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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화 (2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화

과연 축제의 꽃은 밤거리인지, 공작저를 얼마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산하기 그지없던 대로변은 화려한 풍등과 온갖 노점상들로 북적였다.

이런 축제들은 현생에서도 많이 접했다. 때문에 나는 그냥 무심하게 휙휙 지나쳤다.

“야. 너 구경하러 나온 애 맞냐?”

그런 내 모습이 영 이상했는지 참다못한 레널드가 물었다. 나는 그를 흘긋 바라보며 성의 없이 답했다.

“구경하고 있는데?”

“무슨 계집애가 뭐 사 달라는 것도 없고. 너 액세서리 같은 거 환장하잖아.”

그는 몰려 있는 여성용 잡화 노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내가 진짜 너랑 같이 축제나 즐기자고 나왔겠냐.’

나는 그런 그를 짜게 식은 눈으로 한번 바라본 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지금 축제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이클리스를 찾아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심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야, 잠깐 이리 와 봐.”

“어, 어!”

그때, 레널드가 내 손을 덥석 붙잡고 마구 끌고 갔다.

그런 나와 레널드의 뒤를 데릭이 별말 없이 뒤따랐다.

“자. 여기 좀 괜찮은 거 있네.”

레널드가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한 보석 잡화점 앞이었다.

“아이고, 어서들 오십쇼! 한번 골라 보세요, 손님들! 이번에 동방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요.”

뭐 하자는 건지 몰라서 그저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외쳤다.

“아, 한번 골라 보라잖아! 봐 봐, 얼른!”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축제 기간에만 볼 수 있을 법한 독특한 장식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별로 사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페넬로페의 보석함은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나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그때.

“이게 좀 괜찮군.”

내 옆으로 불쑥 팔이 뻗어 나왔다. 데릭이 무언가를 잡아 들었다.

백금 줄에 잘 익은 자두색의 보석들이 자잘하게 달린 팔찌였다.

“아이고! 역시 보통 눈이 아니십니다, 손님! 이 팔찌로 말할 것 같으면 저어기 동방의 광산에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보석을 석 달 밤낮으로 가공한…….”

건수를 잡았다 싶었는지, 상인이 침을 튀기며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데릭이 들고 있는 팔찌를 보고 기분이 묘해졌다.

자줏빛 보석들이 내 머리 색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나 주려는 거겠어?’

나는 [호감도 10%]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지나친 억측이었다.

“그럼 난 이거.”

레널드가 계산하는 분위기 같길래, 나도 얼른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랐다.

데릭이 든 팔찌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던 상인의 입이 왜인지 이번엔 딱 다물렸다.

“……진짜냐?”

레널드는 내가 든 것을 바라보며 미간을 한껏 구겼다. 표정이 이상한 건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응. 이 가면.”

내가 고른 것은 가판대 구석에 쑤셔 박혀 있던 흰색 가면이었다.

웃는 상으로 휘어진 눈코와 입만 뚫려 있는 것이, 하회탈이랑 비슷했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로브를 뒤집어썼다 해도, 노예 시장에서 나같이 어린 여자애를 들여보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내 선택은 정당하고 현명한 것이었다.

“이걸로 살래.”

“야. 너 안 그래도 내가 좀 물어볼 게 있었는데…….”

확정 짓는 나를 보며 레널드가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요즘 어디 아픈 데 없냐? 머리가 가끔 어지럽고, 깜빡 잠들었다 정신을 차리면 다른 장소에 서 있고, 막 그러진 않냐고.”

“사 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진짜로 이걸 가지고 싶다고?”

“그렇다니까!”

나는 몇 번이고 확인하는 레널드 놈에게 결국 신경질을 부렸다.

놈은 영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흘끔거리며 마지못해 데릭의 팔찌와 내 가면을 계산했다.

그 순간이었다.

뿌우우우-! 멀찍이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바라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리 한복판을 가득 메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팡, 팡 폭죽이 터지더니 주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퍼레이드의 시작이었다.

퍼레이드 행렬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퍽, 어깨를 치이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 당황할 무렵.

“잡아라.”

불쑥 눈앞에 고급스러운 겉옷 소매가 들이밀어졌다. 데릭이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사해요.”

이러다 인파에 휩쓸릴 것 같았으므로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짚은 곳이 잘못됐는지 손바닥에 무언가가 달그락거렸다.

뿌우우-!

그때, 퍼레이드의 행렬이 막 우리가 서 있는 노점상 앞을 지나갔다.

나는 휩쓸리지 않도록 데릭의 소매를 있는 힘껏 쥐었다.

그러나, 투툭-.

“어, 어……!”

“페넬로페!”

무언가 뜯어지는 감촉과 함께 데릭의 급박한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아, 안 돼…….”

무아지경으로 사람들 틈에 껴서 이동하던 나는, 한참이 지난 후 간신히 빽빽한 인간들 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처음 오는 음침한 골목 구석에 서 있었다.

데릭의 소매에서 뜯어진 금 단추 하나와 레널드가 사 준 가면만 달랑 든 채.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나는 어두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눈앞에 하얀색 네모 창이 떠오르더니.

〈SYSTEM〉 지금부터 [비운의 패전국 노예, 이클리스]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노예 경매장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렇게 갑자기요……?”

그리고 쫓아온 놈들 때문에 실패라고 생각했던 이클리스 루트를 곧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 * *

[예.]를 누르고 눈을 뜨니 노예 경매장 앞에 도달했다.

겉으로 봐서는 절대로 몰라볼, 어느 허름한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 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어.’

비록 다른 귀족들이 쓴 것과는 달리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지만 어쨌든 얼굴만 가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얼른 들고 있던 하회탈 가면을 쓰고 줄 뒤에 섰다.

머리 색이 안 보이도록 뒤집어쓴 로브를 한 번 더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서는 빠르게 줄어들어 내 차례가 되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조폭처럼 우락부락한 덩치의 사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초대장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나는 당황했다. 초대장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런 얘긴 없었잖아, 이 망할 게임아!’

내가 대꾸 없이 우왕좌왕하자 덩치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초대장 없습니까? 이곳은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초대장 없인 못 들어갑니다. 그럼 다음…….”

“자, 잠깐!”

회원제란 말에 번뜩 좋은 생각이 스쳤다. 나는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졌다.

“여기.”

내가 덩치에게 내밀어 보인 것은 뜯어진 데릭의 단추였다.

볼록 튀어나온 황금 위에 에카르트 가문의 상징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단추를 본 덩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대장을 깜빡 잊고 놓고 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귀, 귀한 분을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어, 어서 드시지요!”

그는 허겁지겁 비켜섰다. 나는 태연히 건물 입구를 지나쳤지만 속으론 내심 놀랐다.

‘공작가의 세가 이렇게 강했구나.’

물론 가끔 쓸 만한 노예를 구해올 만큼 공작이 이미 이러한 암흑 조직의 VIP 고객이었기에 쉽게 먹힌 걸지도 모른다.

게임 배경치곤 씁쓸한 일이었다.

“경매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입구를 지나자 안내를 맡는 시종이 붙었다. 나는 그를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일 때쯤, 계단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허름한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호화스럽고 광활한 공간에 다다랐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숨겨져 있었단 말이야?’

드넓은 홀은 마치 콜로세움처럼 꾸며져 있었다. 관중석에 앉으면 아래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리고 이걸 받으시지요.”

시종은 나를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앞쪽 자리에 안내한 뒤 피켓 하나를 건네고 떠났다. 경매할 때 쓰는 것이었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습니다!”

곧바로 경매가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커다란 목소리를 시작으로 무거운 추를 단 쇠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10골드! 10골드, 더 없습니까? 10골드 낙찰!”

하나같이 음울한 표정인 노예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빠르게 그들의 값이 매겨지고 낙찰되기를 반복했다.

뒤로 갈수록 점점 신기한 재주를 부리거나 빼어난 외모를 가진 노예들이 등장하면서 낙찰되는 값도 기하급수적으로 차올랐다.

“100골드! 100골드 없습니까? 아, 102골드!”

낙찰을 위한 눈치싸움과 치열한 경쟁으로 경매장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귀빈 여러분,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노예!”

무심한 눈으로 경매 진행을 지켜보던 나는, 무대 위로 올라오는 마지막 노예를 보고 몸을 부쩍 바로 했다.

“제국에 처절하게 패한 야만인들의 나라에서 건너온! 노예, 이클리스를 소개합니다!”

잿빛에 가까운 회갈색 머리.

구속구에 입이 틀어 막힌 흉한 몰골에도 관중석을 향해 섬뜩하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

이클리스였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이 노예의 소문을 들으셨겠죠?”

사회자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클리스에 대한 소문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 인간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한낱 귀로 듣는 소문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입죠! 그래서 저희가 오늘 오신 귀빈들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보시죠!”

사회자의 손짓과 함께 일꾼 하나가 이클리스에게 무언가를 휙 던졌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검술 연습을 할 때 쓰는 작은 목검이었다.

‘대체 뭐 하려는 거지?’

나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촤르륵-’ 쇠창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크르르르-!”

하이에나들이 무대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무려 다섯 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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