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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7화 (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7화

끼익-.

문고리를 잡아 열고 복도로 나설 때까지, 뒤통수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집무실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공작은 호감도를 올려야 하는 대상도 아니었고, 성인식까지 아무나하고 엔딩을 깨면 더 볼일도 없는 인간이었다.

달칵, 나는 조심스럽게 공작의 집무실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쥐 죽은 듯이 살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헉!”

서늘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진 복도 맞은편에서 커다란 인영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호감도 0%]가 빛났다.

그림자와 동화된 듯 잘 보이지 않은 검은색 머리칼, 푸른 안광.

공작의 장남, 데릭이었다.

“에밀리.”

“…….”

“공작가에서 10년 가까이 일해 온 충실한 하녀지.”

뚜벅, 뚜벅. 데릭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널따란 복도를 단숨에 가로지른 남자는 내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그는 파란 눈동자를 내리깔고 고압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버러지라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분명 나는 잘못 하나 한 것 없는데, 쏟아지는 혐오와 경멸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웃돈을 더 얹어 주겠다는데도 아무도 네 전담 하녀 따윈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제 발로 먼저 네 비위를 맞추겠다고 자원했었지.”

“…….”

“그것도 오늘로 끝이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통에 하나 남은 하녀마저 내쫓았으니.”

나는 데릭의 말에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다.

내가 언제 내쫓는다고 날뛰었단 말인가?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해서 날뛴 건 분홍 머리였다.

‘오히려 그 썩은 음식들을 먹느라 이승에서 내쫓길 뻔했던 건 바로 나야!’

짜증이 나서 되는 대로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막은 것은 데릭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호감도 0%]였다.

‘참아. 저기서 더 떨어지면 바로 죽음이야.’

힘겹게 심호흡을 하며 짜증을 내리 눌렀다.

‘호감도 0%. 0%…….’

바로 전 공작에게 석고대죄를 하고 온 나는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더군다나 선택지를 끌 생각만 하고 있던 탓에게임에서 이 장면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 나는 침착하게 시스템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선택지 ON.’

1. 하! 그 계집이 오라버니의 밤시중이라도 들었나 보죠?

2. 그럴 만한 잘못을 했으니까 쫓겨나는 거겠죠.

3. (말없이 노려본다.)

빠르게 선택지들을 훑어본 나는 다급히 외쳤다.

‘선택지 OFF! OFF!’

〈SYSTEM〉 선택지를 [OFF]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나는 황급히 [예.]를 눌렀다.

게임에서 내준 미친 선택지를 골랐다간 바로 골로 갈 것이다.

내가 정신없이 내적 갈등을 겪는 동안 시간이 지체됐는지 나를 바라보는 데릭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하. 이젠 내 말이 아예 우습게 들리는 모양이야.”

찌르는 듯한 말에는 경멸을 넘어 살기까지 감돌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해요.”

이번처럼 하지도 않은 잘못을 빌어야 하는 일이 앞으로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는 사람이어서, 누군가에게 비굴하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건 어느 상황에서건 기분 더럽고 비참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놈들은 실제 사람도 아닌 게임 속 가상 인물들일 뿐이다.

- 저 계집애가 긁어서 상처가 났다고요, 아버지! 형!

- 역시, 생긴 것도 쥐새끼 같은 게 하는 짓도 천박하기 그지없네.

독립 전 이복 개새끼들과 함께 살아갈 적에, 나는 수없이 잘못을 빌었다.

대체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게임처럼 잘못을 빌지 않는다고 해서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꽤 어린 나이여서, 그 모든 상황들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손이 발이 될 때까지 빌고, 납죽 엎드려 살았다.

그에 비하면 페넬로페의 뒷수습은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정말로 패악질을 쳤지 않은가.

현실에서 이미 호되게 겪었기 때문인지, 잘못을 비는 것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게임 속은 되레 쉽게 느껴졌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기분 나쁘게 비슷해.’

나는 게임에 들어온 직후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동안 제 주제를 잘 몰랐어요.”

“……뭐?”

“제가 처신을 제대로 못 한 탓이니 그 하녀는 내쫓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께도 막 잘못을 빌고 나온 참이에요.”

내 말을 들은 데릭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살짝 커진 파란색 눈이 생소해 보였다. 공작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는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한번 읊고 온 대사라 그런지 반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는 쭉, 신경 쓰실 일 없이, 쥐죽은 듯 살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너무 영혼 없었나?’

내뱉고 나니 말투에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막장 같은 게임이라도 잘못을 비는 여동생을 뜬금없이 칼로 베진 않을 것 아닌가.

데릭은 황태자 같은 사이코패스 설정이 아니라는 믿을 구석이 있던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빨리 끝내고 이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하녀 때문에 아침부터 거하게 속을 게우고, 쫄쫄 굶어 힘이 없었다.

이런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데릭은 족히 5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번 한 번만.”

“…….”

“한 번만 더 넘어가도록 하지.”

의외로 쉽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놈이 덧붙였다.

“하지만 네 오만방자함을 참아 넘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공작보다 훨씬 재수 없는 답변이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죽음이 답은 아닌지라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빈말이라도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뉘예, 뉘예. 어느 안전이라고요.’

나는 우리 첫째 개새끼한테 하듯 속으로 잔뜩 비꼰 후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곧장 내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불현듯 현기증이 치솟더니 눈앞이 이지러졌다.

또 한 번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넘어진다……!’

복도 바닥이 시시각각 가까워지던 찰나.

탁-. 누군가 거칠게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이봐.”

기울어진 몸을 억지로 세우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새파랗게 타오르는 벽안이 코앞에 있었다. 쓰러지려던 나를 데릭이 붙잡은 것이었다.

“상한 음식을 먹었다고 하던데.”

무뚝뚝한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놀란 채로 데릭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물었다.

“의원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잠시 수런거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알고 있었구나.’

페넬로페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하녀의 잘못까지 몽땅 뒤집어씌우려 한 것이다.

‘내가 바로 잘못을 빌지 않았다면 게임 속 시나리오처럼 가차 없이 죽이려 들었겠지.’

누군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요, 소공작님.”

탁, 나는 데릭에게 잡힌 손을 발작처럼 털어 냈다. 살고자 하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러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혹시라도 놈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지레 겁이 난 나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걸요.”

그러니까 나한테 신경 꺼.

“그럼.”

나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뛰다시피 복도를 걸어가는 내 모습은 누가 보면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우스울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방금 전의 무례를 빌미로 놈이 칼을 들이밀까 무서웠다.

허겁지겁 중앙 계단 쪽으로 향하느라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내 뒤에 남은 남자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 * *

“……소공작이라.”

데릭은 저도 모르게 페넬로페가 남기고 간 말을 따라 했다.

아버지는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주제에 저와 레널드에게는 꼬박꼬박 ‘오라버니’라 부르던 계집이었다.

쓰러지려던 것을 붙잡았을 때, 저를 보고 허옇게 질리던 얼굴이 눈앞에서 가시지 않는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페넬로페를 응시하는 새파란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러나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곧바로 눈을 돌렸다.

[호감도 5%]

그런 그의 까만 머리 위로 페넬로페가 미처 보지 못한 하얀 글씨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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