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00화 (200/210)

# 200화.

패배하지 않는다(1)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여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몸을 풀었고 평소처럼 움직였다. 컨디션 역시 평소보다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뻐근함과 피로감. 가리비아의 잔소리. 하지만 일 년에 162경기를 뛰어야 하는 야구선수의 시즌 중반이었다. 게다가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는 선수의 몸이 최적의 컨디션이 아닌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자, 타석에는 강진호!! 강진호가 들어옵니다. 빅리그 15년 차. 작년까지 12개의 골드 글러브와 13번의 올스타, 8개의 실버 슬러거. 그리고 여섯 번의 정규시즌 MVP까지. 지금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 첫턴이 확실한 선수입니다.]

[하하, 강진호 선수면 이미 첫턴이야 뭐 당연한 거고 중요한 건 역대 최고의 득표율을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죠. 당장 메츠와의 10년 계약이 아직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남은 5년 이대로 무난하게 커리어를 마감해주면 정말 2차대전 이후, 아니 야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커리어를 남긴 선수로 기록될 겁니다.]

[맞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한국 나이로 서른일곱. 만으로 서른다섯 8개월의 나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에요. 언제 에이징 커브가 찾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거든요. 당장 강진호 선수보다 세 살이나 어린 푸홀스 선수도 올 시즌 성적이 주춤한 기세예요.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선수라면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언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강진호 선수의 활약을 보고 있자면 그 에이징 커브라는 것도 조금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 마운드의 자니 쿠에토가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등을 돌린 자니 쿠에토가 특유의 어깨춤을 보여준다. 어떤 때는 등을 돌린 채 어깨춤을 어떤 때는 기습적으로 공을 던지는 녀석의 피칭은 공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정말 비호감의 극치였다. 침착한 기다림. 그리고 녀석의 공이 기습적으로 튀어나왔다. 잔뜩 긴장돼있던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딱!!

[강진호 안타!! 안타입니다!! 작년 절정의 컨디션을 자랑하며 커리어 여섯 번째 MVP를 수상한 강진호 선수!! 올해도 역시 서른일곱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진호!! 1루까지!! 1루까지 무사히 도착합니다.]

08년 발목 부상 이후 달리는 속도가 영 예전만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공에 1루까지 나가는 것 정도야 거뜬했다. 아직 BsR에서 마이너스를 기록하기에는 일렀다.

“괜찮아?”

“네? 뭐가요.”

“거기.”

1루 주루코치인 헨더슨이 나의 손목을 힐끔 쳐다본다. 사실 방금 타격에서 조금 무리하게 잡아당긴 탓에 욱신거리는 감이 있긴 했다.

“뭐, 이 정도야. 별거 아니죠. 괜찮아요.”

“조심하라고.”

암가드와 풋가드를 받아들고 도루 장갑을 건네는 헨더슨. 장갑을 끼고 적당한 리드폭을 유지한 채 투수를 응시했다. 타석에 프레스톤이 들어왔다. 8년 장기 계약의 마지막 해. 한국 나이로 39살이 다 돼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녀석이다. 아마 올해가 끝나도 1년, 혹은 2년 계약 정도는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으리라.

부웅

쿠에토의 얍쌉한 피칭에 프레스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두 번째. 존 밖으로 완벽하게 빠지는 공을 건드린 프레스톤. 힘없는 타구가 내야를 굴렀다.

‘젠장!!’

높은 확률의 병살타. 하지만 아직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전력을 다해 2루로 달렸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낮게 날아오른 나의 오른발이 2루 베이스를 향했다.

뻐억!!

아득한 통증이 뇌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통증. 의료진과 들것이 긴급하게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왔다. 무어라 떠들어대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것에 실려 후방으로, 그리고 병원으로. 그렇게 나의 2012년이 끝났다.

-강진호 레즈와의 시리즈 2차전 2루 슬라이딩 중 발목 부상!!-

-강진호 시즌 아웃? No!! No!! 이전 비슷한 부상에서도 한 달 만에 돌아왔던 경험이 있어. 하반기에는 팀에 합류할 확률이 높아.-

-4천만 달러의 빈자리? 뉴욕 메츠 7년 만의 시리즈 스윕패-

-연이은 에러!! 커크 뉴엔하이스에게 시티 필드의 외야는 너무 넓다!!-

-강진호 수술?-

-수술은 없다!! 강진호 비수술적 치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다.-

-결국, 수술!! 올 시즌, 시즌 아웃이 불가피해진 강진호.-

-강진호 08년부터 통증을 참고 뛰어 왔다!! 수술을 받고 내년 이후 건강한 몸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

수술, 그리고 재활. 우습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타임 슬립 이전의 과거. 나는 이보다 더 지독한 부상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었다. 그에 비한다면 지금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워워, 진호 천천히 천천히 하자고. 급할 것 없잖아.”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매 잘생긴 얼굴. 과거 툭 튀어나온 배와 떡진 머리카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40대의 사업가 가리비아가 나를 말렸다. 현재 메이저리그를 넘어 미국 스포츠계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포츠 그룹의 주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였다. 하지만 나의 부상 소식에 이렇게 직접 날아와 재활 운동 하나하나를 직접 돌봐주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당연하지. 내가 누군지 잘 알잖아. 나 미라클 가리비아라고 미라클 가리비아. 지금 나한테 한 시간이라도 교정받고 싶어 하는 애들이 트럭으로 열 트럭이야. 그런 이 몸이 이렇게 꼭 붙어서 1:1로 전담해주고 있는데 다치기 전이랑 조금도 다르지 않게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390달러를 외치던 꾀죄죄함 대신, 10년이 넘는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감과 당당함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학습된 당당함 속에 숨겨진 불안감들을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엘리트 운동인 이라고 해도 서른일곱, 아니 내년이면 서른여덟에 수술까지 한 몸이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수 없었다.

“메츠랑 계약돼있는 사 년. 딱 사 년만 더 뛰게 해달라고. 이대로 끝내기엔 못 이룬 게 너무 많아.”

15년간 2187경기 2745안타 575홈런 480도루. 그리고 6개의 MVP. 전생의 초라한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나의 커리어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의 삶에 걸친 야구에 대한 나의 집념은 고작 15년의 빅리그 경험으로 충족되기에 너무 깊고 깊었다.

“사 년? 걱정하지 마. 지금 그 계약 끝나고 또 한 번 다년 계약을 맺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돌려놓아 줄 테니까. 그러니까 혼자서 폭주하지 말고 내가 정해준 커리큘럼대로 정확하게 가자고.”

세계 최고의 전문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이봐, 사이비, 그 녀석은 좀 어때?”

“뭐, 괜찮습니다. 얼마 전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 지났다고는 믿기 힘든 회복력이에요. 괴물은 괴물입니다.”

“나랑 비교하면?”

리키 헨더슨의 질문에 가리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헨더슨 씨야 완전 몸은 규격 외였죠. 최대 2년을 예상했었는데 무려 5년을 더 버틴 건 순전히 헨더슨 씨의 재능이었으니까요. 그 정도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진호 역시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아마 내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충분히 시합을 뛸 만큼 회복 될 겁니다.”

“충분히 시합을 뛸 만큼?”

가리비아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녀석도 이제 내년이면 36세 시즌이에요. 부상이 없다고 해도 예년과 같은 상태를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예요. 이정도 부상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평균 이상의 선수로 활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녀석은 진호야. 강진호. 세상에서 나 다음으로 위대한 야구선수지. 고작 이정도 부상에 녀석이 주저앉는다고?”

“누가 주저앉는답니까. 내년 복귀한 이후에도 꾸준히 관리받으면 몸은 조금 더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타격은 하기에 따라서 이전의 기량을 상당히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단지 운동능력의 비중이 절대적인 수비, 그리고 주루가······. 그래도 진호가 내야수가 아닌 외야수라는 점은 다행이군요.”

연평균 160경기가량을 뛰어야 하는 야구선수. 더욱이 넓은 수비 범위와 적극적인 주루플레이를 즐겼던 진호의 다리는 이미 너덜너덜한 상황이었다. 물론 성능이라고 볼 수 있는 운동능력은 준수했다. 하지만 그 내구성만큼은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코너, 혹은 1루로 컨버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는 건가?”

“글쎄요. 솔직히 그건 모르겠습니다. 진호의 수비에서 그 빠른 발이 차지하던 비중이 얼마나 됐는지, 그리고 그렇게 줄어든 속도가 리그 최고의 수비를 어느 수준까지 깎을지는 예측하기 힘드니까요. 다만 이전처럼 좌익수 쪽에 허수아비를 세워둬도 리그 평균 수준의 외야 수비를 가능하게 해주던 강진호라는 사기적인 중견수는 이제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리키 헨더슨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지금 이 말, 진호에게도 이미 한 건가?”

“아뇨. 지금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강한 의지와 의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굳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죠. 이건 헨더슨 씨니까 하는 이야기인 겁니다.”

“후, 돌팔이 주제에 그래도 생각은 좀 있군.”

물론 지금까지 진호의 타격 성적은 역대급이라고 볼 만했다. 그러나 단순히 타격 성적만 본다면 그보다 위대한 선수는 아직 양손을 가득 채울 만큼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호가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로 이름을 오르내리는 것은 그 타격에 못지않은 수비, 그리고 주루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진호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타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중견수’라고는 확신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 녀석에게 수비를 뺏어간 다라······.’

야구선수에게, 그것도 커리어 내내 부상입은 해를 제외한다면 골드 글러브와 필딩 바이블 어워드를 놓치지 않았던 선수가 자신의 수비 포지션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리키 헨더슨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

2013시즌 2월 말. 언제나처럼 플로리다 그레이프푸르트 리그를 향해 천 명이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메츠의 스프링 트레이닝 홈구장인 트래디션필드. 붉은색의 엔초 페라리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어? 저거 강진호 아니야?”

“맞아!! 저 페라리. 강진호 선수 차야.”

운전석에 앉은 부인의 볼에 키스하고 차에서 내리는 진호. 작년 6월 부상 이후 언론에서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던 메이저리그 최고스타의 등장에 흥분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강진호 선수!! 8개월 만의 훈련 참가인데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몸 상태는 어떤가요? 바로 훈련에 참여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차에서 내린 진호의 몸에 부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당히 부푼 가슴, 두툼한 팔뚝과 강철같은 두 다리.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진호의 태도에 여유가 묻어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재활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몸 상태는 특별히 나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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