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5화
욕실을 나온 나는 서둘러 펜과 종이를 찾았다.
페넬로페가 된 이상, 어찌 됐건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이 게임의 하드 모드는 애써 올려 놓은 호감도가 떨어지기 쉬웠고, 마이너스가 되면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미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공작의 차남은 더 심했다. 0% 이상에 이를 때까지 플러스 되지 않으면 무조건 죽음이었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게임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가짜 공녀임에도 갖춰질 것은 다 갖춰져 있었다.
드넓은 방 한편에 고급스러운 책장과 책상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어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분주하게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우선 등장인물.”
게임의 메인 남자 주인공들은 총 5명이었다.
공작의 아들 두 명과 황태자, 마법사, 기사.
‘30%’가 기본으로 주어졌던 노멀 모드와는 달리, 하드 모드에서는 모든 메인 남주들의 호감도가 0% 혹은 마이너스로 시작됐다.
나는 우선 백지에 기억하는 것을 모조리 적기 시작했다.
먼저, 데릭 에카르트.
공작의 장남이자 소공작인 데릭은 전형적인 귀족 남자였다.
그는 가문을 잇기 바빠 페넬로페에겐 대체적으로 무관심했다.
하지만 기저에는 여동생의 자리를 차지한 그녀를 향한 짙은 혐오와 경멸이 깔려 있었다.
데릭은 게임에서 페넬로페를 직접 죽이는 일이 드물었지만,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가차 없이 벌을 내렸다.
그러면 플레이어에게 패널티가 주어지고 선택이 제약됐다.
어제 받은 근신형으로 인해 내가 지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음. 차남 레널드 에카르트.
얘는 뭐,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괴팍하고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진 행동파로 페넬로페만 보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바쁜 놈이었다.
공작가 내에서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데 가장 앞장서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그녀를 매번 어이없는 사고로 죽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렇게 두고 보니 우리 집 개새끼들이랑도 얼추 비슷하잖아?”
나는 종이 위에 적어 둔 공작가의 아들들에 관한 정보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며 혀를 찼다.
노멀 모드에서는 이 둘의 루트가 가장 깨기 쉬웠다.
왜냐면 여주인공과 혈연 관계인 탓에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가족애’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페넬로페는 둘과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기에 화목한 가족이 되어 끝나는 노멀 모드와는 또 다른 엔딩을 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애써 쓴 것이 무색하게 놈들의 이름 위에 커다랗게 엑스 자를 그었다.
“이 새끼들은 가망이 없어.”
레널드는 심지어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시작한다.
0도 아니고 무려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왜 마이너스겠는가.
그것은 바로 제작자의 안배였다.
애당초 가망이 없으니, 레널드와의 엔딩을 보는 것은 포기하라는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나는 ‘오빠’라는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는 사람이었으므로, 두 놈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다음, 황태자.”
황태자, 칼리스토 레굴르스.
사실 황태자에 대한 정보는 노멀 모드에서 얻은 것이 전부였다.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생명을 경시하게 된 폭군이 천사 같은 여주를 만나 갱생한 후 악역이었던 페넬로페를 처단한다.
이렇게 보면 정의구현이나 다름없지만, 페넬로페의 입장에서 황태자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하드 모드를 플레이하는 동안 그는 페넬로페를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죽이는 인물이었다.
황태자 루트를 진행하는 동안 하도 리셋을 많이 한 탓에 뭐가 있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이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자.”
칼리스토가 뽑아 든 칼에 여러 번 목이 잘리는 적나라한 일러스트가 생각났다.
목덜미를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찍찍. 나는 황태자 위에 엑스를 여러 번 그었다.
그리고 황급히 다음 남주로 넘어갔다.
다음은 뷘터 베르단디. 마법사이자 후작이었다.
마법사 설정이 뻔히 그렇듯 괴짜 같은 면모가 있어 후작임을 숨기고 상단을 운영한다.
그는 각종 정보와 암시장에 돌 만한 비밀스러운 물건을 거래하는데, 그 덕에 여주가 공작가의 잃어버린 막내딸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이후에도 악역이 꾸미는 흉계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여 여주에게 언질을 주거나 직접 위험을 차단한다.
이외에도 여주의 명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인물이었다.
뷘터는 노멀 모드에서 로맨틱한 마법을 선보이며, 물밑으론 여주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스윗남이었다.
그러나 하드 모드에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뷘터 루트가 제대로 진행이 되기도 전에 황태자와 공작가의 아들들에 의해 죽기 바빴다.
어쨌든 엑스 친 놈들보단 가망성이 큰 편이라 일단 놔두기로 했다.
“마지막, 이클리스.”
공작가의 기사인 이클리스는 노예 출신이다.
밤마실을 나갔던 공작이 검술에 출중한 그를 눈여겨보고 비싼 값을 주고 데려와 가문의 견습 기사로 삼는다.
후에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작위까지 수여받는 자수성가형 ‘영 앤 핸섬 가이’의 표본이다.
이클리스는 현재 다섯 남주들 중 그나마 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노멀 모드에서 마지막까지 페넬로페를 동정한 유일한 남주였다.
한때 모시던 주인이었기 때문인지, 여주를 괴롭히던 페넬로페를 말리는 것도 가장 소극적이었다.
비록 하드 모드에서는 만나 보지도 못했지만…….
“하…… 이러고 보니 크게 도움될 만한 건 없잖아.”
다 쓰고 난 종이를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 진행이 번번이 막혀서 하드 모드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 잘 알고 있더라도 내가 지금 실제로 겪고 있는 이 현실에 게임 시스템이 얼마나 적용되는지 알 수 없어 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남주들의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과 엔딩을 봐야 하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
기한은 페넬로페의 성인식까지.
나는 그때까지 무조건 남주들 중 한 명의 루트를 깨야 한다.
왜냐하면, 공작의 진짜 딸이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페넬로페.’
그녀는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들이닥친 진짜 공녀로 인해 모든 것을 잃는다.
그것이 노멀 모드의 시작이었다.
그날까지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악역 노릇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여주에게 반한 남주들에게 죽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그전까지 다른 남주들의 손에 죽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죽을 순 없지.”
나는 암울한 작금의 현실에 이를 악물었다.
그래. 죽을 순 없었다.
간신히 그 망할 집구석에서 탈출한 참인데, 내가 어떻게 이깟 게임 속에서 죽는단 말인가.
“난 절대 안 죽어.”
아침 수업이 날 기다리고 있다.
기필코 살아서 원래의 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수차례 다짐했다. 어떻게서든 살아남겠다고.
그때였다. 똑똑-.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게임에 관한 정보들이 쓰여 있는 종이를 채 숨기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아가씨.”
등장한 인물은 머리가 희게 센 늙은 집사였다.
그는 안으로 더 들어오지는 않은 채 방 밖에 서서 방문 사유를 말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종이 안의 글씨가 보이지 않을 거리긴 했지만, 나는 그의 무례한 태도에 불쾌해졌다.
본가에서 살 적에도 집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 아저씨도 날 탐탁지 않게 여기긴 했지만, 내 방문을 아무렇게나 벌컥벌컥 열어젖히진 않았다.
하물며 이곳은 민주주의 사회도 아닌, 철저한 계급주의 사회란 설정이 아닌가.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불현듯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나타났다.
1. (물건을 집어 던지며) 감히 허락도 없이 방문을 열어? 죽고 싶어, 늙은이?!
2.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 그래!
3. (5초간 사납게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알았어.
‘아.’
또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화도 마음대로 못 내는 처지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선택지처럼 극단적으로 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짜증스럽게 3번을 선택하며 생각했다.
호감도는 뭐든, 일단 이 빌어먹을 선택지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았어.”
때마침 공작이 찾는다니 다행이었다.
게임에 관해 정리해 둔 종이를 서랍 깊숙이 숨겨 둔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를 따라 방을 나섰다.
공작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게임 속의 단편적인 장면뿐이었으므로, 나는 공작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신중하게 저택을 둘러보았다.
공작가의 저택은 어디 근대 유럽배경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페넬로페의 방은 2층에 있었다.
하루가 시작되는 저택은 분주했다. 중앙 계단으로 이동하는 동안 황급히 복도를 오가는 고용인들을 꽤 많이 마주했다.
집사의 뒤를 쫓아 지나가는 나를 흘끗흘끗 곁눈질하는 시선들이 곱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태연히 그것들을 지나쳤다.
그깟 시선쯤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도 수없이 받았던 종류라 별로 간지럽지도 않았다.
나를 데리고 계단을 지나 1층으로 내려온 집사는 얼마 걷지 않아 화려한 방문 앞에 당도했다.
공작의 집무실인 것 같았다.
똑똑똑.
“공작님. 페넬로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끼익- 집사에 의해 문이 열렸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