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02화 (202/210)

# 202화.

패배하지 않는다(3)

뻐엉

초구 볼. 97마일의 빠른 공이 아슬아슬하게 존 밖으로 빠져나갔다. 고개를 가로젓는 스트라스버그. 두 번째 공이 날아든다. 존 안쪽으로 파고드는 속구였다. 대학 시절부터 유명했던 테일링 무브먼트가 매섭다.

딱!!

[빗맞은 타구!! 1루 내야 관중석을 넘어갑니다.]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초구를 거른 것도 그렇고 확실히 타격감은 살아있습니다.]

젠장. 타격 폼이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고?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허접한 투수들, 혹은 아직 폼이 올라오지 않은 투수들을 상대하다 오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를 상대하니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배트 타이밍이 늦는다. 방금도 평소의 나 같았다면 그대로 잡아당길 타이밍이었다.

‘조금 더 빠르게.’

배트가 늦는다면 타이밍을 조금 빠르게 가져가는 수밖에 없다. 스트라스버그의 공을 지켜 본다.

[자 제 3구!!]

그리고 휘둘렀다.

부웅!!

[강진호 헛스윙!! 아, 체인지업!! 작년 수많은 타자들을 돌려 세웠던 스티브 스트라스버그 전가의 보도 서클 체인지업입니다.]

[아, 강진호 선수가 체인지업에 헛스윙합니다. 이거 정말 좋지 않네요. 다들 아시겠지만, 강진호 선수의 경우 매덕스 선수가 토니 그윈과 함께 체인지업이 통하지 않는 특별한 타자라고 극찬했던 타자거든요. 실제로 역대 최고의 체인지업으로 손꼽히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선수도 체인지업을 던지기 제일 싫은 타자로 강진호 선수를 꼽았어요.]

마음이 급했다. 날아드는 공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빠져나왔다. 옷깃을 털고 배팅 장갑을 동여맸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조금 진정됐다. 천천히 타석에서 스트라스버그를 응시했다.

네 번째 와인드업. 스트라스버그의 공이 그의 손을 출발했다. 존의 복판으로 들어오는 듯한 공. 하지만 속구보다 늦다.

‘슬라이더?’

바깥쪽 꽉 찬 공간을 공략하는 슬라이더다. 볼카운트는 2-1 아슬아슬한 공을 그냥 거를 수는 없다. 꽉 움켜쥔 배트를 힘차게 돌렸다!!

딱!!

슬라이더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휘어나가는 슬러브. 밖으로 크게 빠져나가는 공을 배트 끝이 살짝 건드렸다. 하지만 타구는 나쁘지 않았다. 삼루수 정면으로 천천히 흐르는 공. 전력을 다해 1루로 질주한다.

느리다. 느리다. 느리다······.

뻐엉!!

“아웃!!”

[아!! 내야 땅볼 아웃!! 강진호 내야 땅볼 아웃입니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선수의 공이 너무 좋았어요. 존 안에서 완벽하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변화구였습니다.]

[조금 아쉽습니다. 타구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살아 나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발목 부상에서 이제 막 복귀한 만큼 주루가 완벽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진호 선수의 전매특허 중 하나가 저런 내야 땅볼을 안타로 만드는 모습이었거든요.]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다는 발목을 한번 노려본다.

‘젠장.’

분한 마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억울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다.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던 타격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해야지, 1루까지 살아가지 못했던 잃어버린 주루를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분한 마음을 다잡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아직 적응이 조금 덜 돼서 그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강진호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

“아빠!!! 빨리!! 빨리이!!!”

“어어, 민서야 잠깐만.”

“레예스 타석 돌아왔단 말이야!! 이제 바로 다음이 강진호 선수 타석이야!!”

일요일 오후. 형석은 자신을 재촉하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것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자, 여기 네가 좋아하는 치킨이다!!”

“어, 아빠 올라온다!! 강진호 올라와.”

이번에 큰마음 먹고 구입한 54인치 FHD급 대형 TV에 무려 15년 동안 응원해 온 강진호의 얼굴이 비쳤다. 소파 옆자리에 앉아서 난리를 피우는 딸아이의 키 만큼, 어느새 후드득 빠져버린 자신의 머리숱만큼 긴 세월을 헤쳐 온 얼굴에는 그 세월의 무게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

허무하게 돌아간 방망이에 아버지와 딸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새어 나왔다. 0.297/0.381/0.432. 분명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 언제까지 3/4/6이라는 사기적인 스탯을 유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작년 부상 직전까지 강진호가 기록했던 비율 스탯은 0.347/0.444/0.693. 커리어 일곱 번째 MVP이자 두 번째 백투백 MVP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예상되던 성적이었다.

[아, 97마일 빠른 공에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강진호!!]

[사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부상복귀 시즌이라 걱정했던 것치고는 강진호 선수가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사실 올 시즌 양대리그의 중견수 중에 강진호보다 확실히 좋은 선수를 꼽으라고 하면 트라웃, 매커친, 고메즈, 추 성수, 존스, 엘스버리 정도밖에 없거든요. 적어도 리그에서 네 번째는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사실 강진호 선수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었던지라 지금 이런 모습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코 제 몫을 못 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연 4천만 달러라는 연봉을 생각한다면 조금 더 해주는 것이 맞긴 합니다. 하지만 본래 FA를 10년씩 걸고 할 때는 10년 내내 잘할 걸 예상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한 5~6년 정도 바짝 잘해주고 그 뒤로는 평균만 해줘도 아주 성공적인 FA라고 봐야 해요. 강진호 선수 같은 경우 초반 5년간의 활약만 계산해도 10년 치의 활약은 충분히 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이대로 지금처럼만 기량을 유지해준다면 아주 모범적인 FA 사례로 남을 수 있을 겁니다.]

강진호가 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자리. 한국의 해설자들이 연신 그의 삼진을 변명하기 바빴다. 나이, 부상, 어쩔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만한 실력을 유지 중이라는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들을 듣던 형석의 어린 딸 민서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형석에게 물었다.

“아빠, 강진호 선수 이제 예전처럼은 못 뛰는 거야?”

“어? 아냐. 민서야 그건 저 아저씨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진짜?”

“당연하지!!”

토끼에서 곰으로 진화해버린 아내, 그를 대신한 토끼 같은 딸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현실 속에서 매일 밤을 새워가며 강진호의 경기들을 돌려보고 그의 성적을 예측하고 좋지도 않은 영어 실력으로 현지 기사들을 해석했던 열정 가득했던 형석은 어느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호 선수. 당신은 이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렇기에 형석은 기도했다. 열정 가득했던 20대를 지나 힘겨웠던 30대 내내 TV만 틀면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의 우상이 변하지 않기를.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슈퍼 히어로와 같은 모습으로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기를 말이다.

-강진호 다저스전 4타수 무안타 2삼진.-

-길어지는 부진 강진호.-

-강진호 올 시즌 부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전 중견수 최다득표.-

<부상복귀 해인데 이 정도는 익스큐즈지. 솔직히 강진호가 지금까지 한 거 생각하면 남은 기간 드러누워도 밥값 다 했음.>

<에이, 연 4천만인데 남은 기간 다 드러눕는 건 좀 아니지. 매년 메이저 하위권 팀 전체 연봉만큼 받아가는 건데.>

<강진호가 메츠 멱살 잡고 우승시킨 게 몇 번인지 기억하면 그런 뇌 없는 소리는 못 하지. 강진호 없을 때 메츠 우승횟수 총 두 번. 62년 창단 이후 37년간 딱 두 번이야. 그런데 99년 이후 강진호가 강제로 메츠 우승시킨 횟수가 아홉 번임. 강진호 하나 때문에 역대 우승횟수 공동 13등이던 메츠가 단독 2위까지 올라간 거라고.>

<메츠 놈들이 아주 배가 불렀네. 불렀어.>

<배가 불렀다고? 이봐 당장 지금 강진호 데리고 가라면 데리고 갈 팀 있어? 게다가 아홉 번이나 멱살을 끌었다니. 말은 바로 해야지. 솔직히 2008년은 강진호 덕분이라고 하기도 좀 웃기지. 시즌 막판에 부상으로 포스트시즌 전부 결장했잖아.>

<지난 5년간 강진호가 연 4천만 달러 치의 활약을 해준 건 인정해. 작년도 반 시즌 뛰었지만 뭐 그간의 활약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지. 올해만 하더라도 비싸기는 하지만 그래도 리그 평균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니 감수할 수 있어. 그런데 내년엔? 후년엔? 지금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강진호 다음 달이면 서른일곱이야. 단순히 부상 후유증만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점점 성적이 떨어질 일만 남은 거라고. 애초에 서른 살에게 십 년 계약은 너무 길었어. 약물 선수들이 마흔이 다 돼서도 날아다니니 그걸 기준으로 계약한 게 문제라고. 내년부터 해서 3년. 메츠는 연간 4천만 달러를 챙겨가는 버릴 수 없는 거대한 똥과 함께할 거로 생각한다.>

<강진호한테 똥이라니. 말이 심하잖아. 이러니까 메츠 놈들은 명문이 못 되는 거야. 프랜차이즈를 대접할 줄을 모르잖아.>

<말이 조금 심하기는 한데, 사실 마이너 거부,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 연 4천만짜리 선수면 곤란하긴 하지. 당장 올해 메츠 전력에 강진호 대신 4천만이면 포스트시즌 충분히 나가지 않냐?>

<야 그래도 니들은 애너하임보다는 낫지. 난 대체 걔들은 무슨 생각으로 서른두 살 선수한테 10년 250mil을 제시했는지 궁금하다.>

<하긴 FA 2년 차부터 똥을 싸기 시작한 푸홀스에 비하면 그래도 절반은 활약해주고 싸기 시작한 강진호는 양반이지.>

<야, 푸홀스 올해 한 번 이런 거거든? 이제 서른셋인데 서른일곱인 강진호랑은 다르지. 얜 반등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하, 2000년대 최고의 타자들이 이렇게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있자니 좀 슬프네.>

***

7월 올스타전. 언제나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맞이하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일 년에 딱 한 번 같은 팀으로 뛰었던 치퍼 존스는 작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지독한 인간이었다. 40살 은퇴하는 마지막 해까지 올스타전에 아등바등 출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MVP 표까지 한 장 챙겨갔으니 말이다.

치퍼 존스의 자리를 차지한 우리 팀의 주전 삼루수 데이비드 라이트가 나를 보며 웃는다. 이제는 제법 베테랑 기운이 풍기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내가 늙기는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이제 물러날 때도 된 건가?’

덕아웃을 가득 채운 올스타급 선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80년대 후반, 심지어 90년대에 태어난 녀석들까지 앉아있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데이비드 라이트가 베테랑으로 보일 만큼 뽀송뽀송한 얼굴들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누군가 다가와 나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인상적인 헤어스타일. 브라이스 하퍼다.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Kang과 함께 경기하는 걸 꿈꿔왔습니다. 작년에는 너무 아쉬웠는데 오늘 마침내 꿈을 이루네요.”

건방짐이 지나치다는 세간의 평과 다른 깍듯함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와 경기하는 것을 꿈꿔왔다는 이야기에 문득 녀석과 나의 나이 차이가 확 와닿았다. 1992년생. 나와는 무려 16살 차이가 나는 어린 녀석이다. 맙소사. 거의 리키와 나만큼의 차이다. 문득 내가 처음 리키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리키를 처음 봤을 때 어땠더라?’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98년 리키 헨더슨이라는 위대한 전설을 봤던 시절의 나는 그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는 위대한 경력을 쌓아 올린 경험 많은 선수였지만 동시에 전성기를 한참 지나 은퇴할 일만이 남은 선수였다.

“그래, 오늘 좋은 경기 해보자.”

“넵!!”

두 눈을 반짝이는 녀석에게 친근감 대신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할 이야기는 ‘물러날 때가 된 건가.’ 같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강진호 올스타전 2타수 무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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