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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화 (1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화

무슨 이유에선지 공작은 크게 대노했다.

어디서 황태자가 귀가 간지럽다고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만히만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얼른 덧붙였다.

“머먼저 그분의 심기를 거스른 건 저인걸요.”

“잘했다.”

“……네?”

“네 병환을 빌미 삼아 황태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겠지. 훌륭한 에카르트의 일원이 되었구나, 페넬로페.”

나는 번번이 예상을 빗나가는 공작의 반응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한 번쯤은 콧대를 꺾어 놨어야 했다.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을 등에 업고 너무 기세등등해졌지.”

“아, 아버지.”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황족 모독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당황하는 나와 달리 공작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에카르트가 중립파라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겠지, 페넬로페.”

“네, 그럼요.”

아니. 전혀 몰랐다.

“아무리 적통일지라도 뒷배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기 마련이다. 황후 마마께서 돌아가시고,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지.”

“…….”

“게다가 황태자가 전쟁터로 나간 틈을 타 2황자의 모친인 황비가 황궁을 장악해 버렸다.”

“…….”

“다음 대의 황제가 누가 될지 아직 판가름 나지 않은 시기야.”

나는 황태자에게 이런 뒷배경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다.

빌어먹을 게임에선 남주들을 공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나왔기 때문이다.

‘어쩐지. 연회에서 미친놈처럼 날뛴 이유가 있었구나.’

왜 황비와 2황자가 황태자에게 암살자를 보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니 앞으로도 너는 하던 대로 행동하면 된다.”

말을 끝맺은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이번에는 특별히 행동거지를 잘했으니 벌이 아닌 상을 줘야겠군. 원하는 게 있느냐?”

“상이요?”

혼날 각오만 하고 왔지, 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또 보석상들을 불러 주랴? 아니면 계절이 바뀔 시기니 전에 입던 드레스들은 모두 버리고 새로 맞추는 것도 괜찮겠구나.”

스케일이 남다른 보상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웬 떡이냐.’

하지만 페넬로페가 사들인 것만으로도 넘치게 많았으므로, 공작이 말한 것들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뭘 받으면 좋을지 고민하던 나는, 이내 간결하게 답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달칵, 공작의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왔을 때였다. 불현듯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공작가 주변인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5 되었습니다. (total : 5)

“허.”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뭘 했다고?’

관계 개선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기어오르지 못하게 조금 협박한 정도…….

‘황태자 때문에 다친 게 그렇게 큰일이었나?’

공작의 반응도 그렇고, 생각과는 너무 다른 일이 마구 일어나 놀라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좀 뿌듯하기도 했다.

호감도든 명성이든, 플러스는 무조건 좋은 것이니까.

‘좋아. 이대로만 가자고.’

* * *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막 방으로 돌아온 나를 에밀리가 반겼다.

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책상으로 가 앉았다.

공작에게 뭘 받아 낼지 외에도 생각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가씨. 이거…….”

그런 내 뒤를 에밀리가 쪼르르 쫓아와 무언가를 건넸다.

“아가씨 쓰러지시던 날, 목에 대고 계시던 것이에요. 소공작님께서 그 냥 버리라고 하셨는데, 혹시 몰라 세탁해 두었어요.”

“아.”

나는 에밀리가 내민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손수건.

뷘터 베르단디가 줬던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마워, 에밀리.”

나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짓을 한 에밀리를 칭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피로 흥건히 젖었던 것이 언제였냐는 양 본래의 순백색으로 돌아간 손수건을 바라보며, 나는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답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원하지 않은 배려였지만, 어쨌든 예의는 차려야 했다.

그리고 그가 남주인 이상 한 번은 다시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에밀리, 집사에게 가서 내일 보석상을 불러 달라고 전해 줄래?”

“보석상이요?”

뜬금없는 내 요청에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뼉을 쳤다.

“아! 아가씨, 축제 때문에 새로 액세서리를 맞추시려고요?”

“축제?”

처음 듣는 소리에 어리둥절 되묻자 그녀가 곧바로 답했다.

“다음 주가 건국제잖아요! 황태자 님이 귀환하셔서 이번에는 축제가 훨씬 성대할 거라고…….”

“황태자 얘기는 하지 말고.”

싸늘해진 내 목소리에 에밀리가 헙,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황태자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그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에밀리의 모습에 나는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어서 집사한테나 다녀와.”

“네! 얼른 다녀올게요!”

그녀가 나가고 방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다음 주가 축제란 말이지…….”

게임에서는 각 남주들과 만나는 에피소드가 차례대로 열린다.

이를테면, 가장 처음 마주하는 데릭과 레널드 루트를 어느 정도 진행하자 황태자 루트가 열린 것처럼 말이다.

뷘터까지 바로 연달아 만난 것은 좀 의외였다.

어쨌든 그도 황궁 연회에서 만나는 건 맞으니, 지금까지는 게임과 다를 바 없이 진행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뷘터 다음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남주, 기사 이클리스.

게임에서 공작이 마지막 남주를 데려왔을 때가 분명 축제 기간과 맞물렸다.

“축제 때 페넬로페가 뭐 했더라…….”

나는 공작이 새로운 남주를 데려왔다는 알림만 확인했을 뿐, 하드 모드에선 이클리스의 머리털도 보지 못했다.

왜냐면 데릭과 레널드 루트 중 ‘함께 축제 구경하기’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거 깨다가 계속 죽기 바빴다.

“그때 생각하니까 또 혈압 오르려고 하네.”

결국, 그놈들 중 아무와도 축제 구경을 하지 못했었다.

은근히 치미는 부아를 애써 밀어내며 나는 허겁지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깊숙이 숨겨 둔 종이를 꺼냈다.

이전에 적어 두었던 것을 빠르게 읽어 내린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작보다 먼저 구해야 해.”

황태자가 뽑아 든 칼에 죽다 살아난 후 나는 한 가지 굳게 다짐했다.

이제 막 죽어 볼 수도 없는 처지니, 누구보다 빠르게 엔딩을 깨서 이 망할 곳을 탈출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호감도를 올리기 가장 만만한 놈에게 몰빵해야 했다.

“이클리스.”

나는 마지막 남주의 이름을 바라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너로 정했다.”

* * *

나는 요즘 산책이라는 명목하에 바깥을 쏘다니기 바빴다.

공작저는 마을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드넓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후원과 드넓은 뜰을 지나면, 가문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과 숙소, 그리고 작은 숲이 펼쳐진다.

‘개구멍이 어디 하나쯤은 있을 텐데…….’

실은 축제를 대비하여 몰래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부지가 워낙 넓어 영 쉽지 않았다.

오늘도 개구멍 찾기에 실패한 나는 지친 걸음으로 후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밀리에게 다과를 부탁한 후, 커다란 나무 아래 철푸덕 주저앉아 책을 읽었다.

책 내용이 한참 클라이막스에 올랐을 때, 문득 ‘바스락-’ 하는 인기척이 들렸다.

“에밀리. 나 책갈피 좀.”

끝이 얼마 남지 않아 책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만 뻗었다.

그러나 남은 페이지를 모두 다 읽을 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에밀리?”

책을 덮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몸은…… 좀 괜찮나?”

내 옆엔 에밀리가 아닌 전혀 뜻밖의 인물이 다과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어…….”

[호감도 8%]

나는 며칠 만에 다시 본 데릭의 머리 위를 보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6%였는데 대체 왜 더 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휘우웅-. 그와 나 사이에 산뜻한 꽃향기를 담은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 때문에 시야가 잠시 가려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앉은 채로 방자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데릭이 말렸다.

“됐어. 일어날 것 없다.”

“괜찮아요. 이제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그럼 다과는 필요 없는 건가?”

“아…….”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쟁반을 다시 보고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어디 시킬 사람이 없어서, 하필!’

“에밀리가 소공작님께 이런 부탁을 하던가요?”

“아니. 너와 긴히 나눌 대화가 있으니 내가 먼저 들고 가겠다고 했다.”

“저랑요?”

페넬로페의 뒷모습만 봐도 혐오스러워하던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의아해졌던 나는, 금방 그가 하려던 말을 알아차렸다.

“그날 일 때문이시죠?”

공작은 어찌어찌 넘어갔다 하더라도, 데릭 놈은 어림없을 것이다.

‘에휴. 공작에게 하려던 사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골랐다. 그리고 기계처럼 영혼 없이 와다다 내뱉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

“저 때문에 많이 당황스러우셨죠, 소공작님. 아버지께 당분간 알아서 집에서 근신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혹시 그때 하셨던 것처럼 더 엄벌이 필요한 거라면…….”

“내가 하려던 말은.”

그때 그가 내 말을 차갑게 끊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야.”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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