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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화 (1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화

뒤늦게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잡고 내려서던 내게 데릭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 잘못 먹었니?’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데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뭐 하는 거지? 안 내릴 건가?”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처럼 막 도착하여 내리는 귀족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감사해요.”

나는 얼른 데릭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새하얀 계단을 올랐다.

“에카르트 공작가의 데릭 에카르트 소공작님과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녀님 드십니다!”

시종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무도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릴 때쯤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데릭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바로 어제 근신 처분이 풀렸다는 것을 잊지 않았겠지?”

“…….”

“이번에도 소란을 일으킨다면 고작 방에 갇히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처럼 들떴던 마음에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데릭의 밉살맞은 소리에 반항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내리눌렀다.

“네, 조심할게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분고분 답하자, 데릭이 휙 고개를 돌렸다.

‘쳇.’

나는 놈이 보지 못한 틈을 타 입을 삐죽였다.

황궁 파티는 무척 점잖았다. 다시 말하면 몹시 지루하다는 소리였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데릭은 나를 내팽개친 채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기 바빴다.

어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건들면 광견처럼 날뛴다는 페넬로페의 명성이 실로 자자한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또래 귀족 영애들은 저들끼리 몰려다니며 춤을 추고 속닥거리기 바빴다.

외따로운 섬처럼 그네들에게서 동떨어진 나는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진 벽에 붙어 서서 상황을 관조했다.

‘난 절대 외롭지 않아.’

이건 절대 자기 세뇌가 아니다.

정말이다.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이 분명했고, 그것을 달성하면 어쩌면 이 망할 곳에서 벗어날 수…….

‘아악! 이 망할 놈의 황태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연회가 무르익을수록,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속닥거리는 시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홀로 뻘쭘하게 서 있는 것도 이젠 한계다 싶을 때쯤.

“황비마마와 2황자님 드십니다!”

드디어 게임 스토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하호호 떠들던 귀족들이 하나같이 입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나 또한 눈치를 보며 적당히 몸을 낮추었다.

막 들어선 황비와 2황자는 ‘내가 바로 황족이다.’라는 포스를 풀풀 풍기며 레드 카펫 위를 파워 워킹했다.

황족들의 상징이라던 금발이 조명에 비쳐 반짝였다.

그들은 연회장을 가로질러 가장 끝에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황족들만이 앉을 수 있는 높다란 자리였다.

그 모습을 숨죽인 채 몰래 지켜보던 나는, 의자에 앉는 2황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긴 황태자 자리 아니야?’

2황자가 앉은 곳은 가장 높고 정중앙에 위치한 상석 중의 상석.

화려한 황룡이 휘감고 있는 금좌.

황제의 자리였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황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으므로 공식 석상에서는 황태자가 왕좌를 모두 차지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2황자가?’

나는 황태자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음에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황비와 2 황자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졌다.

생일의 주인공은 왕좌에 앉혀 주는 풍습이라도 있는 건가?

“모두 그만 일어나도록.”

착석을 마친 2황자가 근엄하게 명령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모두들 바쁜 와중에도 내 탄신 연회에 참석해 주어서 고맙소. 조촐한 자리지만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

생일 당사자의 축언을 끝으로 본격적인 연회의 막이 올랐다. 아니 오르려던 찰나였다.

쾅-! 불현듯 입구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무, 무슨 일이래?”

귀족들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누군가 사람들을 헤치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뚜벅, 뚜벅-.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지익, 지익-’ 무언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 또한 같이 잇따랐다.

“화, 황태자님이야!”

그때 누군가 외쳤다. 나는 그 소리에 귀가 트여 허겁지겁 그쪽을 바라보았다.

황금을 잘라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금발이 휘날렸다.

방금 전, 2황자와 황비를 보고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걷고 있는 금발의 남자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저, 저거…… 사람 아니야?”

“헉! 저, 저게……!”

그 순간 지나치는 황태자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지익, 지익 -.

황태자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겨서 미처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연회장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 온 것이, 축 늘어진 사람이란 것을.

“생일을 축하한다, 동생아.”

마침내 황비와 2황자가 앉아 있는 곳까지 당도한 황태자는 계단 앞에 질질 끌고 온 이를 내던졌다.

“혀, 형님!”

“화, 황태자!”

황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태자를 손가락질했다.

“이,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란 말이냐!”

“동생의 생일 연회에 형이 참석하는 것이 어째서 경우 없는 짓입니까, 어머니?”

“황태자씩이나 되어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서 이런 망측한 짓을……!”

사람을 때려눕혀 끌고 온 것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는지, 황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초대를 받지 못했다니요. 섭섭하게 그런 말씀을.”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연회에 초대를 받았으니 제가 바쁜 정무도 제쳐 두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황태자가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였다. 섭섭하다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대립이 잘 이해가 안 갔다.

‘황태자의 모친이 황비가 아닌 건가?’

그러는 사이 황태자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초대장을 가지고 온 시종이 너무 미숙하더군요.”

말이 끝나자 황태자가 훅 몸을 숙였다. 그러더니 제가 끌고 온 이의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반쯤 세웠다.

검은색 복면으로 가려져 그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암복을 입은 차림새가 영락없는 암살자 같았다.

“자꾸 달라는 초대장은 줄 생각을 않고 딴짓거리만 하기에 제가 손을 좀 봐줬습니다.”

“…….”

“그러니까 제대로 된 시종을 뽑지 그랬느냐, 동생아.”

그 순간이었다.

스릉-. 황태자가 빈손으로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붙들고 있던 암살자의 목을 베었다.

최악-!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생일 선물은 이것으로 대신하지.”

황태자가 댕강 잘린 목을 2황자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아아아악-!”

황비의 찢어지는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사람의 머리통.

2황자는 곧 졸도할 사람처럼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게서 또 선물을 받고 싶거든 얼마든지 보내라고.”

경악으로 가득 찬 연회장. 그 안에서 오로지 황태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사납게 웃는 그 얼굴이, 지옥에서 온 사자 같았다.

그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졌다. 엄청난 충격과 정적만을 남겨 둔 채.

황태자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막힌 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야.’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이런 장면은 게임에서 진짜 없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엄청난 광경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페넬로페의 바늘 자국들처럼, 스쳐 지나가듯 본 것도 아니었다.

[2황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황태자는 작은 소동으로 기분이 상한 채 연회장 밖을 나선다.]

게임에서 나온 서술은 이 정도가 다였다.

‘이게 어떻게 작은 소동이냐고, 이 미친 게임아!’

나는 시종들이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닦아 내는 광경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떴다.

〈SYSTEM〉 지금부터 [철혈의 황태자, 칼리스토 레굴르스]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미로 정원으로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실제로 본 황태자는 게임보다 훨씬 더 미친놈 같아서 쫓아갈 엄두가 안 났다.

‘만나자마자 바로 목이 베이는 거 아니야?’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한순간이다. 어차피 죽으러 온 게 아닌가.

‘이번 한 번만 참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게다가 나한텐 리셋이란 보험이 있었다. 진짜 죽게 된다면 리셋을 하면 되겠지.

그렇게 애써 겁먹은 속을 달랜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예.]를 눌렀다.

그러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미로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

“이건 편하네.”

사실 길치라서 내심 걱정되던 차였다. 게임이랑 똑같이 순간 이동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자, 이제 한번 죽어 보러 가자고.”

나는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미로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미로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시스템의 배려인지 뭔지, 맞는 길에만 등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등불을 따라 깊숙한 미로 속에 다다를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꽤 오래 걸었지만, 등불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두를 신은 발이 욱씬욱씬 아파올 적.

저 멀리 모서리 끝에 달린 등불 하나가 반짝거렸다. 드디어 끝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모서리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방향을 꺾었다.

모서리 너머는 작은 분수와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돼 있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뭐야. 어디 있는 거지?”

어디에도 더 켜진 등불은 없었다. 분명 여기가 끝이 맞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황태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춤주춤 분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서걱-. 목 옆에 차갑고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헉!”

“어떤 쥐새끼가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가 했더니.”

황태자가 뒤에서부터 반원을 그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에 따라 내 목에 겨눠진 칼날도 피부를 스치며 빙 돌아갔다.

따끔. 살이 썰리는 섬뜩한 감각과 함께 뜨끈한 게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는 살갗이 베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

“이거, 에카르트의 미친개가 아닌가?”

달빛에 반사된 찬란한 황금빛 머리칼, 피에 젖은 것 같은 시뻘건 동공.

재밌는 일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황태자는 귀신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연회장에서 그 꼴을 보고도 쫓아올 생각을 다 하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봐?”

순식간에 무표정해진 얼굴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말해. 쥐새끼처럼 왜 날 쫓아온 거지?”

목을 파고드는 칼날이 조금씩 깊어졌다. 그보다 더 따갑게 느껴지는 살기.

나는 직감했다. 지금 황태자가, 나를 죽이리라는 것을.

‘리셋 버튼!’

나는 허겁지겁 눈을 굴려 리셋 버튼을 찾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리셋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두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이만 공과과 오라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 볼까.”

그러나 시야가 닿는 그 어디에도.

“유언은 친히 에카르트에 전달해 주지.”

그 어디에도 리셋 버튼은 없었다.

‘리셋! 리셋 어딨어!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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