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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1화 (1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1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지 그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사실 둘 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데릭이 에밀리의 경력이 10년 차니 어쩌니 들먹거린 것도 오로지 페넬로페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넌 내쫓길 하녀보다 못한 존재라는.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없는 소릴 지어낸 것도 아니고.

‘나중에 혹시 그걸로 뭐라 하면 난 그런 뜻인 줄 알았다고 발뺌하면 되지.’

되묻는 레널드에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 하녀를 내쫓지 않고 다시 네 전담 하녀로 쓰기로 했다고?”

“응.”

그의 고운 미간이 다시 와작 구겨졌다. 곧바로 버럭 내질러지는 고함에 귀가 따가웠다.

“넌 병신이냐? 너라도 싫다고 했어야지!”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뭐가 달라진다니! 그러면 계속 썩은 음식을 먹다가 뒈지겠다는 거야, 뭐……!”

“새로 온 하녀는 또 안 그런다고 장담할 수 있어?”

“…….”

내 말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레널드의 입이 딱 다물렸다.

나는 레널드의 머리 위, [호감도 - 3%]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놈을 납득시킬 말을 골랐다.

절대로 네놈들의 태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탓해서는 안 된다.

에카르트에 대한 자긍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놈의 반감만 살 뿐이다.

차라리 호감도 게이지 바가 분노 게이지 바였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때그때의 분노 게이지를 보며 저 지랄 맞은 놈의 비위를 수월하게 맞출 수 있을 텐데.

호감도가 - 3%에서 또 떨어지면 죽음이었다.

‘하…….’

이래서 레널드의 호감도가 올랐을 때 전혀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난 어제 하녀를 내쫓냐 마냐에 대해 아버지께 상의하러 간 게 아니야.”

신중히 말을 고른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근신 처분을 받은 와중에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무릎 꿇고 빌고 왔어.”

“뭐라고?”

덧붙여진 말에 레널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도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던 페넬로페가 무릎을 꿇었단 말이 어지간히 놀라웠나 보다.

“네가 잘못을……? 아니, 아버지가 네게…… 잘못을 빌라고 했어?”

물론 시킨 것은 아니고 내가 막무가내로 빈 것이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런 내막은 숨긴 채 다른 말을 했다.

“앞으로 근신하는 동안 소란 일으키는 일 없이 행동 조심하겠다고 말씀드렸어.”

“…….”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 줘.”

사실 나한테 신경 끄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이 괴팍한 놈만 조용히 있어도 데드엔딩의 위험성이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시비 걸지 말고, 서로 조용하게 살자. 응?’

하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는지라, 나는 간절함을 담아 읊조렸다.

“제발 부탁할게, 오라버니.”

고개까지 살짝 숙인 채 넘어가 달라고 청하는 내 모습에 레널드는 기괴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동안 입술을 달싹대던 그는 가까스로 음성을 만들어 냈다.

“너 대체…….”

다시 험악하게 찌푸려지는 레널드의 얼굴을 보며, 그다음 말을 예상했다.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겠지. 미쳤냐고, 썩은 음식물을 먹더니 돌아 버린 게 틀림없다고.

지금 내 행동이 그간의 페넬로페답지 않게 너무 고분고분하긴 했으니까.

“넌 자존심도 없냐?”

그러나 막상 터져 나온 벼락같은 노성은.

“그 꼴을 당하고도 조용히 넘어가겠다고?!”

예상을 뛰어넘어 내 스위치까지 건드렸다.

“제정신이야? 차라리 전처럼 꽥꽥 괴성을 지르면서 물건을 때려 부숴! 그편이 더 너다우니까!”

레널드는 마치 페넬로페가 당한 일들이 제 일이라도 되는 양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조금도, 쥐꼬리만큼도 고맙지 않았다.

“내 방에 공녀의 목걸이를 가져다 놨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 아니야?”

나도 모르게 통제를 벗어난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구 튀어 나갔다.

“이런 걸 바라고 지금까지 나한테 그래 왔던 거잖아.”

“……뭐?”

레널드가 입을 떡 벌렸다.

[호감도 -3%]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런 자각도 들지 않았다.

놈은 나에게 자존심을 운운해선 안 되었다.

‘페넬로페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집사, 하녀장, 에밀리는 차라리 약과였다. 진짜 주동자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내 담담한 어투에 레널드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쥐어짠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페넬로페. 그건…….”

“지금 와서 그 일로 널 원망할 생각 같은 건 없어. 나도 그간 멍청하고 오만하게 굴어 왔으니까.”

“…….”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다 지겨워졌어.”

나는 새파란 눈동자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곧 성인식을 앞둔 성년씩이나 됐는데, 언제까지 내가 에카르트에서 뻗댈 수만은 없잖아.”

레널드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네까짓 게 출가라도 하겠다는 거냐?”

“모든 건 아버지와 첫째 오라버니에게 달린 일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내뱉는 말과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이런 세계관 배경이 으레 그렇듯 공작이나 소공작의 입맛대로 정략결혼에 희생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게임 스토리상 그럴 일도 없을 테니 그건 안심이었다.

난 무조건 남주들 중 한 명과 엔딩을 본 후 이 망할 곳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탈출할 것이다.

‘그 남주들 중에 넌 포함 안 되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나는 레널드에게 다시 한번 부탁을 가장한 무시를 요구했다.

“그러니까 내 일에 관심 가질 필요 없어, 레널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차라리 꼴좋다고 여기면서 평소처럼 신경 끄란 말이야.

“이제 목욕할 시간이야. 그만 나가 주겠어?”

방문 쪽을 흘깃 눈짓하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레널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게임 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새삼 놀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호감도 떨어지는 거 아니야? 안 돼-!’

레널드만 보면 광견처럼 으르렁대는 페넬로페같이 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놈이 납득할 만한 말만 골라 했는데, 대체 왜!

그 순간이었다. 레널드의 사랑스러운 핑크빛 머리 위, 텅 빈 게이지 바가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호감도 3%]

‘뭐야.’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왜 호감도가 오르는 건데?’

그것도 무려 6%씩이나.

레널드와 그 위의 호감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느새 일그러진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짓씹듯 뇌까렸다.

“……너 따위에게 잠시라도 신경을 쓴 내가 병신이지.”

나를 사납게 쏘아보는 파란 눈이 어쩐지 퍽 속이 상해 보였다.

그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홱 몸을 돌렸다.

‘잘못 본 거겠지.’

찬바람을 일으키며 쌩하니 방을 빠져나가는 레널드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역시 잘못 본 거라 단정 지었다.

쾅-!

문이 거세게 닫힌 후 방 안은 고요해졌다.

테이블에 턱을 괴며 나는 상념에 잠겼다.

기분이 묘했다. 가망성이 제로라고 생각했던 인물의 호감도가 오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건 꽤 괜찮은 일이었다.

“어쨌든 선택지 끄고 좀 나아지긴 한 건가?”

페넬로페를 혐오하는 이 집 형제들의 호감도가 모두 떨어지지는 않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끄고 있어야지.”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욕을 하겠다는 말이 마냥 핑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녀를 부르는 설렁줄을 잡아당길 때, 문득 한 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더 이상 레널드를 마이너스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고.

* * *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근신 기간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 버렸다.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다고?”

“네, 아가씨. 소공작님께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공…… 아니, 첫째 오라버니가?”

나는 고용인들이 하듯이 무심결에 ‘소공작’이라 부르려다가 황급히 호칭을 바꿨다.

어쨌든 나는 이 집의 막내딸이다.

데릭을 제외하고 너무 큰 위화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그나저나 데릭이 그랬다니.’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근신형의 종료나 다름없었다.

“여기 초대장이에요, 아가씨.”

에밀리가 공손하게 내게로 온 초대장을 내밀었다.

황가의 상징인 황룡이 금장으로 새겨진 빳빳한 종이 위에, 페넬로페란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2황자의 탄신 연회. 바로 내일이었다.

“준비를 서둘러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난 근신형이 벌써 끝났다는 게 좀 아쉬웠다.

이 집 형제 놈들과 부딪힐 일도 없이, 에밀리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지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근신형이 끝나면 어쨌든 게임 진행상, 필연적으로 데릭과 레널드와 엮여야 할 텐데…….

‘잠깐.’

태평하게 공작가에서 일어날 일들을 걱정하고 있던 나는, 이어지는 생각에 멈칫했다.

‘황궁으로 가는 거면…… 황태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만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이 확정이었다.

게임에서 황궁으로 가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바로 황태자 루트가 시작되는 에피소드였기 때문이다.

황태자 놈이 뽑아 든 칼에 수차례 목이 잘렸던 페넬로페의 일러스트가 떠오르자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아, 아가씨?”

에밀리가 내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절대 가면 안 돼. 그냥 아파서 못 간다고 할까?’

그 미친놈을 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걸까 봐 기가 팍 죽어 있는 에밀리에게 나는 다급히 물었다.

“에밀리. 아버지도 내일 연회에 참석하신다니?”

“내일 공작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소공작님이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기로 하셨어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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