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2화 (1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2화

나는 좌절했다. 결국 연회에 안 가려면 공작이 아닌 데릭에게 가서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놈의 호감도가 깎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레널드였으면 도박이라도 해 볼 텐데.’

어제 막 마이너스에서 벗어난 레널드의 호감도를 떠올리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감도 0%를 유지하는 것도 기를 쓰고 있는 마당에.

데릭을 두고 도박을 해 볼 시도 따윈 엄두도 내지 말아야 했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지셨어요.”

심각해진 내 표정에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생각할 게 있으니 나가 있으렴.”

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짓했다.

그리고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

안 가도 죽고, 가도 죽는다니. 뭐 이런 미친 게임이 다 있냔 말이다.

천국과도 같았던 지난 근신 기간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최대한 피하면 되겠지?”

나는 곰곰이 게임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황궁의 미로 정원에서 황태자를 만나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죽었다. 계속, 계속.

과장 안 하고 리셋 버튼을 5초당 한 번씩은 눌렀을 것이다.

“역시 그냥 아파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최대한 사정해 보는 게…….”

아.

그 순간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냥 죽어 볼까?”

생각해 보니 그랬다. 여기서 죽으면 그냥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플레이어가 게임 오버 당했는데 뭐 어쩔 거야.

가망성도 없는 놈들을 붙잡고 어떻게서든 엔딩을 보기 위해 아등바등할 바엔 빠르게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이 게임엔 리셋 버튼이 있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리. 셋. 버. 튼.

물론 진짜 게임 화면과는 달리 내 시야에 설정이나, ‘뒤로 가기’ 같은 아이콘이 보이지는 않았다.

당장 볼 수 있는 것은 선택지가 뜨는 네모 창뿐.

하지만 [선택지 ON/OFF] 기능이 존재하는 것처럼, 분명 리셋 버튼도 존재하지 않을까?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리셋이 있는 이상 밑져야 본전이었다.

“좋았어.”

황태자를 만나서 한번 죽어 보자고!

* * *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하녀들에게 강제 기상당한 나는 꼭두새벽부터 때 빼고 광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유와 향유를 푼 물에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받고, 팩을 올리고. 이 지루한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간신히 욕실에서 나와 화장대에 앉혀졌을 때 나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아가씨,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저번에 사 두고 아직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새것이에요.”

“이 귀걸이는요? 드레스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머리는 틀어 올리는 것보다 반 묶음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셔요?”

“화장은 어떤 식으로 해야…….”

나를 붙들고 하녀들이 쉼 없이 조잘대었다.

‘얘네 페넬로페 미워하는 거 맞아?!’

어째 파티에 직접 참석하는 나보다 본인들이 더 들떠서 난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팩을 올리고 씻어내는 귀찮은 짓을 여러 차례 반복한 것이 헛되진 않았는지, 평소보다 얼굴에서 광이 났다.

‘하긴. 확실히 이 얼굴이면 꾸밀 맛이 나긴 하지.’

하녀들의 반응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드레스는 목까지 다 가려지는 거로 다시 가져와. 액세서리는 최소한으로 하고, 나머지도 다 대충해.”

“네에?!”

내 명령에 하녀들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아가씨. 무려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인걸요…….”

누구보다 예쁘게 꾸며야 하지 않겠느냐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

그녀들이 가지고 온 넥라인이 깊이 파진 붉은빛 드레스는 확실히 페넬로페의 진분홍색 머리와 잘 어울렸다.

거기에 맞춘 듯한 액세서리들이 그녀의 화려한 미모에 정점을 찍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작새처럼 미모나 뽐내려고 황궁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으러 가는 거란 소리를 할 순 없으니, 페넬로페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우겼다.

“공들여서 꾸밀 것 없어. 시키는 대로 해.”

내 싸늘한 목소리에 하녀들은 차마 더 호소하지 못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얼마 후 그들이 들고 온 세 벌의 드레스는 전에 것과 달리 모두 얌전하기 그지없는 종류였다.

“이걸로.”

내가 고른 것은 암녹색의 이브닝 드레스였다.

쇄골까지 완벽하게 가려지는 것도 그렇고, 가장 튀지 않는 어두운 색상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를 갖춰 입고 하녀들을 닦달하여 화장을 최대한 옅게 끝냈다.

액세서리 또한 페넬로페의 눈동자 색과 같은 자그마한 에메랄드 귀걸이 하나로 끝냈다.

치장을 마친 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당장 예배를 드리러 가도 될 만큼 정숙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눈에 안 띄겠지.’

흡족한 표정을 짓는 나와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하녀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에밀리만 남고 다들 그만 나가 봐.”

내쫓다시피 그녀들을 물린 후, 나는 홀로 남은 내 전담 하녀에게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에밀리. 드레스와 같은 색의 장갑을 준비해 줄래?”

“아가씨, 장갑까지 끼시게요?”

그럼 정말 완벽한 성당 룩의 완성이었다.

그것만은 말리고 싶었는지 에밀리는 재깍 움직이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럼, 이걸 모두에게 다 보여 주고 다닐 순 없잖니.”

나는 그런 그녀에게 며칠 전 바늘로 찌른 손등을 바짝 들이밀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피딱지가 진 바늘 자국들은 이제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해졌다.

그러나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 중 공녀의 흠을 알아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귀족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 손등의 자국을 본 에밀리의 얼굴이 단번에 희게 질렸다.

“가서 빨리 가져와.”

“네, 네!”

허겁지겁 돌아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쯧, 혀를 찼다.

요즘 좀 잘해 줬더니 정말로 내게 신임이라도 받는 줄 알고 종종 기고만장해질 때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바짝 조여 줄 필요가 있다.

잠시 후 에밀리가 가져다준 장갑을 착용하는 것으로, 황궁으로 갈 준비가 모두 끝났다.

* * *

데릭은 대문을 나온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근신하는 동안 제법 사람이 된 것 같군.”

며칠 만의 재회였지만, 페넬로페를 향한 빈정거림은 여전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부아가 치밀 새도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글씨 때문이었다.

[호감도 5%]

‘뭐야. 대체 언제 오른 거지?’

나도 모르는 새 데릭의 호감도가 올라 있었다. 무려 5%나!

좀 어이가 없어졌다. 만난 적도 없는데 호감도가 오를 정도면, 얼마나 페넬로페를 싫어한다는 소리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파서 못 간다고 말이나 해 볼걸.’

뒤늦게 아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에카르트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대문 앞에 떡 당도해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한 후 마차 근처에 서 있던 호위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의 높이가 생각보다 많이 높았기 때문이다.

치마를 들어 올리는 데 여념이 없어, 나는 데릭이 뭘 하는지 보지 못했다.

마침내 마차에 올라탄 후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데릭이 허공을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채,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래?’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회 시간에 맞추려면 빨리 출발해야 한다.

그가 끔찍이 여기는 페넬로페와 같은 마차를 타고 갈 리는 없었으므로, 나는 마차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 굳어 있던 데릭 놈이 불쑥 마차 위로 올라섰다.

‘뭐야, 뭐야! 왜 올라오는 건데!’

순간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제 막 만나서 인사를 한 게 끝이니 당연했다.

그러는 와중, 데릭이 완전히 반대편에 주저앉았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을 내뱉고 말았다.

“가, 같이 타고 가시게요?”

내 물음에 데릭이 와락 눈썹을 찌푸렸다.

“불만 있나?”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왜 이래! 너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그 말을 삼킨 채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구겨진 데릭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싫으면 네가 내려서 다른 마차를 타든지.”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나는 정말로 그럴까 싶어서 마차 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들어오면서 닫아 버린 통에, 굳게 닫힌 문을 다시 열고 내리는 것도 우스웠다.

“……싫지 않아요.”

나는 다시 데릭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좋…… 아요?”

그리고 조심스레 데릭의 눈치를 살폈다.

내 말에 잠시 나를 쏘아보던 그는 곧 홱 고개를 돌려 떨떠름한 내 얼굴을 외면했다.

‘아니, 이렇게 싫어할 거면서 왜 서로 불편하게 이러냐고.’

신종 페넬로페 괴롭히기인가?

냉기를 풀풀 풍기는 그의 모습에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나 다시 본 그의 머리 위를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호감도 6%]

1%가 올랐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중 덜컹, 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왕 같이 탄 거, 별일이야 있겠어.’

내겐 6%나 되는 호감도가 있었다.

설마 마차를 타고 가는 그 짧은 사이에 6%가 확 깎일 만한 일이 생기진 않을 것 아닌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 나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데릭과 같은 마차를 타게 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숨 막혀! 살려 줘!’

* * *

황궁에 도달할 때까지는 정말이지, 끊임없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요요히 앉아 있는 냉미남을 흐뭇하게 감상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고요한 마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 가득했다.

참다못해 마차에 달린 창문이라도 열까 싶어 몸을 움찔거렸지만, 기다렸다는 듯 데릭의 서늘한 시선이 내리꽂혀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내가 불편함에 조금이라도 뒤척일라치면 눈을 감고 있던 놈이 귀신같이 눈을 뜨고 나를 시퍼렇게 노려보았다.

‘아,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데릭의 머리 위 [호감도 6%]를 연신 흘끔거리며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저 부동자세로 앉아서 이동해야 했던 나는, 마침내 마차가 멈췄을 때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이 죽음의 마차를 탈출할 수 있다.

‘빨리 문 열고 나가서 숨부터 내쉬어야지.’

덜컥.

그런데 마차가 멈추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데릭 놈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잡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