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화
뷘터가 건네준 손수건을 목에 댄 채 연회장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말대로 정말 피가 멈춰 있었다.
마법사라 그런지 손수건에도 어떤 마법을 부려 놨는지 모를 일이었다.
데릭을 찾기 위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멈칫, 하고 내 차림새를 점검했다.
‘별생각 없이 고른 암녹색 드레스가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색이 어두운 탓에 흘러내린 핏자국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뛰느라 흐트러진 머리만 좀 정돈하고 곧장 문을 지나쳤다.
데릭을 찾는 것은 무척 쉬웠다.
우리의 냉미남 남주께서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는 한가운데서 홀로 고고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으랬는데…… 목이 베인 걸 보면 분명 난리 치겠지.’
황궁에 당도했을 때 그가 했던 경고를 떠올리기 바빠, 나는 내게 와 닿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 깨닫지 못했다.
드레스가 멀쩡하다 해서 내 상태가 멀쩡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라버니.”
주위를 의식해 작게 그를 불렀다.
다행히 그는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피로 흥건히 젖은 시뻘건 손수건을 목덜미에 댄 채, 곧 쓰러질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여동생을 발견한 데릭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지금 당장.”
그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내게로 달려오는 데릭의 창백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연회장에서 혼절한 이후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아가씨-!”
“어서! 어서, 의원을!”
날카로운 비명,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고작 목이 조금 베인 것뿐인데, 공작가로 돌아오게 된 나는 우습게도 며칠간 사경을 헤맸다.
그간 살아남기 급급해 애써 무시해 왔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꿈을 꿨다.
이제 페넬로페가 됐으니 이전처럼 그녀의 과거를 꿀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은 모두 잊고 있었던 내 과거들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고, 재벌가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종례를 마치고 가방을 싸고 있는데, 누가 툭 어깨를 쳤다.
- 야. 네 오빠가 너 찾아. 체육관 창고로 오래.
학교 권력의 중심이나 다름없던 둘째 개새끼에게 알랑거리는 애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창고로 향했다.
둘째 놈이 은근히 왕따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었을 때였기 때문이다.
- 오빠……?
끼익, 창고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무언가가 덥석 내 머리 위에 쓰였다. 비닐 봉지 같았다.
- 뭐, 뭐…… 아악!
얼굴이 가려진 나는, 창고 안으로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말 그대로 뒤지게 맞았다.
몸을 밟고 걷어차는 수십 개의 발.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쏟아지는 폭력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 와, 속이 다 시원하다! 어디서 거지 같은 게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지가 우리랑 같은 학교 다닐 레벨이나 돼?
- 야. 근데 얘네 오빠가 알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 모르는 소리 마. 그 형 얘 존나 싫어해. 얼마 전에 아버지 모임 따라갔다가 얘 얘기 나왔는데, 아주 그냥 치를 떨더라니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꿈틀거리는 내게 놈들은 키득거리며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여 댔다.
그 폭언들이, 방금 전 쏟아진 발길질보다 더 아팠다.
- 야. 앞으로 나대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 응? 괜히 오늘 일 나불거리고 다니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놈들이 우르르 창고를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족히 1시간은 넘게 바닥에 꿈쩍도 않고 누워 있었다.
너무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당한 묻지마 폭행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머리에 쓰인 봉지를 벗겨 내자, 교복도 가방도 엉망진창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옷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을 지워 내다가 문득 거울을 보았는데, 교복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맞다가 얼굴을 잘못 걷어차였는지 눈두덩이가 시푸르뎅뎅했다.
누가 봐도 ‘나 후드려 맞았소’ 같은 몰골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 사실 정신이 없고 머릿속이 온통 혼몽해서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어 그 지옥 같은 집에 갔다. 들어가기 죽기보다 싫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막 현관에 들어섰을 때, 하필이면 친부와 놈들이 거실에서 다 같이 다과를 들고 있었다.
- 다녀왔어요.
나는 그 자리에 낄 수 없는 존재였으므로, 꾸벅 인사한 후 빠르게 계단으로 향했다.
- 잠깐. 너 거기 서 봐.
평소 같았으면 내가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일진 사나운 일들의 연속인지, 둘째 개새끼가 나를 불렀다.
- 야, 거기 서 보라고!
나는 무시하고 마구 걸었다. 그러자 둘째 놈이 벌떡 일어났다.
채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 야, 너 이거 뭐야? 꼴이 왜 이래?
- ……별일 아니야. 그냥 넘어졌어.
나는 얼굴을 푹 숙인 채 대꾸했다. 머리카락으로 시퍼런 눈덩이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 야, 나 봐 봐. 너 맞았어?!
- 아니야. 넘어진 거라니까.
- 아, 얼굴 좀 들어 보라고!
그만 올라가서 쉬고 싶은데, 놈이 자꾸 우악스럽게 머리카락을 들췄다.
- 너, 멍 이거 뭐야? 어떤 새끼야. 어떤 개새끼가……!
놈의 손에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별일 아니라고.
- 이 계집애가 이게 별일이 아니긴, 뭐가……!
- 별일 아니라고, 제발! 별일 아니라고,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
치부가 까발려진 나는, 나도 모르게 둘째의 손을 뿌리치고 발작처럼 소리 질렀다.
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첫째마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 순간 내 자신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다.
저들끼리 오붓하게 모여서 과일이나 먹고 있을 때, 나는 체육 창고에서 피 터지게 얻어맞고 있었단 사실이.
- 언제부터 나한테 신경 썼다고!
그런데도, 현관에 들어섰을 때 거실에 정답게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거기에 낄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
- 제발 나 좀 가만 놔둬! 내가 언제 뭐 해 달라고 한 적 있어? 그냥 가만있기만 했는데, 왜! 왜 자꾸……!
거실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울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간 꾹꾹 눌러 참아 왔던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인간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며칠 후, 눈덩이에 시퍼렇게 들었던 멍이 다 빠질 때쯤 둘째 놈이 나를 찾아왔다.
- 그 새끼들 다 찾아내서 죽기 직전까지 후드려 팼어.
인사도 없이 대뜸 꺼낸 말이 그거였다. 몇몇 문제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대충 알고 있었다.
- 네가 평소에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런 날파리 같은 새끼들이 그 지랄을 하겠냐?
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고 빈정거렸다.
- 아무튼 다시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으스대듯 지껄이는 둘째 놈이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더 고립됐다. 왕따가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나아진 건 하나도 없었다.
- ……고마워, 오빠.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고맙다고 하는 대신, 너 때문이지 않냐고 괴성을 지르고 싶었다.
네가 싸지른 똥 네가 치우는데,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냐고.
나는 그냥, 네가.
네가 정말로…….
“……것뿐이라면서,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커다란 고함이 귓가에 텅텅 메아리 쳤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가물가물 떴다.
“……라도 해 봐. 너는 물론이고 황태자 그 미친 새끼를 당장……!”
“……시끄러워.”
짓눌리듯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자, 누군가 곧장 다가왔다.
“야, 너 정신이 좀…….”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다가온 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한 말투 때문에 누군지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둘째 개새끼였다.
“……난 네가…… 싫어.”
나는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있는 힘껏 쥐어짰다.
“……진짜, 너무 싫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
“네가 제일 싫다고.”
힘겹게 그 말을 마친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없이 잠에 빠지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지진 일 듯 흔들리던 푸른색 눈동자, 석상처럼 굳어진 분홍 머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