유망주를 긁어모은 양키스다. 게다가 100위권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양키스에게 눈탱이를 맞았던 팀의 단장들을 살폈다.
‘망할.’
이미 경질당해 자리에 없는 단장이 둘.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단장이 셋. 문제는 그들 모두 중소형마켓의 단장들로 별 영향력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양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번 제안이 통과될 경우 팀에 제법 도움이 될 빅마켓 구단 단장들 다수의 표정이 밝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들 대부분이 올 시즌 고액의 연봉을 받는 똥들 덕분에 아주 제대로 죽을 쒀버린 인간들이었다. 1억 달러가 넘는 연봉으로 5천만 달러짜리 팀들에게 연패했던 팀의 단장들. 그들에게 이번 조치는 환영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아니야, 스몰마켓 쪽 사람들 포섭하고, 중심이 되는 빅마켓 하나 정도만 더 설득하면 충분히 무산시킬 수 있어.’
물론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여전히 약물을 복용한 선수들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은 여론, 성적은 성적이다. 프리드먼의 손가락이 재빠르게 휴대전화를 두들겼다. 빅마켓 구단 중에서 그나마 그와 친분을 유지 중인 컵스의 단장 더스티 베이커를 향한 문자 메시지. 건너편에 앉은 더스티 베이커가 힐끔 휴대전화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답장은 없었다.
22:7 그리고 기권하나.
윈터 미팅. 거대한 폭탄이 메이저리그를 강타했다.
***
개인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바빴던 윈터 시즌이 지나갔다. 미국과 한국에서의 결혼식만 두 번을 치렀고 한 달짜리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그리고 06년 1월. 파란 모자를 쓴 50대 후반의 잘생긴 남자가 나의 곁으로 은근히 다가왔다.
“Jin-ho. 오래간만이군. 올해 아주 인상적이었어.”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이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 또 이러는 군. 그냥 조지라고 부르라고.”
메츠의 선수단을 초대해놓고도 머리에는 텍사스의 모자를 쓴 뻔뻔한 이 남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조지 W 부시. 무능한 대통령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재선에 성공한 세계 제1의 권력자였다.
“4년 뒤에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런, 그 대답은 4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땐 올해도 백악관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으니까요.”
“하하, 하긴, 그때는 나도 4년 더 여기 머무르게 될 줄은 몰랐지.”
공적인 무능함과는 별개로 대통령은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긴, 이런 인간적인 매력이라도 있었으니 그 수많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제안은 어떻게 생각 좀 해봤나?”
“제안이요?”
나의 반문에 부시가 자신의 모자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
“우리 팀에 그 자네 고향 친구도 있고, 텍사스가 생각보다 살기도 좋아. 게다가 그 윌슨 주니어, 그 친구도 텍사스가 고향이라며. 그 친구도 같이 가면 딱이겠더구만.”
대통령의 권위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야구장 놀러나온 동네 아저씨 같은 막무가내의 제안에 내가 웃었다.
“텍사스로 오면 내가 집도 좋은 곳 알아봐주지. 아 물론 대통령 권한 같은건 아니야. 내가 이래봬도 텍사스에서는 제법 인기인이라네.”
“제안은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만 하지 말고. 이번에 빌어먹을 자식들 싹 쓸려 나간 덕분에 우리 텍사스도 제법 페이롤에 여유가 생겼어. A로드 그 개자식은 아주 꼴 좋아졌지. 내가 CIA한테 그 자식 뒷조사 시키려는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어휴. 어쨌거나 우리 텍사스로 꼭 오라고. 내가 제일 앞좌석에서 매년 응원을 해주지.”
한참동안 텍사스의 장점을 떠들던 대통령은 식사시간이 돼서야 간신히 떨어졌다. 학창시절 야구를 했고,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에는 텍사스의 구단주까지 했던 양반답게 텍사스 레인저스에 대한 애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진호, 저 텍사스로 가면 저 양반이 너희 나라 통일도 시켜줄 기세던데? 이번 기회에 노벨 평화상이나 한 번 진지하게 노려 보는 게 어때?”
“노벨 평화상 같은 소리 한다.”
“노벨 평화상까진 아니더라도 이거 해내면 너 한국 대통령 정도는 하는 거 아니냐?”
“우리 나라가 그렇게 만만한 나라 아니거든? 미국처럼 영화배우가 대통령하고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아직.”
“에이, 나중에 스포츠 장관이나 좀 해보나 했더니. 아쉽네.”
“헛소리 그만하고. 단체사진이나 찍고 가자.”
***
-알렉스 로드리게스, 새미 소사, 로저 클레멘스 등 37인 선수 자격 정지!!-
-스캇 보라스 ‘이것은 FA에서 리스크는 지지 않고 과실만을 취하려는 구단들의 교묘한 술책이다.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선수 자격 정지의 기준은 약물인가 성적인가. 약물 복용 의혹 선수임에도 자격 정지를 피한 선수들!!-
-로저 클레멘스 ‘이것은 선수 노조의 직무유기다. 구단들은 1994년 그 최악의 사건을 기억해야 될 것.’-
-커트 실링 ‘선수노조의 결정을 매우 지지하며 빌어먹을 약쟁이 자식들 혓바닥을 죄다 잘라버리고 싶다.’-
-페이롤에 여유가 생긴 구단들. 달아오르는 FA시장!!-
-라파엘 퍼칼 ‘최소 5년 1억 달러에서 시작하겠다.’-
-메이저 익명의 관계자 ‘라파엘 퍼칼이 1억 달러? 윈나우가 아닌 이상에서야 차라리 내년 시장에 나올 Kang을 위해 허리띠를 조여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