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그리하여 마침내(3)
마운드의 슈어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이튼 커쇼에 이어 메이저리그 제 2의 투수로 자리잡고 있는 맥스 슈어저답지 않은 한숨이었다.
퍼버벙
요란한 폭죽들과 함께 시티 필드의 외야 중앙에 올라오는 빨간 사과. 벌써 오늘만 두 번째 광경이었다.
‘에휴, 예감이 안 좋더라니.’
잠시 타석에 서 있던 진호가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다른 타자들이 저런 짓을 했다면 당장에 엉덩이에 불을 내줬겠지만 진호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만할 자격이 있는 선수였다. 게다가 지금 이 홈런은 그에게 더욱더 특별한 홈런이니 말이다.
‘젠장, 앞으로 두고두고 자료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게 생겼네.’
뒤편 전광판에 700이라는 큼지막한 숫자가 씌여 있다. 메이저 역사상 단 세 명. 아니 배리 본즈의 경우 기록이 말소됐으니 두 명밖에 오르지 못한 700홈런의 고지에 지금 저 괴물이 올라왔다는 의미였다. 700개. 어마어마한 숫자다. 매년 35개의 홈런을 친다고 해도 20년이 꼬박 걸리는 수치. 그 터무니없는 기록을 저 괴물은 고작 19년 만에 해냈다.
[강진호!! 마침내 커리어 700번째 홈런입니다.]
[만 39세 324일. 루스보다는 168일. 행크 아론보다는 159일 늦은 나이입니다.]
[하지만 데뷔가 늦었던 만큼 메이저에서 뛴 기간으로 따지면 가장 짧은 기간입니다. 행크 아론의 경우 20번째 시즌에, 루스의 경우 21번째 시즌에 700홈런을 기록했었으니까요.]
[사실 오늘 선발로 등판한 슈어저 선수가 만만한 선수가 아니거든요. 올 시즌 가장 유력한 사이영 위너예요. 그런데 그런 선수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이라니. 역시 강진호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슈어저 선수가 좌타자에 조금 약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슈어저 선수치고 약한 거거든요. 당장 오늘 허용한 안타만 하더라도 강진호 선수의 2홈런을 포함해서 4개밖에 되지 않아요.]
[오늘을 끝으로 9경기 연속 원정에 들어가는 메츠!! 사실 700번째 홈런이 원정에서 나오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역시 강진호 선수!! 이렇게 홈팬들에게 선물을 남겨줍니다.]
-뉴욕 메츠 강진호!! 마침내 커리어 700홈런 달성!!-
-3년 연속 40+ 홈런 페이스!! 강진호!! 식지 않는 방망이-
<시즌 전에 그나마 중견 수비 때문에 쓰는 타자 코너로 보낸다고 투덜거렸던 자식 당장 튀어 나와. 지금 강진호 성적 보이냐?>
<강진호 좀 잘할 때마다 자꾸 나 부르는데 5월 달부터 쭉 반성하고 있다니까.>
<풀시즌 17홈런 치던 37세 타자의 반등? 강진호 약물설!!>
<저 자식은 또 나왔네. 진호가 약물은 무슨 약물이야. 요즘 빅리그 도핑 검사가 얼마나 빡빡한데. 2014시즌 진호가 받은 약물 검사만 8번이 넘고 심지어 겨울에는 극비로 훈련하는 곳까지 몰래 찾아와서 똥 받아갔다던데.>
<근데 나도 진짜 신기하긴 신기함. 솔직히 2013년만 하더라도 쭉쭉 떨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푸홀스만 보더라도 바닥 없이 떨어지고 있잖아.>
<푸홀스도 바닥없이 떨어진다고 하긴 그렇지. 걔도 작년에는 40홈런 쳤잖아. 강진호랑 푸홀스 보면 거의 비슷한 타입으로 변신했음. 완성형 타자에서 근력만 남긴 공갈포로. 근데 두 사람 차이는 강진호는 그래도 푸홀스보단 빠르다는 거지. 그냥 운동능력 차이임.>
<진짜 좋아하던 선수들이었는데 한명은 발바닥 부상, 한명은 발목 부상으로 이러는 거 보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나마 강진호라도 올시즌 반등해서 다행임.>
<강진호 반등한 거 보면 푸홀스도 반등할 수 있겠지?>
<푸홀스도 10년 계약 마지막 해 되면 FA로이드빨로 반등 가능함.>
<그러고보니 강진호 10년 계약 마지막이네? 은퇴 이야기 안 하는 거 보면 선수 생활 더 할 것 같은데 메츠랑 재계약 하겠지?>
***
“일단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목표는 월드 시리즈 우승.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즌 막판. 워싱턴 내셔널스를 잡아내며 승차를 벌리기 시작한 우리는 이어지는 경기들을 연달아 잡아내며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굳혔다. 그래서였을까? 포스트시즌 진출이 얼추 결정이 난 상황에서 언론은 나의 추후 거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안 된다. 너 계속 할 거면 내가 그만둘거야.”
나를 케어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가리비아는 나의 은퇴를 종용했고
“아무래도 할 거면 메츠가 낫겠죠. 얼마간의 돈보다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곳에서 마무리 한다는 것이 더 가치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계약액수가 곧 자신의 수익으로 직결되는 제프는 돈과 상관없는 방향을 권유했다.
“휠체어? 걱정하지마. 내가 요즘 운동 열심히 해서 자기 정도는 얼마든지 밀고 다닐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이 먹으면 허리가 안좋아서 그냥 걷는 것보다 휠체어 같은 거 밀면서 걷는게 그렇게 좋다더라.”
또한 재키는 나를 응원했고
“아빠, 거기에 사인 좀. 애들이 요즘 반에서 난리야. 아, 그리고 겨울에 일일교사로 학교 올 수 있지?”
하필 입학 시기와 나의 부진이 겹쳤던 아들 녀석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애초에 내가 죽음에서 돌아왔던 것은 오직 야구 때문이었다. 생의 두 번째 기회. 그 누구도 얻지 못한 이 행운 속에서 나는 내가 뛸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뛰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강진호 아직 은퇴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우선은 우승부터.-
-만 40세의 강진호 시장에 나올 경우 예상 금액은?-
-올 시즌 이후 CBA 룰 개정을 통해 개변이 예상되는 QO제도. 내년 QO(Qualifying Offer) 예상 금액은 1,700만 달러. 메츠는 강진호에게 QO를 제시할까?-
-익명의 메이저 관계자 ‘강진호에게 다년계약을 제시할 팀은 많습니다. 40홈런을 치는 골드글러브급 코너 외야수라니. 나이를 고려해도 단년이라면 2천만 달러의 가치가 충분하고 2년 3천만 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관건은 과연 강진호가 메츠 이외의 팀에서 뛰는가, 그리고 프리드먼이 얼마를 제시하느냐 라고 봅니다.’-
***
디비전 시리즈. 메츠의 상대는 몇 년째 꾸준하게 지구 우승을 거듭하고 있는 메이저 두 번째의 고액연봉팀 LA다저스였다. 최고의 팜에서 키워낸 훌륭한 자원들과 높은 페이롤을 바탕으로 한 고액연봉자들이 어울렸다. 다저스는 분명 꾸준히 지구 우승을 노릴만한 팀이었다.
딱!!
[쳤습니다!! 프레스톤 윌슨!! 우중간 높게 뜬 타구!! 우익수 푸이그가 잡아냅니다.]
[강진호 달립니다!! 3루의 강진호!! 여유롭게 홈으로. 프레스톤 윌슨의 희생플라이. 메츠가 1점을 더 달아납니다. 7:3.]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승리의 경험. 가장 중요한 무대 마지막까지 서 있었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다른 팀에서 각자 따로 경험했던 선수들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조금 부진하긴 했습니다만 메츠의 선수단을 보면 21세기 메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이 그대로 있거든요. 큰 무대에서 뛰었던 경험이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가 없어요.]
[메츠가 21세기 들어와 16년 동안 총 열두 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우승만 여덟 번을 했거든요. 역사상 포스트시즌에 이토록 강했던 팀은 1921년부터 62년까지의 그레이트 양키스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우승의 유전자라고 말하는 그 경험은 단순히 선수단의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런트, 코치진, 선수단. 심지어 클럽하우스에서 잡일을 해주는 클러비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움직여본 집단의 힘은 절대 작지 않았다.
다저스 그리고 시카고 컵스. 내셔널리그 빅마켓 구단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여긴 진짜 오래간만이네.”
“뭐, 가깝고도 먼 이웃이니까.”
우리의 열 번째 반지를 가로막은 마지막 상대는 다름 아닌 양키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월드시리즈를 가지고 간 팀이자, 유일하게 우리보다 많은 반지를 가진 요기 베라의 팀이었다.
이번 시즌 올스타전에서 패배했던 탓에 월드시리즈의 개막전이 열린 곳은 양키 스타디움이었다. 수많은 관중으로 가득한 스타디움. 프레스톤이 웃었다.
“진호야. 우리 진짜 열심히 뛰긴 뛰었나 보네.”
녀석의 웃음 너머 양키 스타디움의 관중석이 보였다. 포스트시즌이었다. 시즌권을 가진 회원들에게 우선으로 판매하는 포스트시즌 티켓이다. 옥션등을 통해 따로 구매하려고 해도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관중석 중간중간 양키스의 검은 줄무늬들 사이로 뚜렷하게 메츠의 회색 원정 유니폼과 메츠의 파란 줄무늬가 눈에 띄었다. 적지 않은 숫자다.
“그러게. 우리 진짜 열심히 뛰었나 보다.”
2000년대 초반. 셰이 스타디움의 한쪽을 통째로 차지했던 양키스 줄무늬 놈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그로부터 약 15년. 이제 그 입장이 반전됐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야, 저기 저거 봐라.”
“어?”
관중석의 어느 곳. 기다란 플랜카드에 아홉 개의 반지. 그리고 열 번째에 요기 베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저거 우리한테 열 번째 반지 따오라 그 소리 하는 거 맞지?”
“그러게.”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양키스는 강력했다. 2005년의 그 충격적인 사기행각으로 유망주들을 긁어모았던 녀석들은 지난 2007년과 2012년 두 차례나 우승을 차지했고 그것은 21세기 메츠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우승 횟수였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디트로이트 사상 최고의 투수로 활약하고 있어야 할 6회에도 100마일을 던져대는 강속구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구속의 시대에 가장 걸맞은 에이스. 저스틴 벌렌더.
뻐엉!!
월드 시리즈 1차전에 걸맞은 전력투구가 시작됐다. 97마일의 빠른 공. 올 시즌 반등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약한 공은 제구가 완벽하게 된 95마일 이상의 빠른 공이였다. 다행이라면 아무리 메이저리그라고 해도 그런 공을 뻥뻥 던져대는 투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 정도였는데 불행히도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 얼마 안 되는 투수 중 하나였다.
부웅!!
우완 투수의 슬라이더. 심지어 97마일 포심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슬라이더였다. 메츠의 타자들이 연달아 무너졌다.
다만 양키스의 타선 역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뻐엉!!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선발 투수. ‘토르’ 노아 신더가드의 100마일 속구 덕분이었다. 팽팽한 투수전이 쭉 이어졌다.
“어?”
그리고 우리의 공격이닝. 타석으로 들어서는 나의 얼굴이 나오던 전광판에 다른 누군가가 잡혔다.
[하하, 모처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월드 시리즈 개막전!! 2년 전 은퇴한 캡틴도 참석했군요.]
[얼마 전 인터뷰에서 캡틴이 그랬다죠? 메츠와 월드 시리즈에서 붙을 줄 알았으면 2년 더 뛰었을 거라고 말이죠.]
[중간중간 비속어가 조금 더 섞여 있긴 했었습니다만 대충 그런 뜻이었죠. 데릭 지터 선수 입장에서는 번번이 양키스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메츠가 곱게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2014년 은퇴 때도 2013년의 우승과 라이벌이던 강진호 선수의 부진이 없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저 자식은 여전히 뺀질뺀질해 보이네.’
내야 뒤편의 VIP룸에 앉아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데릭 지터. 본래 역사의 영광까진 아니었지만 3개의 우승 반지를 차지한 양키스의 캡틴이자 90년대를 풍미했던 3대 유격수의 유일한 생존자로 커리어를 마감했던 녀석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불쑥 그 편안한 얼굴에 불편함이 깃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것은 악감정이라기보다 뉴욕을 대표하는 선수로 꼽혔던 시절의 라이벌 의식이 고개를 들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7회 초. 마운드에는 이미 100개에 가까운 공을 던졌음에도 지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벌렌더의 두툼한 상완근이 꿈틀댔다.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