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8화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방문을 닫은 후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다.
“후…….”
푹신한 시트의 감촉에 얼어붙었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이제 고작 아침이 지나 점심을 향한 시점인데도, 하루가 모두 끝이 난 듯 고단하게만 느껴졌다.
데릭과의 접촉으로 인해 여전히 두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여러 번 심호흡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아직 살아 있긴 하네.”
오기가 나서 여러 번 게임을 시도한 것이 쓸데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나 보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데릭을 ‘소공작’이라고 부를 생각을 다 했던 것을 보면.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자, 자연스레 게임 내용이 떠올랐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데릭의 호감도는 다른 남주들과는 달리 격정의 파도와 같았다.
간신히 선택지를 골라 호감도를 조금 올려 두면, 그다음 선택지에서 와르르 깎아 먹기 일쑤였다.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몰랐다.
‘성격 파탄자도 아니고 대체 왜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거려?’
이유는 수차례 죽음을 겪은 후에야 터득할 수 있었다.
데릭은 너무나도 페넬로페를 혐오한 나머지, 그녀가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칭하는 것조차 끔찍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라버니’라는 단어가 들어간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호감도가 뚝뚝 깎여 나갔다.
“까다롭긴. 우리 첫째 놈보다 더하잖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데릭의 인성에 혀를 찼다.
어쨌든 가까스로 그 사실을 기억해 낸 덕분에 이렇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데릭을 절대로 오라버니라 부르지 말자.’
나는 이 사실을 머릿속에 여러 번 새기고 앞으로도 유의하기로 했다.
물론 최대한 놈을 피해 다닐 예정이지만, 혹시 모를 게임 진행에 대비해야 했다.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곤한 눈꺼풀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하는데.’
밥은 모든 것의 원동력이다.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다.
그러나 오전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밥보단 잠이 먼저였다.
어쩌면 막막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눈이 감긴 지 얼마 안 돼, 나는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게 왜 네 방에 있는 거지?”
겨울철 서릿발보다 더 시린 목소리가 머리맡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옆 쪽에서 드센 고함이 들려왔다.
“대답해, 쥐새끼! 네가 훔쳐 갔잖아!”
“레널드.”
공작이 상스러운 욕설을 지껄이는 레널드에게 주의를 줬다.
놈은 입을 다물면서도 분을 참지 못하는지 발을 쾅 놀렸다.
‘이건 또 뭐야?’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내렸다.
낮아진 시야, 작은 두 손.
곧바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건 페넬로페의 꿈이었다.
“대답해 보아라, 페넬로페. 어째서 네가 공녀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분명 그 방은 출입이 불가하다고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버지. 더 볼 것도 없이 저 계집이 훔쳤다니까요!”
공작의 주의에도 레널드는 페넬로페를 겁박했다.
페넬로페는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난 훔치지 않았어! 난 그런 적 없다고!”
“웃기지 마! 그럼 아버지가 이본의 생일 선물로 준 게 왜 네 방 서랍장에서 나온 건데?”
부정하는 페넬로페에게 레널드는 목걸이 하나를 달랑달랑 들이밀며 외쳤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페넬로페는 도리질을 치며 바락바락 외쳤다.
“나도 몰라! 난 그 방에 들어간 적도 없어!”
“제가 보았습니다.”
그때였다.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누군가 나섰다.
레널드와 페넬로페의 첨예한 대립에 침음을 내던 공작이 그를 돌아보았다.
“집사.”
“페넬로페 아가씨가 지난 몇 주간 3층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몰라 확인해 본 결과 이본 아가씨의 방문이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공작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페넬로페에게로 휙 쏠렸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어린 여자아이 한 명에게로 내리꽂혔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페넬로페라도 흉흉함이 가득 담긴 뾰족한 시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없었다.
“……저, 저 아니에요.”
그녀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3층을 자주 오른 건 사실이었다.
저택에서 가장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층이었고, 다락방으로 가는 통로와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하녀와 단 둘이 있기 싫어서 방을 나선 것일 뿐이지, 무언가를 훔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이 진짜 공녀의 물건이라면 더더욱.
“저 진짜 아니에요, 아버지! 그 방에 들어간 적 없다고요!”
페넬로페는 공작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를 직접 입양해 온 이를 향해 뻗은 믿음과 애정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차갑게 그녀를 외면했다.
“집사. 3층의 모든 방을 단단히 걸어 잠그게. 특히 이본의 방은 못질을 하여 폐쇄하고.”
“네, 공작님.”
“그리고 내일 당장 보석상을 부르도록 해.”
“아, 아버지…….”
페넬로페가 공작가에 온 지 얼마 안 돼 일어난 소동은 당사자의 의사완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일단락됐다.
페넬로페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채 공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우리 집에서 꺼질 것이지. 병신.”
제 아버지가 간 것을 확인한 레널드가 비열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얼어붙은 페넬로페를 거칠게 밀쳐 넘어뜨린 후 공작을 따라갔다.
“천박한 것.”
버려진 쓰레기처럼 바닥을 처참하게 나뒹구는 그녀의 머리맡에, 이어서 데릭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꼭 침을 뱉는 듯한 말투였다.
장면이 전환됐다.
페넬로페는 이후 저택을 방문한 상인들에게서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과 금품을 사들였다.
고용인들이 기함을 하고, 데릭과 레널드가 ‘주제도 모르고 사치를 부리는 계집’이라며 길길이 날뛸 만큼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녀는 다시는 공작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똑똑.
작은 소음에 깊은 수면 속에 잠겨 있던 의식이 끌어올려졌다. 나는 비몽사몽 눈을 떴다.
똑똑똑.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울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방문을 두드리는 짧은 간극이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누구…….”
벌컥-. 그러나 채 누구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아가씨. 접니다.”
환한 빛이 열린 문으로 확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방 안이 어두컴컴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방문을 연 이를 바라보았다.
“집사……?”
“급히 해결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집사가 이렇게 페넬로페를 급히 찾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꾸고 있던 꿈의 여파 때문에 더 그랬다.
“무슨 급한 일?”
그 자식들이 또 나를 모함하기라도 했어? 내가 뭘 잘못했대?
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집사는 곧장 무례하게 벌컥 방문을 열어젖힌 이유를 알려 주었다.
“저녁 전에 아가씨의 전담 하녀를 다시 뽑는 것이 좋을 듯하여…….”
장년 남성의 입에서 태연하게 쏟아지는 목소리에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잠깐.”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내가 말을 끊은 것이 영 불쾌한지 이마에 진 주름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그게 다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습게도, 안도였다.
하지만 곧 그 자리를 분노가 빠르게 채워 나갔다.
‘잠이 든 상전의 방문을 허락도 없이 벌컥 열어젖힌 이유가, 고작 하녀를 뽑자는 게 다라고……?’
집사가 말한 방문 이유를 되새겨 봐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사.”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아가씨.”
“이름이 뭐지?”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아량 넓게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이 뭐냐고.”
“……펜넬입니다, 아가씨.”
“그럼 내 이름은 뭐야?”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용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묻는 말에 대답해. 내 이름이 뭐지?”
“……페넬로페 에카르트이십니다.”
내 종용에 그는 마지못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페넬로페 에카르트, 귀족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름을 강조했다. 그리고 사근사근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귀족의 저택에서 성이 없는 자가 허락도 없이 귀족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예의범절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혹시 집사는 들어봤어?”
멍청한 페넬로페.
이런 모멸과 멸시 때문에 화가 났더라면 비명을 지르고 패악을 부릴 게 아니라 제 위치를 십분 이용하여 찍어 눌러야 했다.
다시는 쉽게 보고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말이다.
공작가에 정식 입적된 귀족. 그것도 공녀.
이 얼마나 쓰기 좋은 감투인가.
호적에도 들지 못한 재벌가의 사생아보단 나서기 훨씬 용이한 위치였다.
“그것도 외간 사내가 어린 귀족 여식의 방을 제멋대로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말이야, 꼭 평민들 사이에서나 떠돌아 다닐 법한 난잡한 소문 같잖아.”
“…….”
“안 그래?”
나는 말을 마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처럼 순진하게 웃었다.
과연, 계급이란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아, 아가씨!”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에 집사가 대경실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