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화 (1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화

“……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헉, 헉.”

나는 레널드에게 어제 미처 못다 한 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침대보 묶음을 던졌다.

그리고 힘에 부쳐 창틀에 엎어진 채 한참을 헉헉거렸다.

축제의 첫날이 밝았다.

밤이 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 나는 에밀리가 잠자리 시중을 마치고 나가자마자 벽장에서 침대보를 다 꺼내어 묶었다.

탈출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이제 한번 내려가 보자고.”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된 나는 창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미 준비는 철저하게 끝마친 상태였다. 머리카락과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로브를 구해 입었다.

그리고 공작이 일전에 준다던 보상으로 받아 낸 백지 수표와 소량의 금화도 챙겼다.

남은 것은 무사히 2층을 내려가는 것뿐이다.

“하……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다니.”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한탄하던 나는, 이내 굳게 마음을 먹고 몸을 내렸다.

침대보 밧줄에 매달린 후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고작 2층이었다. 저택 밖을 오가며 눈대중을 여러 번 해 본 결과 충분히 내려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분명 그랬는데…….

“……미친.”

묶은 침대보의 길이가 훨씬 짧았다.

그냥 뛰어내리기엔 누군가를 깨울 만큼 요란한 소리가 날 수도 있고, 어두워서 자칫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만한 높이였다.

“대체……!”

눈대중과 현실이 이렇게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절규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방 창문까지의 거리가 상당했다. 게다가 다시 거꾸로 오를 만한 체력도 남지 않았다.

간신히 떨어지지 않도록 침대보를 붙들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 나 어떡해.”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 안 가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그러더니 조금씩, 조금씩 몸이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아래를 흘끔 내려다보자, 의욕이 앞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소공포증이 갑작스레 몰려왔다.

“나 진짜 어떡해…….”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 망스러운 상황에 훌쩍거렸다.

그때였다.

“야. 너 지금, 뭐 하냐?”

불현듯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허.”

헛웃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레널드?”

희미한 달빛에 분홍 머리칼이 비쳤다.

레널드가 아래쪽 창문에서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장난하냐? 네 방 아래층이 내 방이거든?”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놈의 방이 페넬로페의 방 밑인 줄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너 지금…… 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너 지금 가출하냐?”

“가출이라니!”

나는 매도하는 말에 펄쩍 뛰었다.

“자, 잠깐 외출 좀 하려는 거야.”

“외출? 요즘 네 또래 기집애들 사이에선 외출할 때 벽 타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 보지?”

“…….”

나는 차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다. 침대보를 붙들고 있는 내 팔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풀리더니 눈 깜짝할 새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침대보 끝자락을 붙잡았다.

“헉, 허억…….”

내 몸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은 꼴로 저택 외벽에 붙어 대롱대롱 흔들렸다.

“야!”

그때, 레널드가 버럭 소리치며 제 방 창틀 위로 재빠르게 올라섰다.

나를 연신 올려다보며 허겁지겁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창백해 보였다.

“손 놔.”

밖으로 나온 레널드는 내가 매달려 있는 쪽을 향해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뭐, 뭐라고?”

“손 놓고 내 쪽으로 뛰어내리라고. 받아 줄 테니까.”

그 순간 ‘널 뭘 믿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뛰어내리기 싫으면 거기 계속 매달려 있든지.”

그러나 망설이는 사이 쏘아붙이는 그의 목소리에 별수 없이 선택해야 했다.

“……놓치면 안 돼. 잘 받아 줘.”

나는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설마 아무리 미운 양동생이라지만 일부러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 생각을 애써 되뇌며 마침내 꽉 움켜쥐고 있던 침대보 자락을 놓았다.

“흐읍-!”

매서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이 기구를 타는 것처럼 아찔함이 전신을 덮쳤을 때.

탁-.

“잡았다.”

눈을 뜨니 악동처럼 씨익 웃고 있는 레널드의 얼굴이 보였다.

“……내, 내려줘.”

나는 얼굴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내려왔다.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레널드가 불쑥 물었다.

“어디 가려는 건데.”

“그냥 산…….”

“또 그냥 산책 얘기하는 거면 아버지한테 지금 달려간다.”

득달같이 말을 자르는 놈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왜 걸려도 하필 이놈한테 걸려 가지곤.

‘아니야. 그래도 데릭한테 걸리는 것보단 낫지.’

나는 이내 생각을 달리하며 순순히 변명을 내뱉었다.

“축제 구경하러 가려는 거야.”

“훤한 대낮 놔두고 이 오밤중에 구경하러 간다고? 이 난리를 치면서?”

“그럴 사정이 있었어. 네가 알 필욘 없는 사정이야.”

“호위 하나 없이 혼자 축제 보러 가는 게 사정은 무슨! 너 이 시기에 집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냐? 계집애가 겁도 없이…….”

“레널드.”

나는 짜증스럽게 그를 불렀다.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워. 그런데 내가 저번에 부탁했잖아.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더 이상 관심 갖지 말라고.”

“야. 너…….”

레널드는 차갑게 선을 긋는 내 모습에 말문이 막힌 듯 버벅댔다.

나는 [호감도 7%]를 흘깃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온전히 내 스스로 책임질 일이야. 그리고 형제로서 이런 일은 그냥 못 본 척 배려해 주는 게…….”

“그럼 나도 같이 가.”

“……뭐?”

대뜸 들려온 대답에 이번에는 내 말문이 막혔다.

멍한 표정을 짓는 내게 레널드 놈은 태연스럽게 지껄였다.

“같이 가면 되겠네. 그럼 네 호위 노릇도 하고, 겸사겸사 형제로서의 배려도 지키고. 다 된 거 아니냐?”

“…….”

“아버지한테 비밀로 해 줄게. 같이 나가.”

‘허.’

나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놈이 왜 이런단 말인가.

‘페넬로페만 보면 이를 갈기 바쁜 놈이, 무슨 축제 구경을 같이 가자고!’

나는 마구 떨리는 눈으로 이제는 그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넌 나 싫어하잖아. 그런데 왜 굳이…….”

“누가 싫대?!”

하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백 배, 천 배 싫어 죽겠다고 빽빽거린 건 지면서!”

“쉿!”

난 깜짝 놀라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누군가 놈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을까 겁났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건지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님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는 인상을 쓰며 놈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말 지어내지 말라고 대거리를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여의치 않았다.

빨리 이클리스를 구하러 가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할 적, 레널드 놈이 불퉁하게 통보했다.

“아무튼, 같이 가는 걸로 알아라. 네가 싫대도 뒤따라 갈 거야.”

그 순간이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레널드]와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레널드의 호감도 +3% 외 기타.)

[수락 / 거절]

눈앞에 하얀 네모 창과 함께 어제 거절했던 퀘스트가 다시 떴다.

나는 단단히 결심한 듯 고집스러운 레널드의 얼굴과 퀘스트 창을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그래. 같이 가자, 가.”

* * *

레널드와 함께 말없이 연무장까지 걸었다.

어제 발견한 개구멍 앞에 도착하자 놈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빠르게 위장 수풀을 치우고 드러난 개구멍에 막 몸을 쑤셔 넣으려던 찰나였다.

“지금 둘이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레널드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호감도가 제일 먼저 보였다.

“이 밤중에 어딜 가려는 거냐.”

“형.”

뚜벅뚜벅 걸어 다가온 데릭은 막 개구멍에 몸을 쑤셔 넣으려던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 그게…….”

환장할 상황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할 때였다.

빌어먹을 레널드 놈이 선수 쳐서 나를 가리켰다.

“얘가 축제 구경 가고 싶대, 형.”

“축제 구경……?”

“어. 그래서 내가 얘 사고 치나 안 치나 호위 및 감시 겸 대신 따라가기로 했어.”

잠시 레널드에게 옮겨 갔던 데릭의 눈이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서슬 퍼런 시선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클리스 몰빵은 실패야.’

채 시작도 못 하고 막혀 버린 이클리스 루트에 우울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릴 때였다.

“귀족의 호위는 기본이 2인 1조다.”

데릭의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러니 나도 같이 가지.”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불현듯 하얀 네모 창이 또 다시 떠올랐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데릭]과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데릭의 호감도 +3% 외 기타.)

[수락 / 거절]

‘망했구나. 하하하!’

나는 완전히 해탈한 채 그냥 웃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