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FA 로이드(3)
멕시코 대표팀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공인 A매치라고 하기 보다는 이벤트전의 성격이 더 강한 WBC의 특성상 국가 선택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덕분이었다. 본인, 혹은 부모의 출생지와 국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출전할 수 있는 이 느슨한 룰은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수많은 남미 출신 라티노들과 그 2세들을 남미를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둔갑시켰다.
멕시코라고는 부모님 고향에 여행 삼아 몇 번 가본 것이 전부인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출신의 2000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아드리안 곤잘레스 역시 그중 하나였다. 비록 아직 터지지는 않았지만, 작년 확장 로스터에 콜업되어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줬던 그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젠장!!!”
제법 잘 맞은 타구였다. 하지만 저 악몽 같은 강진호가 어느새 달려들어 그의 타구를 처리했다. 애초에 수준 미달이었던 중국이나 대만. 어차피 본선 진출은 확정된 상황, 안방에서 노골적인 고의사구를 꺼리다 두들겨 맞았던 일본과 달리 1승, 1승의 차이로 4강 진출이 갈리는 멕시코 대표팀은 진호와의 승부를 철저하게 피했다. 그러나 말거나 진호는 자신이 어째서 가장 완벽한 타자가 아닌 ‘야구선수’라고 불리는지를 보여주었다. 매 경기 2점의 가치를 더해준다는 그 터무니없는 수비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진호의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늘 멕시코에서 선발로 나선 투수는 04시즌과 05시즌 AL 올스타에 빛나는 오클랜드 소속의 에스테반 로아이자였다. 비록 완성된 몸은 아니었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투수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멕시코 팀의 주전 포시 미겔 오하다 역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백업에 불과하긴 했지만, 빅리그 평균의 타격과 수비를 갖춘 포수였다.
뻐엉!!
“세입!!”
하지만 3월 초, 아직 몸도 올라오지 않은 메이저 올스타 투수와 ‘고작’ 리그 평균의 포수가 막아서기에 진호의 발은 너무 빨랐다. 1루로 걸어 나간 진호가 마치 자신의 몫을 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2루를 훔쳐왔다.
그리고 쾅!!!
지난 3년간 메이저에서 리그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줬던 최현성의 배트가 로아이자의 밋밋한 슬라이더를 제대로 잡아당겼다.
[최현성!! 최현성의 투런포!! 와, 여기서 최현성이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죠. 이런 게 나와줘야 상대 팀도 함부로 강진호를 거르지 못하거든요. 작년 강진호 선수의 그 압도적인 기록은 본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후속 타자들이 위협적으로 버티고 있어 준 것도 무시할 수 없거든요.]
[사실 강진호 선수가 너무 아웃 라이너라 조금 가려진 감이 있긴 합니다만 우리 최현성 선수도 절대 무시할만한 선수가 아니에요. 유망주 시절 BA 순위 22위까지 기록했던 정말 대단한 선수거든요.]
[물론 강진호 선수와의 직접적인 비교는 힘듭니다. 강진호 선수는 유망주 시절의 실링 이상으로 성장한 흔치 않은 케이스이니까요. 하지만 최현성 선수도 만약 실링을 꽉 채워주기만 한다면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4번 타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에스테반 로아이자를 두들긴 것은 메이저 타자인 현성이만이 아니었다. 다수의 국내파 타자들 역시 로아이자를 비롯한 빅리그, 그리고 AAA 리그를 오가는 투수들을 생각보다 쉽게 두들겼다.
“이거 오히려 일본 애들보다 쉬운데?”
“메이저, 메이저 하더니 별거 아니네.”
“글쎄요, 그렇다고 보기엔 저기 쟤들은······.”
최근 부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더핸드로 91마일짜리 공을 던져대는 괴물의 모습을 보는 순간 메이저가 별것 아닌 것 같다던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아무래도 일본 애들은 이 악물고 덤빈 것도 있고, 우리처럼 2월에 미리 모여서 몸을 만든 게 큰 것 같아. 딱 보니까 얘들은 그냥 스프링 캠프 초반 온 것처럼 설렁설렁 온 것 같은데. 구속도 140 간신히 넘기고 있고 구위도 그다지 좋지 않잖아.”
“그러게요. 이거 그러면 우리랑 일본이 본선 진출하고 미국이랑 멕시코가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래도 미국은 다르지. 거기 타자들 대충만 휘둘러도 일본 애들 우르르 나가떨어질걸?”
30인 로스터 연봉 총합만 하더라도 근 3억 달러. 저 악의 제국 양키스라도 감히 엄두 내기 힘든 압도적인 라인업을 자랑하는 미국 대표팀을 고작 멕시코와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미일 전.
-일본의 호투!! 4:3 아쉬운 패배.-
“어?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4:3?”
“야, 우리 한국팀이 일본을 상대로 7회 콜드게임이었잖아. 그러면 우리가 미국보다 더 쎈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연봉 차이가 3억 이랑 4천만인데 말이 되냐?”“강진호는 지금 FA 아니라서 그렇지 실력만 따지면 혼자 4천만이고, 저기 미국 3억 달러는 선수 생활 말년이라 연봉 값 못하는 선수들도 좀 있는 거잖아.”
“그래도 미국은 좀 어렵지. 그냥 일본 두들겨 패고 4강 올라가자고. 메이저리그 조금이라도 봤으면 솔직히 미국 이긴다는 이야기는 절대 못 한다.”
-돈트렐 윌리스 ‘멕시코와의 경기는 잘 봤다. 하지만 그래도 Kang의 원맨팀이라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Kang만 조심한다면 무난한 승리를 예상한다.’-
그리고 2라운드 2차전 미국과의 경기.
미국 역시 진호를 상대로 볼넷을 남발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애초에 빅리그 구단들조차도 제대로 승부하지 않는 사기 유닛이다. 게다가 시즌이 시작조차 하지 않은 3월이다. 미국 대표팀의 감독 벅 마르티네스는 몸이 덜 풀린 투수들이 강진호라는 타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볼넷으로 나가도 상관없다. 도루도 상관없다. 어차피 후속타는 나오지 않는다. 최현성은 물론 위협적인 타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충분했고 04년 커리어 하이를 찍을 때와 달리 몇 가지 부상이 겹친 그는 상대할만한 타자였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리그 평균 타율이 2할 7푼인 곳에서 2할 6푼으로 규정타석을 충족한 타자 중 팀 내 최하의 타율. 타석 대비 가장 많은 삼진과 볼넷을 기록한 형편없는 선구안.
하지만 단타보다 장타가 더 많은 변태적인 스탯의 어느 홈런왕이 침착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05시즌 일본 퍼시픽 리그 0.260/0.315/0.551의 타자가 메이저 22승 10패 ERA 2.63의 투수를 상대로 장대한 투런 포를 쏘아올리는 순간이었다.
-4천만 달러의 대한민국!! 3억 달러의 미국 대표팀을 격파!! 조 1위!!!-
-일본 멕시코전 승리. 하지만 사실상 본선 2라운드 탈락!!-
-멕시코 대표팀!! 한국에 이어 일본전 마저 패배!! 조 꼴찌 확정.-
-디즈니랜드로 향한 멕시코 대표팀. ‘미국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겠다.’-
-오 사다하루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을 잡고 2승 1패 TQB(Team Quality Balance)로 진출을 노리겠다.’-
도쿄돔에서 경기하던 때와는 달랐다. 어차피 2라운드 진출권을 확보한 상황. 일본 팬들 앞에서 한국 선수를 상대로 고의사구를 내주는 장면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었다. 물론 결과는 콜드게임이라는 최악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저 괴물은 오 사다하루가 알고 있는 야큐와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다.
“강진호 타석은 전부 거른다.”
앞서 멕시코와 미국이 실패했던 전략의 답습. 하지만 일본 대표팀은 그 두 나라와 달랐다. 이름값만 보자면 두 대표팀의 투수들이 더 대단하다. 하지만 아직 몸이 덜 올라온 그들과 달리 2월부터 합숙을 통해 컨디션을 끌어올린 일본의 투수들은 최상에 가까운 컨디션을 유지 중이었다. 그 증거가 미국전 4:3의 아쉬운 패배다. 강진호를 제외한다면 그 1라운드 때와 같은 터무니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이치로를 비롯한 일본팀의 타자들이 한국 투수를 공략해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와, 이거 정말 진기한 기록으로 남겠는데요? 3경기 지금까지 총 11타석인데 1타수라니요.]
[10타석 1타수 무안타 9볼넷이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 1라운드의 기록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스탯이 0/0.900/0이 되는 셈이네요. 지난 1라운드의 그 터무니없는 기록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쪽이 싸게 먹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문제는 강진호 선수만 저렇게 봉쇄한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지난 멕시코전, 그리고 미국전을 통해 이미 증명이 됐거든요. 대한민국 대표팀 절대 약하지 않아요.]
메이저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투수. 95마일을 던지는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전성기를 느끼게 하는 기량. 메이저에서 보여준 것이 전혀 없음에도 최소 1억 달러가 기준점이 되리라 예상되는 특급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공이 한국 타자들을 연신 돌려 세웠다. 제한 투구 수를 다 채우고 내려오는 시점에서 5.1이닝 2피안타 2사사구 1실점. 마운드를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젠장, 쓸데없이 볼넷으로 내보내지만 않았어도 무실점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강진호가 세계 최고의 타자라면 마쓰자카 다이스케 자신은 세계 최고의 투수다. 게다가 애초에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7할의 확률로 투수가 이기는 싸움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경기가 흘러갔다. 7회 말. 4:2, 1아웃 주자 2루. 오 사다하루는 자신의 계획이 그럭저럭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사구로 내보낸 강진호에게 2루 도루를 허용했지만 후속 타자인 최현성은 오늘 3타수 무안타를 기록중이었다. 여기서 그를 막아낸다면 이제 강진호의 타석은 돌아오지 않는다. 비록 득점이 조금 적은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멕시코가 미국에 5점 이내로만 패배해준다면 4강전에 진출할 수 있다.
그리고 진호가 달렸다.
[어? 2루 주자!! 3루로!! 단독 도루!!!]
[다니시게 모토노부!! 빠르게 3루 송구!!]
뻐엉!!
“세이프!!”
[허, 세입, 세입입니다.]
[와, 강진호!!! 2루 도루에 이어 3루 도루까지 성공시킵니다.]
3루 도루를 고려하지 않은 투수의 방심. 그리고 빅리그에 비해 약한 어깨와 느린 팝 스피드를 노린 도루가 성공했다. 희생 플라이 하나면 추가점이 나오는 상황. TQB를 생각한다면 추가점을 주는 것은 위험했고 타석에는 196cm 106kg의 거포가 서 있다. 마운드의 고바야시 히로유키가 미트를 향해 강하게 공을 뿌렸다. 땅볼을 유도하는 낮은 코스의 공. 그 순간 희성의 배트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유려하게 움직였다.
[버, 번트?]
정확하게 3루를 타고 흐르는 공. 당황한 삼루수가 움찔하는 사이 진호의 몸이 홈을 향해 질주했다.
“세이프!!!”
진호가 발로 1점을 얻어냈다.
‘괘, 괜찮아. 멕시코가 4점 이내로만 패배해준다면!!’
딱!!!
그리고 이어지는 상엽의 타석. NPB. 투승타타를 신봉하는 일본 팬들에게 돈값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와중에도 묵묵히 리그 최고 수준의 OPS를 기록하던 장타 아니면 삼진의 홈런왕이 또 한 번 드라마를 만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결정적 순간의 국제대회 2점포. 7회 말 한국이 5:4 역전을 일궈냈다.
-대한민국 3연승!! 2라운드 1위 통과!!-
-일본 1승 2패!! 탈락 확정!!-
-세계 2위의 야구리그 NPB의 수모? 일본 2라운드 탈락!!-
기자들의 기사가 쏟아졌다. 한국의 길거리는 2002년을 떠오르게 하는 환호로 가득 찼고 일본의 인터넷에는 대표팀을 조롱하는 이야기들과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오라는 비난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정확히 4시간 뒤.
-미국 2:1 충격 패!!-
-디즈니 월드에 놀러 가서 특훈을? 멕시코!!! 미국을 꺾다!!-
-일본 기사회생!!! 일본 멕시코 미국 1승 2패로 동률!! 득실에 따라 일본의 4강 진출 확정!!-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심지어 멕시코 대표팀 자신들조차 예상치 못했던 멕시코의 승리가 세 번째 한일전을 성사시켰다. 오 사다하루에게는 마지막 일발 역전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계획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진호는 걸어 나갔고 달렸고 돌아왔다. 몇 번의 경기를 통해 진호는 일본 투수들의 타이밍을 간파했고 그 사이 일본의 투수들이 간파한 것은 강진호라는 타자가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점뿐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WBC 규정 같으니!!!’
일본 최고의 투수, 자칭 세계 최고의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투구 수 제한에 막혀 출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주요했던 것은 메츠 소속의 세 번째 투수. 성준의 활약이었다. 4회 불펜으로 등판한 성준은 80개의 공으로 무려 13명의 타자를 잡아내며 일본의 타선을 꽁꽁 묶었다. 성준 자신도 얼떨떨할 만큼 놀라운 활약이었다.
세 번째 한일전의 무난한 승리. 그리고 결승전 쿠바를 상대로 한 압도적인 승리. 제1회 WBC. 진호를 앞세운 대한민국이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
“거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이거 돈 된다고 했잖아요.”
나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제이지의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가득했다. 평균 시청자 수 87만. 50만을 기준으로 손실을 보전해주는 계약을 체결했던 만큼 그야말로 대박을 넘어서 초대박이라고 할만한 결과였다. 아직 규모가 크지 않은 NYM Network의 향후 4년 수익 정도는 보장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익.
‘게다가 이 대회 2009년에 어차피 또 열리잖아.’
제이지가 결심했다. 앞으로 진호의 사업제안이라면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도 아주 진지하게 세 번 정도는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