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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화 (1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화

‘뭐야. 이거 아니야?’

나는 그의 머리 위를 힐끔거리며 되물었다.

“그럼 무슨 일로…….”

“왜 다시 소공작으로 돌아간 거지?”

“……네?”

“아니, 아니다. 말을 잘못했군.”

내가 채 알아듣기도 전에 데릭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널 찾은 이유는 이것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손으로 쟁반을 받쳐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품을 뒤적이는 기교를 부렸다.

나는 데릭이 내게 건네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고 투박한 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용의 스카프였다.

“이건…….”

“공식 석상에서까지 지금 같은 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가 쌀쌀맞게 뇌까리며 내 목을 흘깃 눈짓했다.

놈의 분노를 피하고자 아직까지도 목에 깁스처럼 붕대를 둘둘 감싸 놓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내 꼴이 우스울 만도 한데, 데릭의 얼굴은 웃음기 한 점 없이 무표정했다.

“안 그래도 네 평판이 바닥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름도 모르는 놈팡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다가 또 무슨 소문이 돌지 모르지.”

“…….”

“무엇을 행하기 이전에 네가 가진 성의 무게를 항시 생각하도록.”

나는 스카프와 데릭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지금 뷘터가 준 손수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데릭이 에밀리에게 버리라고 시켰지만, 그 손수건은 고이 세탁된 채 지금 내 방 서랍에 보관 중이다.

‘남자가 준 것은 또 어찌 알았대?’

나는 소름 끼치는 그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보자마자 필시 주제 파악 못 하고 또 사고를 쳤냐고 구박할 줄 알았는데…….

데릭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나는 이런 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이내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페넬로페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를 배려하여, 서로의 손이 닿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며 스카프를 받아들였다.

‘올. 좀 비싸 보이는데?’

선물답지 않게 포장지나 케이스 같은 것도 없었지만, 손에 닿자마자 보드랍게 감겨드는 천 자락이 딱 봐도 값이 나가 보였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소중히 사용할게요, 소공작님.”

그리고 고개를 들어 감사 인사를 마쳤을 때였다.

마주친 데릭의 푸른 눈이 일순 흔들리더니, 무표정하던 얼굴이 갑자기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왜, 왜 이래?’

나는 심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위태롭게 반짝이는 호감도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중.

“그…… 급한 일을 깜박했군.”

그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과 쟁반을 그대로 든 채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후원을 벗어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왜 저러는…….”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 순간 눈이 커다래졌다.

[호감도 10%]

그의 머리 위, 흰 글씨가 변했다.

“대체 뭐냐, 이 게임…….”

순식간에 데릭이 사라지고, 혼자 남겨진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집 형제 놈들의 호감도는 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계속 죽은 거겠지만.’

손에 들린 스카프를 내려다보자니, 어째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플레이 했던 게임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 *

“찾았다!”

마침내 저택 밖을 뒤지고 뒤져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냈다.

저택을 감싸고 있는 담벼락은 철통 방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연무장 근처에서 기사들이 땡땡이를 칠 때 몰래 이용하는 듯한 개구멍을 발견했다.

수풀로 위장을 잘해 놓은지라, 돌부리에 걸려 그 위로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 이 망할 게임은 왜 이런 건 안 알려 주는 거냐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던 나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라 걸려 넘어진 돌을 걷어찼다.

그리고 돌아간 스카프를 원래대로 잘 여몄다.

얼마 전부터 우스꽝스러운 붕대 신세에서 벗어나 데릭이 준 스카프로 상처를 가리고 다니는 중이다.

“후…… 그래도 축제 전날에 찾아서 다행이네.”

축제의 시작이 바로 내일, 코앞까지 다가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물론 공작이나 데릭에게 허락을 구한다면 쉽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갖 인파가 수도로 몰리는 기간에 호위 하나 없이 공녀 홀로 길거리에 내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깊은 밤중에 은밀히 열리는 노예 시장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이렇게 개고생하면서 구하러 가는 거니 그만큼 내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거야, 이클리스.”

나는 드러난 개구멍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넘어지는 바람에 흐트러진 위장 수풀을 원래대로 정리했다.

막 일을 끝내고 허리를 폈을 때였다.

“야, 너 거기서 뭐 하냐?”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분홍 머리칼 위에서 반짝이는 글씨를 보고 곧바로 눈을 의심했다.

[호감도 7%]

일주일 만에 보는 레널드의 호감도가 4%나 올라 있었다.

‘아니, 이 집 형제 놈들은 페넬로페를 아예 안 봐야지만 호감도가 오르는 거야?’

나는 뭔가 억울해졌다.

게임할 때는 에피소드를 깨야 하니 안 볼 수가 없어서 몰랐다.

이렇게 쉽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었다니.

수없이 리셋을 반복하느라 지새웠던 내 날밤이 너무 아까웠다.

“뭘 멍하니 보고 서 있어. 뭐 하냐니까?”

“어, 어?”

재촉하는 레널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얼른 호감도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그냥, 산책 좀.”

“그냥 산책……?”

내 대답에 레널드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냥 산책을 하필 개구멍 근처에서 하다니, 그것참 기가 막힌 우연이네.”

“…….”

헉, 하고 기겁하는 소리를 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뒷목에 소름이 확 끼쳤다.

‘대체 이놈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다시 잘 가려 놨는데!’

도로 정리해 놓은 위장 수풀을 흘끔 곁눈질했지만 흐트러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나는 덜컹거리는 가슴을 추스른 후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돌렸다.

“……그러는 넌 왜 여겠어?”

“이제 훈련 끝나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 본 레널드의 분홍 머리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훈련을 위해 입은 헐거운 옷자락 사이로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비쳤다.

‘오호. 몸 좋은데.’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단단한 근육질인 몸의 괴리가 묘하게 섹시했다.

‘그래. 이런 볼거리라도 있어야 이 망할 곳에서 살아남을 맛이 나지.’

나는 게슴츠레 놈을 훑어보다가, 안 그런 척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럼 가던 길 가. 나도 마저 산책하러 갈 테니까.”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걸음을 옮겼다. 녀석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졌을 때였다.

“야, 아서라.”

문득 뒤통수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호감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멈춰 뒤돌았다.

“……뭐가?”

“너 4년 전에 이 근처에서 땡땡이 치는 놈들 따라 한답시고 담벼락 넘다가, 다리 몽둥이 부러져서 싹 다 증축한 거 벌써 잊었냐?”

“…….”

“그때 기사들이 네 욕하던 거 적어서 책으로 만들면 열 권도 넘게 나올 거다.”

어쩐지 저택 부지 주변을 두른 담벼락이 유난히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그런 일이 다 있었단 말이야?! 하. 얘는 진짜…….’

4년 전이면 14살, 아무리 늦어도 예절 수업을 거의 다 깨쳤을 때였다.

게임에선 나오지 않았던 페넬로페의 엄청난 과거와 레널드의 빈정거림에 짜증이 솟았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들어도 못 미더운 목소리였다. 레널드는 그런 내게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차라리 아버지께 허락 맡고 당당하게 대문으로 나가라. 또 기상천외한 짓거리해서 욕 들어 처먹지 말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퉁명스럽게 쏴붙이자 놈은 더 말을 보태진 않았다.

대신 끝까지 나를 미심쩍게 응시하다가 홱 몸을 틀어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호감도 7%]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레널드]와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레널드의 호감도 +3% 외 기타.)

[수락 / 거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우려하던 퀘스트가 나타났다.

“이걸 저놈이랑 또 해야 한다고? 게다가 보상이 고작, 3%?”

방금 전 싸가지가 아주 훌륭하던 레널드 놈의 말투를 떠올리며 나는 진저리를 쳤다.

게임할 때는 그 3%가 아쉬워서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리고 무한 리셋을 눌러야 했다.

더 억울한 건 결국 끝까지 못 깼다는 것이다.

“안 해, 안 해!”

더 볼 것도 없이 ‘거절’을 연타로 눌렀다.

“지금도 이렇게 나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놈이랑 무슨 축제 구경을 해?”

나는 이제 고작 3%가 아쉬운 처지가 아니다. 내게는 무려 ‘10%’와 ‘7%’나 있지 않은가!

게다가 태평하게 축제나 보자고 이 고생을 하며 나가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레널드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얄미운 놈.’

그렇게 밉살맞게 말하면 페넬로페는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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