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4화
분홍 머리는 방문을 향해 세차게 고함쳤다.
얼마 안 가 집사와 몇몇 고용인들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둘째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 계집, 끌고 가서 가둬.”
“도, 도련님! 죄송해요! 도련님! 도련님!”
아침부터 내내 성질을 돋우던 하녀는 까딱이는 고갯짓 한 번에 쉽게도 끌려 나갔다.
나는 요동치는 위장과 목구멍을 다스리기 바빠 그 소란스러운 일련의 과정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 힘없이 늘어져 있는 내게 분홍 머리가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어깨를 흔드는 손길이 퍽 조심스러웠다.
“야. 괜찮냐?”
“…….”
“그러게 이런 걸 왜 주워 처먹고 앉았냐? 평소처럼 상을 뒤엎고 꽥꽥 소리나 지를 것이지, 병신.”
약을 올리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분홍 머리는 게임 속 캐릭터 성격과 똑같이 밉살맞게 이죽댔다.
‘안 먹었으면 네가 꽂은 포크에 목이 꿰뚫려 죽었겠지.’
불쑥 짜증이 났다.
놈에게 톡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빌어먹을 선택지 없이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후…… 이제 다 끝난 거겠지?’
생각지도 못한 놈의 도움으로 전담 하녀와의 줄다리기를 수월히 정리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도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팔뚝이 바늘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질 동안, 악역을 괴롭히는 고용인이 저 하녀 하나뿐이었을까?
‘아니.’
전담 하녀는 극히 일부일 것이다. 이 공작가 전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악역을 찍어 누르려 들었겠지.
그리고 그 정점에는 내 앞에 서 있는 놈의 묵인이 존재해 왔을 것이다. 악역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설정이니까.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현듯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야. 너 낯빛이 너무 안 좋은데.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끝내 대답 없는 내 모습이 영 찝찝했는지, 분홍 머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허리까지 숙인 채 손으로 가린 내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 꼭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다시 하얀 네모 창이 나타났다.
1. 신경 꺼.
2. 네가 뭔 상관이야? 내 방에서 꺼져!
3. 착한 척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이런 와중에도 죽지 않기 위해 신중히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현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게임 제작자가 준비한 미쳐 버린 선택지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무난한 말을 선택했다.
“신경, 꺼…….”
지금 내 심정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대사였기에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기를 내리누르기 바빠,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영 힘이 없었다.
“너…….”
내 말을 알아들은 분홍 머리는 일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다시 본 놈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정신이 없어서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
“그래. 거지처럼 아무거나 주워 처먹고 뒈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내 상태를 살피느라 숙였던 허리를 도로 편 놈이 듣기 싫은 말을 지껄였다.
“너 따위에게 귀한 시간을 내줄 의원 또한 에카르트에 없다.”
쿵, 쿵, 홱 몸을 돌려 방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못 사나웠다.
멀어지는 분홍 머리 위로 하얀 글씨가 반짝였다.
[호감도 -3%]
호감도가 상승했다.
어제 게임으로 봤을 때는 분명 -10%였다. 1, 2% 올리기도 힘겨운 하드 모드치고 대폭 상승이었다.
‘이렇게 성과가 클 줄 알았으면 게임할 때 진작 이 에피소드부터 깰걸…….’
하지만 나는 딱히 호감도가 올랐다는 것이 기쁘거나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마이너스는 마이너스였다.
* * *
한바탕 속을 게워 낸 나는 비척거리면서 숙였던 상체를 들었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군 후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창백한 낯빛의 아리따운 소녀가 보였다.
“페넬로페.”
그토록 말하고자 할 땐 신음 하나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혼자 있으니까 잘도 흘러나왔다.
내가 입을 열자, 거울 속에 비친 여자도 따라 입을 열었다.
커다란 청록색 눈동자가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진달래꽃을 연상케 하는 진분홍빛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탐스럽게 굽이치는 화려한 미인.
어딜 봐도 내 얼굴이 아니었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에카르트…… 하.”
‘에카르트’는 게임 속 세계 ‘잉카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가의 이름이었다.
나는 하드 모드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어제 겪은 에피소드, 그러니까 공작의 첫째 아들에게서 근신형을 받기까지 여러 차례 죽었다.
악역이었던 캐릭터 성격을 고려하여 막 나가는 대답들만 골랐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죽는 것에 오기가 나서 여러 차례 도전해 보지 않은 채 잠들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 생각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 예쁘긴 겁나 예쁘네…….”
일러스트로 볼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본 페넬로페의 얼굴은 이 세상 미모가 아니었다.
독립하기 이전이었다면 나는 분명 신이 나서 페넬로페의 외모를 찬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가엾은 내게 신이 새로운 삶을 내려 준 것이라 여기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망할 집구석에서 버티고 버텨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거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알아주는 명문대에 합격했다.
좁고 지저분했지만, 온전히 쉴 수 있는 내 집도 생겼다.
두 개새끼들에게서 벗어난 내 앞에는 창창한 미래를 향해 도약할 일들만 남아 있었다.
사소한 것마저 모조리 죽음으로 이어지는 페넬로페의 처지는 앞으로의 내 인생에 비해 나을 것이 하등 없단 소리다.
아무거나 눌러도 꽃길만 걷던 노멀 모드의 주인공이면 또 모를까.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하필,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막 벗어난 내게.
“대체 왜!”
쾅-!
세면대를 내리치며 나는 절규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의 고운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분명 절규를 하는 것임에도 슬픔보단 표독스러워 보이는 것이, 과연 게임 속 최고의 악역다웠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페넬로페에 대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략 게임 속 악녀이자, 하드 모드의 주인공.
본래 페넬로페는 성(姓)이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보따리상인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이곳저곳 떠돌며 자란 페넬로페는, 어느 날 잃어버린 막내딸을 애타게 찾던 공작의 눈에 띈다.
그리고 마침 지병이 있던 홀어머니마저 죽자, 에카르트 공작가에 입양됐다.]
그녀가 에카르트의 하나뿐인 공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잃어버린 공작의 막내딸이랑 비슷한 외양 덕분이었다.
죽은 공작 부인에게 물려받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에카르트 혈통의 상징인 푸른색 눈동자.
나는 아까 전의 소동에서 보았던 공작의 둘째 아들을 떠올렸다.
그의 머리는 사랑스러운 핑크빛이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여인의 진분홍빛 머리칼은 핑크색보단 차라리 붉은색에 가까웠다.
게다가 에카르트의 새파란 눈동자와는 미묘하게 다른 청록색 눈동자.
“찾는 김에 친딸이나 더 찾지, 왜 애먼 애를 데리고 와서.”
막상 데리고 온 페넬로페가 자랄수록 친딸과 외양이 달라지자, 공작은 금세 흥미를 잃고 방치한다.
관심을 잃은 페넬로페에게 남겨진 건 두 오라비와 고용인들의 학대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비슷하네…….”
페넬로페가 입양되기 전과 후의 행적이 묘하게 나랑 비슷했다.
게임을 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기시감이었다.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가짜 공녀.’
공작가에서 일하는 모든 고용인들은 페넬로페를 가짜라 불렀다.
페넬로페는 그 자체로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어정쩡하게 비슷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그나마 애교스럽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하필이면 성격도 개차반이었다.
게임의 프롤로그에서 서술하기를, ‘모든 이들에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며,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고 패악을 부려 왔다.’고 한다.
“어쩐지 선택지가 하나같이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더라.”
나는 지금까지 나왔던 미쳐 버린 선택지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페넬로페는 이름부터가 엄청나게 세 보이는 악녀였다.
순진하고 청순한 노멀 모드 여주와는 달리 생긴 것도 사나웠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페넬로페가 이해가 되었다.
오늘 하루. 그것도 단 몇 시간 겪었지만, 그간 공작가에서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가짜라 해도 그렇지.’
공작이 직접 데리고 와 정식으로 가문에 입적된 애를 어떻게 바늘로 찔러 깨울 수 있단 말인가?
같은 하녀끼리도 그런 몰상식한 방법으로 잠을 깨우진 않을 것이다.
페넬로페가 공작가로 입양된 건 고작 12살 때의 일이었다.
만약 그때부터 이런 학대가 계속되어 왔다면…….
아무리 소리쳐도 제 말을 듣지 않는 어른들에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만들어진 악역이라 이건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행해 온 그녀의 패악질들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유독 페넬로페에게만 자비가 없었고, 그녀를 죽이는 손길은 가차없었다.
“좀 불쌍하네.”
나는 손을 들어 페넬로페의 가녀린 뺨을 쓰다듬었다.
거울 속에 비친 예쁜 진분홍빛 머리카락이 참으로 서러워 보였다.
그러나 잠깐 든 동정은 이내 집어치웠다.
“하, 누가 누굴 불쌍히 여겨.”
한가하게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페넬로페는 나였다.
다시 말해, 나는 수없이 죽었던 게임 속 페넬로페처럼 앞으로 남주들의 손에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