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08화 (208/210)

# 208

그리하여 마침내(4)

세상에 지치지 않는 인간은 없다. 7회에도 100마일을 던지는 괴물? 물론 벌렌더는 그런 투수였다. 하지만 그것은 힘을 아끼고 적절한 순간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가능한 이야기였다. 1회부터 97마일 98마일의 공을 던져댄 저스틴 벌렌더에게 더는 7회 100마일의 공은 없었다. 물론 97마일만 하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인 공이였다. 애당초 선발투수가 6이닝 내내 저런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꾸준히 지켜본 97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 날아들었다. 사실 포심 패스트볼이라 확신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투심 일지도, 어쩌면 슬라이더나 커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망설임은 사치였다. 타이밍에 맞춰 올라간 오른발이 바닥을 밟았다. 발끝에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둔근의 강력한 지지 아래 상체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체중 이동으로 인한 무릎과 발목의 아릿한 통증이 뇌를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제는 일상과도 같은 통증이다. 자세는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딱!!

손끝이 아릿하다. 과거 가장 좋던 시절. 가장 절절한 타격을 했을 때의 끝내주는 손맛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씹으면 된다. 비록 그렇게 상해버린 잇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만 말이다.

[강진호!! 쳤습니다!! 잘 맞은 타구!!]

시즌 중반 트레이드를 통해 양키스에 자리를 잡은 마크 트럼보가 타구를 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긴장감은 없었다. 1루를 향한 발걸음에 힘을 더한다. 전광판에 1루 베이스를 향해 달리는 나와 VIP석 밖으로 상체를 내민 데릭 지터의 모습이 교차했다.

[너, 넘어갔습니다!!]

[0:0 팽팽한 승부를 깨트리는 강진호의 솔로 홈런포!! 7회 초 강진호가 홈런으로 선취점을 뽑아냅니다.]

덕아웃에 초조하게 앉아있던 노아 신더가드가 잇몸을 드러내고 크게 웃는다. 선발투수의 스탯 중 승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선발투수를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은 자신의 승리였다.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던 프레스톤이 주먹을 내밀었다. 그 내밀어진 주먹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갖다 댔다.

“흥, 약삭빠르게 선수 치기는.”

“그러게 누가 뭉그적거리래?”

프레스톤이 나지막하게 혀를 차며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다시 달려 나올 준비나 하라고. 멋지게 담장 밖으로 날려 줄 테니까.”

“헛스윙 삼진이나 조심하라고.”

프레스톤의 방망이가 벌렌더의 공을 후려쳤다. 그가 호언장담하던 것처럼 홈런이었다.

[프레스톤 윌슨의 백투백 홈런!!]

[이번 포스트시즌. 메츠의 왕조를 만들어낸 두 선수가 나란히 대활약을 보여줍니다!! 사실 메츠 하면 강진호 선수이기는 합니다만 프레스톤 윌슨 선수도 절대 만만한 선수가 아니에요. 최근 3년간의 성적만 보면 더 위협적인 타자는 오히려 프레스톤 윌슨 쪽이거든요.]

[맞습니다. 강진호 선수에게 조금 가린 감이 있고, 임팩트에서 조금 부족하긴 합니다만 누적만 보면 프레스톤 윌슨 선수 역시 정말 대단한 선수거든요.]

[자, 양키스의 불펜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7회 초 2:0. 노아 신더가드 선수의 공이 매섭기는 합니다만 양키스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양키스의 풍부한 자금력과 06년의 유망주 싹쓸이에 가려 돋보이진 않았지만, 브라이언 캐시맨은 유능한 단장이었다. 라루사이즘 이후 강조된 것은 유능한 선발투수였다. 그것은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두 이후로 심화됐다. 리그를 압도하는 유능한 선발은 희귀하다. 선발이 되지 못한 투수들은 불펜으로 소모한다. 이것이 최근의 메이저리그를 지탱한 대전제였다. 하지만 캐시맨은 알고 있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저평가된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불펜의 시대.’

그렇기에 이번 시즌 양키스의 진정한 힘은 캐시맨이 긁어모은 불펜들이었다. 하지만 덕아웃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감독을 욕할 일은 아니었다. 저스틴 벌렌더라는 위대한 투수가 6이닝을 완벽하게 막는 상황에서 7번째 이닝에 불펜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에 더해 오늘 100마일을 던져대는 선발투수 노아 신더가드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양키스의 불펜이 나머지 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지만 결국 승리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월드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 메츠의 2:0 승리!!-

스포츠에서 기세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물론 정신이 육체를 넘어서는 것은 판타지다. 하지만 육체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 주는 것은 역시 정신이었다.

“영감님들 이제 슬슬 끝물인데 10번째 끼워 드려야지.”

이제는 팀의 중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호세 레예스가 특유의 건방짐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팀의 실질적 군기반장인 데이비드 라이트는 선수 하나하나의 등을 두들기며 이제 고작 3번밖에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2차전, 1차전의 기세를 그대로 살린 우리가 6:4로 승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시티 필드의 3연전. 본래 역사보다 1만 2천 석이나 더 크게 지어진 시티 필드가 메츠의 푸른 줄무늬로 가득 찼다. 좌석의 1/3을 양키스 놈들에게 내줬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야, 들었냐?”

“뭐? 암표가 장당 천 달러씩 한다는 거?”

“이거, 이거 소식이 좀 느리구만. 옥션에 4차전 암표 값은 이미 2천 달러를 돌파했어.”

“그거참 감동적이네.”

우리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천 달러를 아끼지 않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물론 그렇다고 어깨가 더 무거워지지는 않았다. 이런 일 하나하나에 어깨가 더 무거워지기에는 이미 짊어진 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지금 몸은 좀 어때?”

“어떻기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은 정도지. 오늘도 재키가 마사지해줘서 겨우겨우 일어난 거야.”

“부러운 자식. 넌 진짜 장가 잘 간 거다.”

“장가도 안 간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아?”

“잘 아니깐 장가를 안 간 거야 인마.”

시리즈 스코어 2:0. 그리고 홈 경기. 프레스톤과 쓸데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몸을 풀었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몸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나마 중견수가 아닌 좌익수로. 심지어 체력적인 부분까지 배려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라는 것은 조금 슬펐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난 아직 달릴 힘이 남아있다.

3차전 양키스의 마운드에 CC 사바시아가 올라왔다. 01년 클리블랜드에서 데뷔했던 특급이었던 투수. 올해 35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노쇠화로 인해 이제는 전성기의 기량을 거의 잃어버린 녀석이었다.

딱!!

메츠 타자들의 방망이가 연달아 돌아갔다. 그것은 말 그대로 폭격이었다. 1회 말 무려 7점을 내주며 일찌감치 마운드를 내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기량이 완전 떨어지기 전에 은퇴해서 팔자 좋게 VIP석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지터 녀석의 모습과 대비되는 사바시아. 그토록 잘나가던 투수의 몰락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됐다.

‘아니야. 난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1회 말. 사바시아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온 마이클 피네다. 하지만 녀석이라고 딱히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안타. 홈런. 안타. 그리고 또 안타. 메츠의 타선이 양키스의 투수들을 짓밟았다. 물론 양키스의 타자들이라고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두 번의 패배. 그리고 1회에 기선을 제압당한 그들의 덕아웃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졌다.

-강진호 멀티 홈런. 4타수 2안타 2홈런!! 월드 시리즈 3차전 최고의 활약!!-

-강진호 클래스를 증명하다!!-

-메츠 3차전 13:4 완승!! 파죽의 3연승!!-

그리고 대망의 4차전. 양키스 놈들의 검은 줄무늬는 보이지 않았다. 최고 2,500달러의 표값을 지불하고 들어 온 팬들로 가득 찬 구장은 온통 우리 메츠의 팬들로 가득했다. 1패가 더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벼랑 끝 상황. 양키스의 마운드에는 벌렌더가 올라왔다.

1회 말 1아웃 주자 1. 3루.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1차전 굳건해 보이던 벌렌더의 몸이 처량했다. 월드 시리즈 4차전 벼랑 끝 상황. 아무리 멘탈이 좋은 투수라고 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벌렌더는 고작 4일을 쉬고 등판했다. 97마일을 넘나드는 그의 구속 역시 95마일 남짓으로 떨어진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공을 움켜쥔 그가 홈플레이트를 향해 공을 뿌렸다. 이를 악물고 던진 공이였다.

하지만 나흘 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둔 공이였다. 심지어 구속조차 그때보다 느리다. 나의 눈에 벌렌더의 공이 똑똑하게 보였다.

딱!!

[강진호!! 강진호!! 홈런, 홈런입니다!!]

고작 1회 말. 하지만 높게 떠오른 공을 보는 순간 끝났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몇 시간 뒤 현실이 됐다.

-강진호 1회 말 승부를 결정짓는 3타점 결승 홈런!!-

-승리!! 또 승리!! 뉴욕 메츠. 월드 시리즈 4:0 완승!!-

-월드시리즈 MVP 강진호!!-

-강진호, 프레스톤 윌슨!! 마침내 요기 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

-뉴욕 메츠!! 21세기 가장 위대한 왕조를 건설하다.-

강진호 2016시즌.

137경기 511타수 142안타(2루타 21개 3루타 1개) 41홈런 49볼넷 3도루 1도루실패 0.278/0.343/0.564. 올스타 그리고 좌익수 골드글러브.

***

-3309안타 715홈런 그리고 496도루. 이제 타석 하나하나가 마일스톤!! 남은 것은 투표율뿐!! 명예의 전당에 이미 이름을 새겨놓은 살아있는 전설 강진호!! 그의 남은 행보는?-

-은퇴? 이적? 연장계약? 강진호 2017년 거취는?-

-만 40세 타자 강진호의 가치는? 최소 2천만 달러부터.-

-16시즌 반등에 성공한 강진호. 텍사스와의 링크설!!-

무릎과 발목은 이미 한계였다.

수술? 만으로 40살이다. 지금 수술은 곧 은퇴를 의미했다.

“메츠에서는 단 년 1,700만 달러를 제안했습니다.”

“2년 이상은요?”

혹시나 하는 나의 질문에 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나의 몸 상태에 관해서는 프런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연장계약이 들어온 것 자체가, 그리고 QO를 제시하지 않은 것 자체가 나에 대한 예우였다.

물론 나의 답변 역시 뻔했다.

-강진호 뉴욕 메츠와의 1년 1,800만 달러 재계약-

CC사바시아와 데릭 지터의 상반된 모습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인생의 마지막 순간 배트를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몸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나는 치고 달리고 던지고 잡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가장 재밌는 공놀이를 즐길 것이다.

바로 이곳. 세계 최고의 공놀이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메이저리그에서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