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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4화 (2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4화

“데릭.”

나를 닦달하는 놈을 말린 것은 공작이었다.

“독대 중에 이 무슨 버릇없는 짓이냐.”

엄한 목소리에 한순간 데릭의 눈이 흔들렸다. 나 또한 혼란에 휩쓸렸던 정신을 되찾았다.

데릭은 꽉 잡고 있던 내 두 어깨를 놓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풀린 어깨가 얼얼했다. 나는 한 손으로 잡혔던 팔뚝을 쓰다듬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뭐야, 왜 안 나가는 거야.’

데릭은 당연하다는 듯 공작의 책상 옆에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공작 또한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무조건 내 말을 같이 듣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후…… 상대할 보스가 둘이나 됐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큼. 그래. 네 말은 잘 알아들었다, 페넬로페.”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다행히도 미리 짜 놓은 변명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은 된 것 같았다.

한시름 돌리는 사이 그가 또 다른 의문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사들였으면 그대로 풀어 주면 될 것이지 굳이 집까지는 왜 끌고 온 것이냐.”

“이클리스는 무예에 무척 뛰어나요, 아버지. 그러니 말도 안 되는 값을 치르게 된 것이지요.”

나는 준비했던 말을 막힘없이 꺼냈다.

“이클리스를 견습 기사로 받아 주셨으면 해요. 쓸모가 많은 이 같습니다.”

“우리 가문의 기사로 말이냐?”

“네. 그냥 고용인으로 재능을 썩히는 것보단 정식으로 검술을 배우게 해서…….”

“듣고만 있자니 정도를 모르는군.”

그때 데릭이 불쑥 끼어들어 내 말을 칼같이 잘랐다.

“공작가에서 일거리를 주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이들이 넘쳐난다.”

“…….”

“그런데 평민도 아닌, 한낱 패전국의 노예 따위에게 검술을 배우게 해서 뭐에 쓴다는 말이냐.”

공작을 돌아보니 그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아, 저 자식은 왜 안 나가고 방해야.’

나는 치솟는 피곤함을 내리누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 전담 호위로 쓰려고요.”

“……전담 호위?”

“언제까지 호위 하나 없이 혼자 다닐 수는 없잖아요.”

평이한 어조에 이번에는 공작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네가 왜 호위가 없느냐. 공작령에 있는 기사들의 수만 다 합해도 2만이 넘는데.”

“저도 그들 사이에서 제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아요, 아버지.”

“…….”

“그래서 제게 호위를 배정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데릭과 공작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귀족가의 여식들에게는 기본적으로 호위 인원이 대여섯 명 정도 붙여진다.

가문의 세가 강할수록 그 인원은 늘어났다. 빈틈없이 호위 대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레널드의 말을 듣고 에밀리에게 물었을 때, 페넬로페에게는 그간 정해진 호위 기사가 한 명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기껏해야 일이 없는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맡은 정도.

‘대체 평판이 얼마나 나쁘면. 아니, 얼마나 신경 쓸 가치가 없었으면.’

반쯤은 때려 맞춘 것이었는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공작과 데릭의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절 보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에게, 피차 제 안위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

“그렇지만 출가한 후에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출가라니!”

내 말에 두 명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출가라니.”

공작이 다급하게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저도 이제 성인이잖아요.”

잠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나는,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제 안전을 위해서라도 호위 기사 정도는 제가 원하는 이로 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버지, 오라버니.”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완곡한 어투에 두 사람은 반대의 말을 하지는 못했다.

‘할 수 없는 것에 가깝긴 하지.’

오늘 일은 비단 내 잘못뿐만은 아니었으니까.

주인이 외출을 나가는 데도 안전을 걱정하며 따라붙는 아랫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크나큰 문제였다.

그것도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공작가에서.

사실 같이 다닐 호위가 정말 필요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클리스를 저택에 둘 구실이 필요했을 뿐.

“일단…….”

그리고 그 구실은 꽤 잘 통했다. 침음과 함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알겠다. 많이 놀랐을 텐데, 그만 올라가서 쉬어라. 한숨 자고 일어나면 의원에게 찾아가라고 전해 두마.”

“네, 아버지.”

다친 곳이 없어서 의원을 볼 필요 없었지만,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리고 꾸벅 인사한 후 얼른 집무실을 나가려 들었다.

“데릭은 잠시 남고.”

달칵, 문을 열고 막 나올 때 공작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문틈 새로 보자 내 뒤를 따르려 했는지, 문에 바싹 붙어 있는 데릭이 보였다.

‘아오, 이 자식 정말 왜 이래!’

가슴이 철렁해서 나는 얼른 집무실 문을 닫아 버렸다.

이미 얘기 다 끝났는데 무슨 구박을 더 하려고 쫒아오냔 말이다.

“하…….”

굳게 닫힌 문은 다행히도 다시 열리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데릭]과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 실패!

또 한 번 도전하시겠습니까?

(보상 : 데릭의 호감도 +3% 외 기타.)

[수락 / 거절]

‘미친. 안 해, 안 해!’

아직 축제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저리를 치며 ‘거절’을 연타했다.

곧바로 사라지는 네모 창을 노려보자니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다.

‘그리고 왜 실팬데? 같이 나가서 구경했잖아!’

놈들이랑 같이 나간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대체 이 빌어먹을 게임 시스템은 어떻게 되어먹은 거란 말인가.

데릭이 실패이니 레널드 또한 볼 것 없이 실패일 것이다.

‘됐어. 어차피 3% 얻었어.’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던 나는 애써 데릭의 까만 머리 위를 떠올렸다.

[호감도 13%]

퀘스트를 실패했지만, 다행히 보상만큼의 호감도가 오른 상태였다.

‘역시. 이 집 형제 놈들은 페넬로페를 안 보는 게 공략이야.’

나는 이제 놈들을 철저히 피해 다니겠노라 두 번, 세 번 다짐하며 중앙 계단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다짐을 한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기피 대상 중 한 명과 마주쳤다.

“야. 너 벙어리냐? 이거 왜 대답이 없어. 어디 출신이냐니까?”

계단 아래 우두커니 선 이클리스를 툭툭 치는 레널드와 그 옆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에밀리가 차례대로 보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내 목소리에 레널드가 고개를 돌렸다.

[호감도 10%]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머리 위가 데릭과 같이 변해 있었다.

“이 새끼 뭐냐?”

그는 내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또 한 번 이클리스를 툭 쳤다.

나는 [호감도 10%]와 [호감도 18%]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이리 와, 이클리스.”

레널드에 대꾸 하나 없이 묵묵히 서 있던 이클리스가 내 말에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가리킨 내 뒤쪽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하?”

그 모습에 레널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바람을 터뜨렸다.

“에밀리한테 못 들었어? 앞으로 내 전담 호위가 될 사람이야.”

“전담 호위? 노예 새끼를 호위로 쓴다고?”

“응.”

“이 계집애가 가출하더니 뭘 잘못 주워 처먹고 왔나. 이제 주변 평판이고 뭐고 갈 데까지 가 보기로 했냐?”

“가출 아니라고 했지.”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후 몸을 돌렸다. 이제 정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나 피곤해. 다음에 얘기하는 게 좋겠어.”

그러나 채 한 발자국 움직이기도 전에 앞이 가로막혔다.

“이게, 어딜 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그 순간 이클리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치는 레널드 때문인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사나웠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앞을 막았다.

기껏 공작저로 데려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내쫓길 순 없는 노릇이니까.

“레널드.”

나는 짜증을 삼키며 한숨처럼 레널드를 불렀다.

그러자 놈이 곧장 소리쳤다.

“네가 호위 따위가 뭐가 필요한데? 매번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 바쁜 주제에.”

“이제 필요해졌어. 어제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서.”

“그럼 밖에 널리고 널린 기사 놈들 갖다 쓰면 될 거 아니야!”

“네 말대로 내 욕을 책으로 엮으면 10권씩이나 나올 정도로 주인을 우습게 아는 기사들은 내게 필요 없어.”

“…….”

레널드의 반응도 똑같았다. 공작과 데릭처럼, 갑자기 풀칠이라도 한 듯 입이 딱 다물렸다.

“그런 정신머리를 가진 놈들이 내 호위를 맡아 봤자, 얼마나 사력을 다해 나를 보호할 수 있겠어?”

바꿔 말하면 이것은 너 또한 마찬가지란 소리다.

공녀를 업신여기는 기사들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기강을 흐트러뜨렸다.

오히려 당시엔 더 욕하라며 부추겼을지 알게 뭔가.

흔들리는 푸른색 눈. 바로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레널드는 겨우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페넬로페. 그 말은 그냥…….”

“농담이라고 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마. 이번에는 운 좋게 돌아왔지만, 어제 같은 일이 또 반복되면 꼼짝없이…….”

“…….”

“이클리스가 없었다면, 난 멍청하게 길을 헤매다가 꼼짝없이 겁탈당했을 거야, 레널드.”

내 말에 레널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목이 졸린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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