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패배하지 않는다(5)
덕 래타는 아직도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 래타 씨 맞습니까?”
“네, 제가 덕 래타인데 누구신지?”
“저는 제프 보리스라고 합니다. 스포츠 에이전트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덕 래타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은 에이전트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전화했느냐였다.
“스포츠 에이전트요? 스포츠 에이전트가 저를 왜?”
“다름이 아니라 타격코치 자리를 제안하려고 합니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타격코치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그의 선수 생활이라고 해봐야 대학야구를 거쳐 독립리그 경험이 전부였다. 코치 역시 고등학교의 코치 생활이 전부. 성적 역시 그리 빼어나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교습소를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제대로 전화를 건 것 맞나요?”
“제대로 걸었냐고요? 당연하죠. 4천만 명의 캘리포니아 사람 중에서 로스앤젤레스의 4백만을 제외하고 3천 6백만. 그 중에서 덕 래타라는 이름의 남자는 341명. 30세 미만을 제외하고 거기서 다시 독립리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고작 3명. 그중에서 타격 코치 일을 하고 있는 건 노스리지에서 교습소를 운영하는 래타 씨 당신밖에 없어요.”
무언가 울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 이곳에서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어서 자리를 비우는 건 조금 무리입니다. 사실 그럴 깜냥도 안되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고등학교 코치생활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상대 투수들을 제대로 분석할 줄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저 타격을 지도해주는 것뿐이죠. 인스트럭터라면 모를까 코치 자리는 제 능력 밖인 것 같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네? 저기 제대로 못 들으셨나본데, 제가 할 줄 아는 건.”
“네, 잘 들었습니다. 나름의 타격이론으로 타격을 지도하신다고요. 그러니까 그거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운영하는 교습소도 있고.”
제프 보리스가 덕 래타의 말을 끊었다.
“강진호.”
“네?”
“의뢰자가 강진호입니다.”
“자, 잠깐만요. 그게 그러니까 강진호라면 그러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린 덕 래타. 그를 대신해 보리스가 말했다.
“네, 뉴욕 메츠의 그 강진호 선수입니다. 전 그의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고요.”
“맙소사······.”
3년을 이어오던 덕 래타 타격 교습소가 1년간의 휴업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에 불과했다. 강진호 대폭발!! 개막전 4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3타점 2득점 대활약!!-
-완벽하게 바뀐 타격자세의 강진호!! 시티 필드 전광판 복판을 두들기는 대형 홈런!! 추정 비거리는 469피트로 시티 필드 개장 이래 최장거리!! (종전 기록은 플로리다 소속 지안 카를로 스탠튼 선수의 460피트)-
“지난겨울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사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법이죠.”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의 폼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완벽은 나의 터무니 없는 운동능력이 함께 할때에 빛을 발할 수 있는 완벽이었다. 내야 땅볼을 단타로 만들고, 조금 부족한 공을 이루타, 혹은 삼루타로 만드는 그 빠른 발.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휘두르더라도 제대로 공을 쳐낼 수 있는 순발력. 그 두 가지가 사라져버린 나에게 이 폼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 개막전은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운도 좋았지만요. 아마 앞으로 투수들은 강진호 선수의 약점을 찾아내서 공략해올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최고의 상태로 20번의 스윙을 끝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스윙이었다. 그리고 이 20번이 오늘 내가 하기로 한 스윙 연습의 전부였다. 최고의 상태에서 가장 정확한 스윙만을 몸에 박아넣는다. 나 정도의 선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지친 상태로 휘젓는 움직임은 나쁜 버릇을 몸에 새길 뿐이다. 덕 래타의 지론이었다.
“타구에 힘은 아주 제대로 실렸더군요. 좋습니다. 다소 부정확하게 맞더라도 이 정도로 힘있는 스윙이라면 타구는 충분히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전 강진호 선수가 보여주던 그 말도 안 되는 배트 컨트롤이 없더라도 말이죠.”
“어떤 길로 가건 타구의 질만 좋게 만들면 그만이라는 그 말, 오늘 또 하면 백 번 채울 것 같네요.”
“좋은 말은 백 번을 들어도 모자란 법이죠.”
스트라이드 폭을 줄이고 토우텝을 약간의 레그킥으로 전환했다. 변화구를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변화였다. 테이크백을 크게 가져갔고 뒷 팔꿈치의 위치를 조정해 백스윙을 키웠다. 나의 스윙을 세밀하게 조정해주던 덕 래타의 배팅 케이지를 벗어나 가리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체력단련실로 이동했다.
“진호 너는 이제 내일이 오늘보다 약하고 모레는 내일보다 더 약할 거야.”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땀을 뚝뚝 흘리며 근력운동을 이어갔다. 20파운드나 늘린 몸이다. 물론 근육양만 20파운드가 늘어났을 리는 만무하다. 그건 미라클 가리비아가 아니라 미라클 가리비아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할 기적이다.
어차피 줄어든 주력이었다. 어설프게 다 가지고 가려는 생각은 버렸다. 체중을 늘리고 근육을 키운다. 서른여덟 살에 수술까지 한 타자가 젊을 적 가지고 있던 것을 전부 다 가지고 싶다고 외쳐봤자 애들 징징거리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작년 한 해를 통해 깨달았다.
작년 내가 부진했던 원인은 타격의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타구의 질이 나빠진 것이었다. 원인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수정한다.
2013시즌.
메츠와의 장기계약은 아직 3년이 남아 있었다.
***
“다 실패입니다.”
“후, 곤란하군요.”
윈터 시즌. 프리드먼이 중점적으로 수집한 자원은 중견수였다. 강진호라는 규격 외 수준을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줄어든 강진호의 수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수준의 중견 수비. 그리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 수준의 배트라면 프리드먼과 조 매든은 만족할 수 있었다.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그래도 셰인 빅토리노 정도면 수준급의 선수입니다.”
“네, 수준급의 외야수죠. 하지만 그를 좌익수로 써먹고 진호를 중견수로 쓰는 쪽이 맞아요. 진호의 발이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진호를 중견에 세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8년 데뷔 이후 2012년 부상 전까지 진호가 14.5년 동안 수비로 쌓은 WAR만 무려 39.7. 그것은 역대 최고의 유격수 오지 스미스 이후 가장 높은 누적 DWAR였다. 애초에 진호 이전에 수비로 30 이상의 WAR을 쌓은 일곱 명의 선수 중 유격수가 아닌 선수는 22년간 16개의 골드 글러브를 차지했던 삼루수. ‘인간 진공 청소기’라고 불렸던 볼티모어의 프랜차이즈 브룩스 로빈스뿐일 만큼 진호가 중견수로 수비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호였던 만큼 비록 작년보다 20파운드나 불어난 몸 덕분에 한층 더 느려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리그 평균 이상의 수비를 보여주었다.
“곤란하군요. 강진호 선수의 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지금보다 10파운드 더 증량할 계획이라던데요. 그 정도까지 몸을 불리고 지금처럼 뛰어다닌다는 건 자살행위예요.”
“알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셰인 빅토리노를 중견에 세우고 진호에게 충분한 휴식을 줄 생각입니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경기에서는 코너로 돌리기도 할 생각이고요. 하지만 지금 구성이라면 일단 올해는 진호를 주전 중견수로 생각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여러모로 제가 방법을 더 강구해보도록 하죠.”
***
다저스와의 2차전. 어제 있었던 나의 변신 때문일까? 평소에도 극성맞은 뉴욕 언론이 한층 더 소란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가장 소란스러운 인간들은 그들이 아니었다. 평소 뉴욕 언론에게는 조금 죽어(?)지내던 한국의 언론들이 평소의 2배쯤 되는 규모로 경기장을 점령했다.
-KBO, 메이저 직행 1호 투수. 류형준 선발 등판!!-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타자와 KBO가 낳은 괴물의 맞대결!!-
-시범경기 27.1이닝 ERA 3.29 17안타 10자책 1피홈런 27탈삼진 8볼넷 류형준!! 20경기 62타수 13안타 3홈런 0.21/0.269/0.419. 강진호 맞대결!!-
한국인 최초로 포스팅 제도를 이용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뚱뚱한 투수 덕분이었다. 3년 전 성공적으로 메이저 생활을 마무리했던 찬화 선배가 커리어 말년을 조국에 봉사하겠다며 KBO에서 최저연봉을 받고 뛰면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야, 우리 팀에 죽이는 녀석이 하나 있어.”
“죽이는 녀석이요?”
“그래, 능구렁이를 한 백 마리쯤 품에 안고 있는 녀석인데 이 녀석 백 프로 빅리그에 간다.”
“뭐, 좋죠. KBO에서도 이제 유망주 상태로 말고 그런 식으로 빅리그에 건너오는 선수가 좀 생겨야죠. 선배 거기서 뛰면서 걔 혹사 안 당하게 관리나 좀 잘 해주세요.”
“걱정마라. 그런 건 네가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까.”
다저스의 공격이 끝난 1회 말. 마운드 위에 뚱한 표정의 투수가 올라왔다. 감격적인 빅리그 첫 무대임에도 긴장한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 한국의 리그라고는 하지만 명색의 프로로 7년이나 생활한 만큼 마인드 컨트롤에 상당히 능한 모습이었다.
딱!!
[루이스 크루즈 공 잡아서 마크 엘리스에게, 마크 엘리스!! 그대로 아드리안 곤잘레스에게!! 더블 플레이!! 더블 플레이입니다. 류형준의 체인지업이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냅니다.]
90마일을 오가는 속구와 80마일을 오가는 슬라이더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하지만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78마일의 체인지업은 몹시 훌륭했다. 저 덤덤해 보이는 표정 속에 숨겨진 긴장이 사라지고 높게 형성되는 공들의 로케이션만 안정된다면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타석으로 시작되는 2회 말.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녀석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선후배라고 해도 보통 마운드와 타석에서 적으로 만난다면 나오기 힘든 공손함이었다.
배트를 살짝 움켜쥐었다. 내가 약한 것은 95마일을 넘어가는 빠른 공이다. 이제 막 빅리그에 진입한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선배로서 오늘은 메이저리그의 쓴맛을 보여줘야할 것 같았다.
[투수 초구 와인드업에 들어갑니다.]
뚱뚱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유연하게 움직인 녀석의 손끝에서 공이 날아들었다.
부웅0!!
“스트라잌!!”
94마일? 직전 이닝 89마일에서 91마일의 공을 뿌리던 녀석이 갑자기 94마일짜리 속구를 던져냈다. 이전과 똑같은 폼 똑같은 타이밍으로 말이다.
[류형준 선수!! 갑작스러운 94마일 속구!! 직전 이닝보다 구속이 무려 3마일이나 증가했어요.]
‘짜식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준다 이거네.’
당황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설마 4월 초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전력에 가까운 공을 대뜸 초구로 뿌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 형준의 완급조절은 야구를 보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을 만큼 유명한 능력이었다. 다시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섰다. 형준의 뚱한 표정 사이에 은은한 승부욕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제2구.
뻐엉!!
존 밖으로 벗어나는 슬라이더를 골라냈다. 그리고 세 번째.
딱!!
힘차게 휘두른 배트가 녀석의 공을 두들겼다.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우익수인야시엘 푸이그가 짐승 같은 속도로 공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쉽게 파울폴대를 스친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아!! 강진호, 잘 받아쳤습니다만 아쉽게 폴대를 벗어났네요.]
[어제 경기도 그렇고, 강진호 선수 바뀐 타격폼이 굉장히 파워풀합니다. 정말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다 넘겨버리겠다는 기세예요.]
볼카운트 1-2. 형준이가 네 번째 공을 던졌다.
‘체인지업.’
쳐봤자 땅볼이라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체인지업이었다. KBO라는 리그를 그야말로 잘근잘근 씹어먹었던 투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믿고 던질 수 있는 결정구. 코스 역시 얄미우리만큼 절묘했다. 카운트에 여유만 있다면 그대로 보내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다.
‘쳐낸다.’
살짝 올라간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크게 불어난 몸통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날아드는 공을 친다기보다 박살을 내겠다는 기세의 스윙. 더럽게 움직이는 형준이의 체인지업이 배트에 걸렸다.
딱!!
손맛이 좋지 않았다. 볼의 움직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더러웠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능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오직 힘을 채운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멀리서 빅리그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강진호 압도적인 파워!! 두 경기 연속 홈런포 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