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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화 (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화

Prologue.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전에 살던 곳의 화장실 크기만 한 반지하 원룸도.

생활비를 위해선 당장 다음 주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하는 것도 다 좋았다.

그 지옥 같은 집을 벗어나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숨소리 하나 내지 말고 죽은 듯이 살라고 했을 텐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게로 향해진 혐오스러운 눈빛이 꼭 흉측한 벌레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황태자의 귀환 연회에서 광견처럼 날뛰었다지?”

당장이라도 밟아 죽이고 싶다는 음험한 살기가 담긴 눈빛은 익숙했다.

그 집에서 늘 겪었던 종류였으니까.

그러나 경험이 많다고 괜찮을 리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시퍼런 안광에 숨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입술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 줄줄이 적혀 있는 글씨들.

1. 난들 알아?

2. 아무 생각 없었는데요?

3. (비굴한 목소리로) 그게……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입을 열어 이게 무엇이냐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마개로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파란 눈의 남자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압박했다.

“입, 여는 게 좋을 텐데.”

피부가 따가울 만큼의 살기가 느껴졌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3번을 눌렀다.

“그게…… 그러니까…….”

내 입에서 네모 창 안에 나타난 선택지와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내가 말하고도 거짓말 같아서 나는 바보처럼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눈을 뜨니 낯선 곳에 누워 있었고, 갑자기 살벌한 기운을 흩뿌리며 들이닥친 낯선 이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잠에서 방금 깬 듯 정신이 혼몽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다음.”

대충 얼버무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자가 무서운 얼굴로 다음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자 허공에 뜬 네모 창 안에 다른 내용의 글씨들이 스르륵 나타 났다.

1. 죄송해요. 자중할게요.

2. 멍청한 하녀가 내게 먼저 실수를 했다고요.

3. 천것들이 나를 무시했어요. 에카르트의 하나뿐인 공녀인 이 나를 말이에요!

가만히 앉아서 무슨 일인지 머리를 굴릴 시간 따윈 없었다.

남자의 눈치를 보며 허겁지겁 선택지를 골랐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그간 뼛속까지 새겨진 학습 결과였다.

“죄송…….”

“알량한 사과로 끝날 일이었으면 이렇게 내가 너와 마주 보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재빨리 1번을 선택한 것이 무색할 만큼 곧바로 말꼬리가 잘렸다.

칼처럼 찌르는 듯한 어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남자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페넬로페 에카르트?’

“당분간 네게서 에카르트의 성을 회수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과 대사였다.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정신이 없어 미처 보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이 좀 더 선명히 보였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남자는 ‘그 집 인간들’ 중 한 명이 아닌, 생판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바다를 담은 듯한 새파란 눈동자, 흑요석을 저며 놓은 듯한 검은색 머리칼.

그 위로 휴대폰 배터리 표시와 비슷한 길쭉한 바(bar)와 흰 글씨가 반짝반짝 빛났다.

‘호…… 감도……?’

내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남자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글씨는, 호감도였다.

“연회는 물론, 방 밖으로 나가는 것 또한 금지다. 근신하는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반성…….”

“…….”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빗겨간 내 시선에 무표정했던 남자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확 구겨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 반응할 새 없이 몇 번이고 남자의 머리 위를 확인했다.

[호감도 0%]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미쳤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내 이상 행동에 남자는 경멸 어린 눈으로 잠시 노려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

한시도 같이 있기 싫다는 듯 문으로 향하는 걸음이 분주했다. [호감도 0%]가 멀어진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데?’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무슨 일인지 생각할 때쯤이었다.

한쪽에서 피식, 하는 인기척이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리니 분홍빛 머리를 가진 남자가 문 옆 그늘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앞서 나간 남자와 같은 새파란 눈동자. 그 안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호감도 - 10%]

머리 위에 새하얀 글씨가 반짝였다.

무려 마이너스.

“병신. 꼴좋다.”

예쁘장한 외형과는 달리 험악한 욕설을 뇌까린 그는 앞서 나간 남자를 따라 몸을 돌렸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모두가 사라진 적막한 방 안에 홀로 남은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나는 내가 있는 이 공간, 그리고 아까까지 여기 있던 남자들이 초면임에도 묘하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짓말이지……?”

혼자 남겨지자 그제야 누가 성대를 조이듯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기에.

“그럴 리가 없잖아.”

잠들기 직전까지 하고 있던 게임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현실처럼 재생될 리 없지 않은가.

그것도 내가 그 당사자 중 한 명이 되어서.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뜯고 얼굴을 꼬집어 봐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페넬로페 에카르트.

최근 가장 유행하는 여성향 공략 게임 속 악역이자, 하드 모드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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