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화
‘리셋 버튼이 없어!’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리셋 버튼이 없었다.
그러는 도중 황태자는 정말로 나를 죽일 심산인지 칼을 든 팔을 높이 쳐올렸다.
“자, 잠깐! 잠깐!”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황태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이제 좀 말할 기분이 들었나 보지?”
“네! 말할게요! 마, 말할게요!”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들었던 팔을 내려 다시 내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한번 해 봐.”
“그, 그게…….”
급한 마음에 말한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뭐라 하냔 말이다. 죽기 위해 쫓아왔다고 할 수도 없고, 리셋 버튼이 없는 이상 막 죽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택지를 켤까?’
하지만 선택지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지를 꼈기에 지금까지 잘 버텨 온 것이 아닌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그때였다. 미친 듯이 생각을 거듭하고 있자 그새를 못 참고 황태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기대가 돼.”
놈의 머리 위에서 [호감도 0%]가 위태롭게 깜박였다.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여야 할 거야, 공녀.”
“…….”
“나는 중간에 누가 날 막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말이야.”
황태자가 음산하게 뇌까리며 내 목에 칼날을 바짝 들이밀었다. 뜨끈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죽음에 대한 생리적인 공포와 두려움.
그것이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조,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뇌를 거치지 않고 개소리를 내뱉었다.
“……뭐?”
놈의 적안이 살짝 커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이미 내 입은 내 통제를 벗어난 후였다.
“화, 황태자 전하를 여, 연모해 왔어요!”
“…….”
“아까 전 작은 소동으로 인해 마음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아서, 위로를 해 드리려고…….”
이건 노멀도 하드도, 그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는 끔찍한 개소리였다.
노멀 모드에서 여주가 황태자를 만나 위로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아까 암살자의 목을 베는 황태자를 못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X 됐다.’
할 말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또라이 같은 놈을 좋아한다고 했을까.
하지만 귀족 영애가 이런 으슥한 미로까지 남자를 쫓아올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는 정상적인 남녀 사이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였다.
‘안녕, 이 미친 게임아. 내가 지금 죽어 원래 집으로 돌아가거든, 무조건 별점 1개에 쌍욕 리뷰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다가올 고통에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흠. 공작가의 미친개가 황가의 망나니를 연모한다라.”
밤바람이 콧등을 살랑 간지럽혔다. 나는 황태자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것참…….”
“…….”
“생각지도 못한 변명인걸?”
피처럼 붉은 눈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놈은 퍽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날 몇 번 본 적도 없지 않나? 기껏해야 저번 내 귀환 연회에서 스치듯 본 게 전부일 텐데.”
사실 아예 초면이다. 내가 이 망할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 그 직후였으니.
나는 잔뜩 경직된 채 대꾸했다.
“그, 그때 한눈에 반했습니다.”
“내 어디가 좋은데?”
“그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분명 이놈 근처엔 얼씬도 말자고 엑스를 수도 없이 쳤었는데!
눈을 굴려 필사적으로 황태자의 모습을 살핀 나는, 놈의 인내심이 다 하기 전에 가까스로 이유를 쥐어짰다.
“외모가 워낙 출중하셔서…….”
“내 매력이 고작 얼굴뿐이라니, 이거 좀 서운한데.”
“……요, 용맹하시고, 칼을 잘 쓰시기도…….”
“너무 틀에 박힌 말이군. 좀 더 참신한 거 없나?”
“그게…… 그게…….”
간신히 짜내는 족족 되돌아오는 답변에 나는 이제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것 같은 걸 안간힘을 써서 참고 있었다.
목 옆에 붙어 있는 서늘한 흉기의 감각이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게…… 또…….”
내가 울먹거릴수록 황태자의 붉은 입꼬리에 걸쳐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잠시 미쳤다. 이렇게 끔찍한 미친놈한테 죽을 생각을 했다니.
기어이 뒤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좋아. 썩 성에 안 차지만, 이번은 통과시켜 주지.”
목을 파고들던 칼날이 거둬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황태자가 적안을 반짝이며 들뜬 목소리로 지껄였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땐 왜, 어떻게, 무슨 연유로 날 좋아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거야.”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그만.”
스릉, 놈이 칼집에 칼날을 집어넣으며 손짓했다.
그때였다. 화려한 금발 위로 호감도 게이지 바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감도 2%]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뻐서가 아니라, 너무.
너무 기가 막혀서.
“안 가고 뭐 하고 있지? 또 빨간 줄 긋기 놀이를 하고 싶은가 보지?”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는 날 보고 놈이 경악스러운 말을 지껄이며 엄지로 제 목을 직 그어 보였다.
“아, 아니요!”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들어온 미로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 뒤돌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황족에게 예를 차려 인사를 할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놈의 시선에 당장 뛰지 않고 걷는 것이 내 최대였다.
허겁지겁 모서리를 도는 순간, 나는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휙휙 찬바람이 베인 목 주변을 따갑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고통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리셋 버튼이 없다.’
황태자가 뽑아 든 칼에 베이기 직전, 날 가장 두렵게 만든 사실은 바로 그것이었다.
믿고 있었던 보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 마음대로 죽어 볼 수도 없다는 소리다.
‘막상 죽었는데, 그게 끝이라면? 원래 살던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죽는 거면……?’
난 그냥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그럴 위험을 감수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꼼짝없이 여기서 아무나랑 이어지고 엔딩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조금만 삐끗해도 날 죽이려는 놈들에게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버티고 버텨서 엔딩을 본단 말인가?
남주들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깟 호감도는 아무리 올려 봤자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수치였으니까.
‘용을 써 가며 호감도를 올려놨는데,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한순간에 폭락하면?’
그럼 죽음이다.
하지만 난 죽기 싫었다.
‘내가 왜.’
피가 섞인 이복 오빠 놈들 밑에서도 죽기 살기로 버텨서 탈출한 마당에.
‘내가 왜 이 미친 곳까지 와서 처음 보는 놈들 비위 맞추다 어이없이 죽어야 하는데!’
“흐, 흐윽.”
거친 헐떡임 사이로 나도 모르게 울음이 새어 나왔다.
등불을 따라 미친 듯이 달린 덕인지, 나는 들어올 때보다 금방 미로 정원의 입구에 다다랐다.
완전히 미로를 빠져 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퍽-. 어두운 시야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반대편 사람과 부딪혔다.
“아!”
두려움이 극에 달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기어이 날 죽이려고 쫓아온 황태자일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다시 재빠르게 도망을 가려던 순간 탁, 손목이 붙잡혔다.
“놔!”
난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
“영애?”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영애! 영애!”
발작처럼 잡힌 손을 털어 내던 나는, 순간 어깨를 와락 부여잡고 몸을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놀라 확장된 군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희미한 등불에 비친 은색 머리카락.
이어서 그 위에 선명히 빛나고 있는 [호감도 0%].
“흐, 흐으…….”
“쉬, 진정하십시오.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울음 때문에 거칠게 헐떡이자, 남자가 듣기 좋은 미성으로 날 얼렀다.
‘또 남주야?’
나는 부딪힌 남자가 누군지 깨닫고 절망했다.
뷘터 베르단디. 마법사이자 후작이었다.
“이제 괜찮…… 괜찮아요.”
황태자가 아니란 사실 하나로 덜덜 떨리던 몸은 금방 진정이 되었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들어 흘러내린 눈물 줄기들을 닦아 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한시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 만난 뷘터를 상대할 정신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분께 추태를 부렸네요. 부디 못 본 것으로 해 주세요. 그럼.”
대충 얼굴을 추스른 나는, 속사포처럼 읊조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또다시 앞이 가로막혔다.
“피가 많이 납니다.”
그가 내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색도 창백하시고요. 의원에게 가시죠.”
“아니에요. 급히 돌아가야 해서…….”
“그럼 이거라도.”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 나와는 달리, 뷘터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재빨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환부에 대고 누르십시오. 지혈될 겁니다.”
하얀 손수건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순순히 건네받았다.
어차피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꼴로 연회장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답례는 나중에 꼭 하도록 할게요.”
“답례는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한 그는 불현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대신, 다음에 보았을 땐 부디 이 고운 눈에서 슬픔이 가셔 있었으면 좋겠군요.”
따뜻한 온기를 담은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내 눈가를 살짝 어루만졌다.
[호감도 9%]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글씨에 신경이 쏠려, 나는 그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