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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화 (1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화

나흘이 지나서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가씨…… 이젠 괜찮으신 거죠?”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울먹이는 에밀리의 얼굴이었다.

“응. 괜찮아.”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세요? 공작님과 도련님들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러니?”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겠거니 싶어서 나는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에밀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조잘거렸다.

“그럼요! 소공작님이 사색이 돼서 아가씨를 안고 저택까지 뛰어오셨다니까요!”

“……첫째 오라버니가?”

“네! 공작님께선 수도에 있는 명의들을 몽땅 불러들이라고 성화셨고, 둘째 도련님이 당장 황궁으로 뛰쳐나간다고 하시는 것을 집사님이 간신히 말리셨어요.”

이어지는 에밀리의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물론 과장이 섞여 있긴 하겠지만, 페넬로페라면 치를 떠는 이 집 인간들이 내가 쓰러진 것을 신경 쓸 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제가 정말 아가씨 어떻게 되시기라도 할까 봐…….”

“고생했겠네, 에밀리.”

“고생은요! 그런 소리 마세요. 전 아가씨 전담 하녀잖아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꽤 여러 일이 있었나 본데?

바늘로 찌를 땐 언제고, 눈물을 글썽이다 냉큼 ‘전담 하녀’를 강조하는 에밀리의 모습이 좀 어이없었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닌데. 아가씨가 깨어나셨다고 얼른 공작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에밀리는 부산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올 때, 메론 셔벗.”

* * *

일어나자마자 나는 거울부터 확인했다.

앓아누운 게 거짓이 아닌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칼에 닿았던 목은 붕대로 두껍게 칭칭 감겨 있었다.

“무슨 붕대를 이렇게 많이 감아 놨어?”

누가 보면 베인 상처가 아니라 목이 부러진 줄 알 정도였다.

답답한 기분에 붕대를 풀까 하던 나는, 이내 조금 더 참기로 했다.

당분간 환자 노릇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에밀리가 돌아오면서 가져다준 조개 스튜와 메론 셔벗까지 야무지게 먹은 후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펜넬입니다.”

방문자는 집사였다.

지난번 일 이후로 그는 더 이상 허락 없이 방문을 열어젖히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용건이 있을 땐 다른 이를 보내라고 했는데?’

아직 집사를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에밀리를 대신 보냈다.

“가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듣고 오렴.”

에밀리는 군말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녀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찾으신다는데요?”

“아버지가?”

이 집의 절대 권력인 가주의 명령을 다른 이를 통해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집사가 내 방을 찾아온 이유를 어느 정도 납득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겉옷 좀 가져다줘, 에밀리.”

“옷은 안 갈아입으시게요, 아가씨?”

에밀리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방금 일어난 나는 하얀색 원피스 잠옷 차림새였다. 어른을 찾아뵙기엔 적절치 않았다.

“환자가 옷 차려입는 거 봤니?”

그러나 그녀가 가져다준 겉옷을 잠옷 위에 껴입으며 나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내놓은 양딸이라지만,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를 못 참고 불러 대냐.’

자의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황궁 연회에서 또 소란을 일으켰다.

지난번 소란에도 가차 없이 근신형이 내려졌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구박을 해 댈까.

탓하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피하려면 아프다는 티를 팍팍 내야 했다.

다행히도 사경을 헤매는 동안 얼굴에 살이 팍 내려서 굳이 티 내지 않아도 병자 같은 몰골이었다.

‘에휴, 내 팔자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 서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집사가 내 기척에 번뜩 몸을 바로 했다.

“가시죠, 아가씨.”

그리고 배에 손을 올린 채 앞쪽을 향해 공손히 손짓하는 것이다.

‘뭐지?’

공작의 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집사는 먼저 앞장서서 안내해 왔었다.

의아하다는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자, 그가 갑자기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한낱 종 주제에 모시는 주인보다 앞서 걸을 수는 없습니다.”

저번에 성질 좀 냈다고 나를 조롱하는 건가 싶어서 집사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장한 얼굴이 꼭 칼을 갈고 이날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앞서가시지요, 아가씨.”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내 귀엔 달리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가게를 다시 찾은 단골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오늘따라 공작가 분위기가 유달리 이상했다.

‘왜들 저러는 거야?’

내가 방 밖을 나설 때마다 나를 흘겨보기 바빴던 고용인들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깔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내 뒤에서 눈을 번뜩 부라리며 걷고 있는 집사 때문이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아가씨, 잠시.”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쯤, 소리도 없이 뒤에 서 있던 집사가 튕기듯 앞으로 나왔다.

똑똑똑-.

“공작님. 페넬로페 아가씨께서 내려오셨습니다.”

“들여보내.”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는 아주 깍듯한 태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아가씨.”

아무렇지도 않게 열린 문틈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는 내심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앓아누운 사이 집사는 어디 예절 훈련소라도 다녀온 것 같았다.

“왔느냐.”

공작은 얼마 전 보았을 때와는 달리 책상 앞에 있는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부르셨어요.”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 또한 가볍게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라.”

나는 공작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들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공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아버지.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나는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재빨리 막아섰다.

그리고 방금 자리에 앉았던 것이 무색하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내 작전은 이거였다. 무조건 선수 치기.

“근신하는 동안 아직 반성을 제대로 못 했는지, 제가 또 연회에서 소란을 일으켜 가문에 먹칠했습니다.”

준비했던 말들이 막힘없이 줄줄줄 나왔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방금 병석에서 일어난 딸이 이렇게 잘못을 비는데 설마 내쫓기라도 하겠는가.

“아니, 잠깐.”

과연 내 작전이 통한 듯, 이런 내 행동에 공작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감히 용서해 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겠습니다. 제 잘못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그게 무슨…….”

“어떤 벌이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조금만 봐주면 안 되냐는 말을 마저 하려던 나는,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치는 공작의 저지에 입을 다물었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작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헉. 한번 써먹어서 이제 안 통하는 건가?’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답했다.

“……네, 아버지.”

“일어나라.”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러니 함부로 몸을 낮추지 마라, 페넬로페.”

“…….”

“네가 에카르트인 이상 그 누구도 너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황족일지라도!”

‘황족’에서 유난히 목소리가 커지던 공작은, 이내 나를 돌아보며 강력하게 명령했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거라.”

“……네, 넵!”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게임에서도 보지 못했던 공작의 엄청난 카리스마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뭔 말을 잘못했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공작이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페넬로페. 내가 오늘 너를 부른 건, 널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네? 그럼…….”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듣고자 함이야.”

“…….”

“말해 보아라. 황태자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의 물음에 나는 기절하기 직전의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죽겠답시고 황태자를 쫓아갔다가, 놈이 뽑아 든 칼에 목이 베일 뻔했다.

그리고 그 미친놈을 좋아한다는 개소리를 시전해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때를 떠올리자니 또다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게…….”

반사적으로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공작이 날카롭게 주시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어렵사리 변명을 만들어 냈다.

“바람을 좀 쐬러 미로 정원으로 나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황태자님을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런데 마침 전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실 때여서…….”

진짜 전말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소리였다.

여기로 온 후 나는 프로 거짓말쟁이가 돼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완전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

“황태자가 기분이 안 좋다며 네 목을 그렇게 난도질해 놓은 것이냐?”

말끝을 흐리는 내 모습에 공작이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득달같이 물었다.

“예? 아니요. 난도질까진…….”

“난도질이 아니면! 망나니도 아니고, 그가 제 기분 좀 안 좋다고 가만있던 귀족 여식에게 칼을 들이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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