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9화
페넬로페를 깔보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리는 모습이 제법 볼 만했다.
나는 얼굴 만면에 띄웠던 웃음을 싹 지운 채 낮게 읊조렸다.
“내가 목이 아프다는 것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나?”
이는 게임에서 위를 바라볼 일이 없는 가장 긍지 높은 귀족들이 자주 쓰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이를테면 황족을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제국의 검, 에카르트 공작이라든지.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집사 또한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조금 전 뻣뻣하게 서 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급한 마음에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 모습을 보니 아침부터 계속 응어리져 있던 속이 좀 시원해졌다.
나보다 훨씬 연장자에게 너무 심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일어나란 소린 하지 않았다.
지난 6년간, 페넬로페는 자신을 무시하던 이 오만한 아랫사람을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아야만 했을 테니까.
“……당분간 집사의 얼굴을 보기가 좀 껄끄러울 것 같아.”
나는 무릎을 꿇은 집사를 서늘하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결국 빙 돌고 돌아서야 진짜 하고 싶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내게 용건이 있으면 직접 오지 말고 다른 이를 보내도록 해.”
“하지만 아가씨. 저택의 하녀를 뽑는 것은 제 소관…….”
“네, 아니오.”
나는 주절대는 집사의 변명을 차갑게 끊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둘 중 하나뿐이야.”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내 말을 수긍했다.
“그래도 저녁 시중은…….”
“필요 없으니까 나가.”
마지막까지 싸늘하게 일갈한 나는 집사가 일어서는 꼴을 보지도 않고 자리에 홱 돌아누웠다.
얼마 후 방을 나서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들렸다.
끼이익-. 열릴 때와는 사뭇 다른 기세로 방문이 닫혔다.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집사가 이대로 공작에게 달려가 내게 당한 수모들을 낱낱이 고할까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뭐 어쩌겠어.”
그렇다고 한들 별수 없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니와, 페넬로페의 해묵은 원통함이 조금이라도 가실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곤조곤 입만 좀 털었을 뿐, 마구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던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임 속에서는 스토리를 진행하며 주변인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을 쌓아 갔다.
그것은 후에 다섯 남주들과의 엔딩을 모두 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게임처럼 진행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든 엔딩을 볼 필요가 없으므로, 관계없는 이들에게는 소비할 시간도 감정도 아까웠다.
‘호감도 유지해서 살아남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놈의 명성까지.’
그런 것은 모두 게임 속에서나 가능한 사치였다.
쓸데없는 감상들을 밀어 둔 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페넬로페와 집사로 인해 계속 방해만 받은 내 수면을 돌려받을 시간이었다.
* * *
페넬로페는 성격에 비해 꽤 부지런한 편에 속하는지, 깨우는 하녀의 손길 없이도 이른 아침에 번쩍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부터 했다.
그러자 마치 내가 깨어나길 기다린 것처럼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나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채 한동안 방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제 했던 내 경고가 과연 먹혀들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집사는 아닌 듯, 시간이 지나도 대답 없이 문이 벌컥 열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누구야?”
나는 그제야 입을 열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아가씨, 레이나입니다.”
하녀장이었다. 어제 내가 새로 정의한 페넬로페의 위치가 잘 먹혀 든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편안한 밤 보내셨어요?”
“무슨 일이야?”
“아가씨의 시중을 들 전담 하녀를 뽑는 용건으로 찾아왔습니다.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으신지요?”
‘있을 리가.’
나는 하녀장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으로 들려온 말은 당연하게도 저택의 또 다른 누군가가 지원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마음에 둔 이가 없으면 아예 새로운 이를 뽑는 것으로…….”
“전에 시중을 들던 애 이름이 뭐였지?”
“에밀리 말씀이신가요?”
“아, 맞아. 에밀리.”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걔 혹시 저택에서 쫓겨났어?”
“아니요,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그럼 지금 뭐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것을 다 묻느냐는 양 하녀장의 눈에 의뭉스러움이 서렸다.
“……아가씨를 잘 모시지 못한 죄로 3개월간의 감봉과 빨래 담당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 애는 무슨 일로…….”
담담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하녀장의 얼굴에 묘한 초조함이 서렸다.
‘대충 일의 전말을 알고 있나 보네.’
아니면 그 하녀 뒤에 있는 진짜 주동자라든가.
비죽 조소를 삼킨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계속 내 전담 하녀 하라 그래.”
“……네?”
“당장 시중들 사람이 없으니까 불편해. 어차피 새로 뽑아 봤자 일을 배울 때까지 미숙하게 굴 거 아니야. 그럴 바엔 차라리 원래 하던 이가 조금이라도 더 낫겠지.”
페넬로페였다면 절대로 이런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필요해서 요청하는 것이므로 잠시 상냥하게 굴기로 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올려보내. 부탁할게.”
입을 떡 벌린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하녀장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녀는 내 생소한 모습에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하, 하오나 아가씨. 그 애는 아가씨에게 불경한 죄를 지어 레널드 도련님께서 직접 벌을 내린…….”
“그래서. 안 된다고?”
“…….”
나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가로막고 되물었다.
그러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녀장의 입이 다물어졌다. 긍정이었다.
고작 이틀째였지만, 이 집 사람들은 페넬로페의 말을 한 번에 재깍재깍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원래 이런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그간 보아 왔던 소설이나 영화 속 계급사회에서는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이었다.
게다가 노멀 모드에서 여주의 말을 떠받들다시피 들어주던 공작가의 고용인들을 떠올리면 원래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기로 한 것이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스멀스멀 짜증이 차 올랐다.
“내가 모처럼 사람 말을 할 때 들어주는 게 좋을 텐데…….”
무려 부탁까지 입에 담았다. 진짜 페넬로페처럼 굴었어야 했나?
“불편하다잖아. 올려 보내라면 올려 보내. 아니면 하녀장이 직접 내 시중들고 싶어?”
“그럼 공작님께 먼저 여쭤본 후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가씨.”
끝까지 내 말은 듣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아버지는 내가 지금 당장 찾아뵐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제 일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고 내가 에밀리를 용서했다는 것을 밝히면 되겠지.”
“…….”
“아버지 어디 계셔?”
“아, 아가씨!”
당장이라도 방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자 하녀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저 하녀 하나의 강등으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던 일이 자칫 내가 나선다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었다.
무려 공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목격자가 차남이었다.
“고, 공작님께선 아침 일찍 황궁으로 가셨어요.”
“그래? 그럼 이따 돌아오시면…….”
“에밀리를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내가 혹여라도 아버지를 찾아 나설까 봐 겁이 났는지 하녀장이 허겁지겁 읍소했다.
“나이를 먹으니 걱정만 늘어서, 제가 미처 아가씨의 넓은 아량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내 앞에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하녀장의 모습이 통쾌하기보단 씁쓸했다.
굳이 주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성을 쌓을 생각은 없었지만, 있는 명성마저 마이너스로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에밀리를 데리고 올까요, 아가씨?”
내 눈치를 보며 하녀장이 허둥지둥 물었다.
“앞으로 두 번 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레이나.”
나는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망쳐 버린 하루의 시작을 깊이 애도하며 그녀를 물렸다.
“나가 봐.”
* * *
하녀장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에밀리는 곧장 아침 식사를 들고 내 방으로 올라왔다.
“아, 아가씨. 아, 아침 식사를 주,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는 에밀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제 그렇게 끌려간 이후 퍽 마음고생을 한 듯했다.
그래도 상한 음식을 처먹는 미친 짓을 한 게 보람은 있는 듯, 접시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의 상태가 괜찮았다.
싱싱한 샐러드와 윤기가 흐르는 스테이크.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네.’
그러나 어제의 충격이 단단히 몸에 배었는지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내 옆에 경직된 채 서 있는 에밀리를 부러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속이 좀 뜨끔하려나.’
내가 왜 본인을 다시 전담 하녀로 쓰겠다는 건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반도 채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은 후 그녀를 불렀다.
“에밀리.”
“네, 네, 아가씨!”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 지나치게 큰 음성으로 답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바늘을 좀 줘 보렴.”
“네? 무슨…….”
“매일 아침 나를 찔렀던 바늘 말이야.”
“헉!”
아침 인사를 하듯 여상한 말투에, 에밀리는 바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한발 늦게 반응했다.
날카롭게 숨을 집어먹더니, 이내 시퍼레진 얼굴로 황급히 무릎을 꿇는 것이다.
“아, 아가씨! 죄,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쿵, 쿵.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잘못을 빌었다.
‘참나. 이렇게 바로 시인할 거, 그런 대담한 짓은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영 배짱 없어 보이는 에밀리의 모습에 기가 막힌 한편, 역시나 학대의 주동자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잘 구슬려 볼까 했던 마음이 증발하자 누가 들어도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녀장한테 못 들었니?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아, 아가씨…….”
“바늘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