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96화 (196/210)

# 196화.

FA 로이드(2)

제1회 WBC를 바라보는 대한민국 팬들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느냐. 혹은 이길 수 없느냐.

물론 두 부류 모두 KBO와 NPB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단순히 KBO의 최상급 선수들이 NPB에 진출에 줄줄이 실패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2003년에 있었던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아테네 올림픽 예선)에서의 참사의 영향이 더 컸다. 당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올림픽 야구에 리그의 선수들이 차출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결국 국제야구연맹(IBAF)와 올림픽위원회(IOC), 그리고 MLB 사무국의 협의하에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 이내의 선수들의 참가가 원천봉쇄됐다. 물론 메이저 선수들의 출전에 제한됐다고 해도 한국의 전력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문제는 일본이 국제대회에 최초로 프로선수들을 동원했다는 점, 그리고 대만이 NPB와 마이너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까지 긁어모은 드림팀을 동원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KBO는 AA나 AAA레벨의 마이너리거들은 검증되지 않은 선수들이라는 명목으로 차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과는 대만을 상대로 5:4 패배. 일본에게 2:0 완패로 돌아왔다. 2004 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는 덤이었다.

그것은 98년과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의 압도적인 활약에 힘입어 KBO의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고 믿고 있던 팬들을 완벽하게 좌절시켰다. 그 처참했던 패배와 KBO를 폭격한 선수들이 NPB에서 실패하는 것을 목격한 팬들에게 일본은 아직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몇몇 팬들의 생각은 달랐다.

“MLB랑 NPB의 격차는 KBO랑 NPB보다 훨씬 크다고. 뭐 이치로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괜찮게 활약하는 건 인정해. 하지만 걔들은 NPB에서도 역사에 기록될만한 이레귤러들인거고. 이번 한국 대표팀을 보면 MLB 멤버들이 일본보다 훨씬 화려하지. 당장 메이저 올스타급 멤버만 세명에 25인급 멤버도 다섯이야. 무엇보다 강진호가 05시즌 만큼 하면 그냥 혼자서 다 때려부술 걸?”

“근데 야구는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잖아.”

“그렇지. 근데 강진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혼자 야구하잖아.”

***

따악!!

높게 떠오른 공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쭉쭉 뻗어 나갔다. 외야 최상단 관중석 뒤편의 광고판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 잠시 타구를 감상한 뒤 배트를 내려놓고 내야를 돌기 시작했다.

[강진호!!! 대한민국의 강진호 선수!! 한 시즌 무려 4개의 MVP를 쓸어담았던 강진호 선수!! 어째서 자신이 최고의 선수인지를 오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와, 정말 수준차가 날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3타수 3안타. 그것도 전부 다 홈런이라니 이건 너무한데요? 98년 아시안 게임이야 알루미늄배트를 썼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은 그것도 아니거든요.]

[오늘 선발로 나온 대만의 선발 청타이 코브라스의 린인위 선수나 수웬시엉 선수도 절대 나쁜 선수가 아니예요. 대만도 조별리그를 통과하기 위해 우리 대한민국을 꼭 꺾어야 하는 상황이라 최고의 투수들을 내세웠거든요. 작년 대만리그 12승 8패 방어율 1.72를 기록한 특급의 선발, 그리고 2.13을 기록한 투수들입니다. 양키스의 왕첸밍이 부상으로 결장한 상황에서 대만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들이였어요.]

[이건 흡사 프로 최정상의 선수가 중고교 선수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강진호 선수와 대만 투수들 사이에는 그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예요.]

4회 초, 9:0의 압도적인 점수차이 속에 또 한번 대만의 투수가 교체됐다.

“수고하셨습니다.”

홈런을 치면 달려나와 나의 머리를 두들기던 악동 놈들만 보다 이렇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느낌이 이상했다. 이번 대표 팀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투타를 통틀어 고작 여섯명. 게다가 나의 커리어 때문인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조차 나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녀석들과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6점 남았네.”

“네?”

나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녀석들. 내가 힐끔 시선을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아!! 설마?”

“설마는 무슨. 고작 대만이랑 하는데 설마 9이닝을 다 뛸 생각이었어? 얼른 끝내고 가서 좀 쉬어야지. 우리 찬화 선배도 늙어서 슬슬 힘들다고.”

“뭐 인마?”

덕아웃 구석에 앉아있던 오늘의 선발 찬화 선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올해 텍사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찬화선배의 알밤이 나의 머릿통에 명중했다. 우습게도 홈런을 치고 헬멧을 두들겨 맞는 것이 습관이라도 된 것인지 이제야 홈런을 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1회 WBC 개막전. 대한민국 난적 대만을 6회 콜드게임 15:0으로 대파.-

-강진호 이것이 세계 최고 선수의 실력이다!! 대만전 4타수 4안타 3홈런.-

-박찬화 5이닝 1피안타 0사사구 11탈삼진 무실점 완벽투!!-

자국에 프로리그가 있는 대만이 5회 15:0으로 패배한 마당에 A조 최약체 중국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박찬화가 선발로 등판했던 1차전과 달리 KBO의 투수를 선발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5회 19대 0 콜드 게임. 그야말로 프로 최정상 팀이 고등학생 팀을 상대하는 것 같은 압도적인 경기력 차이를 보여주며 한국이 본선 진출을 결정지었다.

“야, 이 정도면 일본도 이길 수 있지 않냐?”

“에이. 그래도 일본인데. NPB면 AAA급 이상의 리그잖아. 게다가 걔들도 빅리거 제법 데리고 왔고. 솔직히 일본 투수 공략할만한 타자 강진호랑 최현성정도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야, 아무리 그래도 이상엽도 아시아의 홈런왕인데.”

“걔 지금 치바 롯데에서 2할 6푼 치고 있잖아. 중국이나 대만 상대로야 잘 했지만 양민학살용이지 NPB의 수준급 투수들 상대로는 글쎄다.”

-일본 대표팀 감독 오 사다하루 ‘강진호와 최현성은 위협적인 타자다. 하지만 우리가 이기지 못할 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야구는 결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도쿄돔 일본팀의 덕아웃.

“허······.”

행크 아론의 755홈런을 아득하게 뛰어넘어 커리어통산 868개의 홈런을 쳐낸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MLB와 NPB의 기량 차이에 대해서는 과거 34살 전성기의 자신이 40살의 행크아론과 벌였던 홈런더비를 통해 이미 뼈에 사무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가 벌써 30년 전이다. 30년이라는 세월동안 NPB와 MLB의 차이는 아주 많이 좁혀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강진호!! 홈런!!! 와타나베 슌스케의 몸쪽 공을 정확하게 잡아당깁니다.]

[와. 어떻게 저런 공을 쳐서 홈런을 만들죠? 아. 물론 도쿄 돔이 홈런 생산에 유리한 구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파워 자체가 다르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물론 구속이 조금 낮긴 합니다만 와타나베 슌스케 선수의 공은 메이저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낮은 코스에서 날아드는 공이거든요. 저런 릴리스 포인트를 가진 선수는 아무리 강진호 선수라도 생소할 수밖에 없을거란 말이죠.]

[아마 그 생소함이 오 사다하루 감독이 생각한 비장의 대책이었을 것 같은데, 우리 강진호 선수. 생소함이라는게 뭐냐는 듯 아주 철저하게 와타나베 선수를 두들깁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공을 뿌리는 잠수함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가 3이닝 만에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이와세를 준비시켜.”

“네? 이제 고작 3회인데요?”

주니치 드래건스의 수호신이자 작년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를 준비시키라는 오 사다하루의 이야기에 불펜 코치가 반문했다. 그런 코치의 반문에 오 사다하루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설마 내가 노망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3회 끝난 건 나도 잘 알고있어.”

3회가 끝난 상황에서 5:0. 상대 팀의 선발투수인 신종운은 월드 시리즈 우승팀 뉴욕 메츠의 선발다운 피칭으로 일본 대표팀의 타선을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NPB 최고의 감독인 오 사다하루의 눈으로 보기에 오늘 신종운이 보여주는 피칭은 NPB 최고의 투수인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컨디션 좋은 날에나 보여주는 그것에 필적했다.

‘콜드 게임만은 안 돼.’

한일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진호라는 규격 외의 괴물이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일본내의 여론은 ‘그래도 해볼만 하다.’ 혹은 ‘일본의 승률이 더 높다.’가 다수였다. 만약 콜드게임을, 그것도 일본의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당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언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더라도 일단 콜드게임 만큼은 막아야 했다. NPB 최고의 불펜이 와타나베 슌스케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갔다.

[4회 초 와타나베 슌스케 투수를 대신해 이와세 히토키!! 이와세 히토키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난 99년 주니치의 경기를 지켜 본 팬들이라면 조금 익숙한 이름이죠? 당시 커리어 말년을 불태웠던 우리 국보투수의 뒤를 이어 주니치에서 마무리 투수를 수행하고 있는 투수입니다. 현재 NPB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투수예요.]

뻐엉!!

“스트라잌!! 아웃!!”

강진호를 제외하고 한국 대표팀 유일의 메이저 리그 타자인 최현성이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후, 저게 세계 최고의 선수라 이거지.’

타석에 올라온 진호를 바라보는 이와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의 타자를 상대해볼 기회라니. 빅리그 진출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와세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이른 합숙 훈련으로 이와세 히토키의 몸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그의 151km/h의 빠른 공이 바깥쪽 살짝 벗어난 코스를 공략했다. 작년 NPB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범타를 만들어낸 가장 자신있는 코스, 가장 자신있는 공이었다. 바깥쪽에 제법 후한 오늘의 심판이라면 스트라이크를 불러줄 법한 공에 진호의 배트가 흘러나왔다.

딱!!

‘됐어!!’

등을 돌린 이와세가 높게 뜬 공이 외야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떠오른 공이 떨어지지 않는다. 도쿄돔의 천장을 뚫어버릴 기세로 날아가는 야구공. 잠시 타구를 지켜보던 진호가 방망이를 내려놓은 채 천천히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딱 좋은 공이었어.’

NPB 최고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의 결정구는 나쁘지 않았다. 나쁜 것은 타석에 선 타자가 메이저 최고 레벨 투수들의 결정구를 수없이 상대해온 메이저 최고의 타자였다는 점뿐이었다. 강진호에게 NPB 최다 세이브 투수의 결정구는 늘상 상대해오던 공보다 조금 못한 공에 불과했다.

-강진호 1라운드 3경기 11타수 10안타 8홈런 2볼넷. 0.909/0.923/3.091. 메이저 레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다.-

-대한민국 대표팀. 일본을 상대로 7회 12:1 콜드게임!!-

-조별리그 3연전을 모두 콜드게임으로 끝낸 대한민국!! 본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다!!-

-오 사다하루 ‘오늘 내가 생각해 온 야구의 상식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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