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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5화 (2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5화

실제 겪은 일과는 전혀 딴판인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적나라한 단어를 선택했다.

이번에야 명확한 목적 아래 움직였다지만, 가녀린 귀족 영애가 호위 하나 없이 뒷골목을 전전한다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수들은 널리고 널린 게 사실이었다.

“이제 알았지? 내가 왜 이클리스를 호위로 쓰겠다는 건지.”

“…….”

“걱정시켜서 미안해, 오라버니.”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딱딱하게 얼어붙은 레널드를 스쳐 지나 계단을 올랐다.

그런 내 뒤를 무표정한 이클리스와 숙연함으로 얼굴을 푹 숙인 에밀리가 뒤따랐다.

혐오의 또 다른 말은 방관이다.

나는 언제고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에서 페넬로페를 방관한 이 집 인간들을, 도저히.

도저히 좋게 여길 수가 없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나를 위해서도.’

막 계단을 모두 오른 순간이었다.

〈SYSTEM〉 [레널드]와 함께 [축제 구경하기] 퀘스트 실패!

또 한 번 도전하시겠습니까?

(보상 : 레널드의 호감도 +3% 외 기타.)

[수락 / 거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절’을 택했다.

복도를 지나 내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이클리스는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나는 방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그의 모습에 기겁하는 에밀리 대신,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니?”

방 앞을 가로막고 선 나 때문에 이클리스는 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렇지만…….”

멈춰 선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가치를 증명하라고 하셨잖아요.”

그가 내게 맹목적으로 굴던 이유를 직접 듣게 된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노예 경매장으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끔찍한가 보네.’

문득 이클리스의 목에 메인 초커 한가운데에 있는 노란색 구슬이 영롱하게 빛이 났다.

‘반지.’

나는 그제야 내 손에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마도구가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감도 18%]에 흥분했던 머리가 차가워졌다.

단번에 족쇄를 끊어먹고 사람을 죽이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모시던 주인이 악역임에도 끝까지 충성을 다하던 노멀 모드의 예의 바른 기사.

그러나 그 이전 시절의 길들여지지 않은 이클리스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했다.

어쩌면 그가 페넬로페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던 이유가 목에 메인 초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한 얼굴에 속으면 안 돼. 맨손으로 하이에나들을 때려잡은 놈이야.’

나는 속으로 여러 번 이클리스에 대한 경계를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그게 내 밤 시중을 들라는 소리는 아니야.”

“그럼…….”

“아까 들었지? 내가 널 호위로 쓰기 위해 데리고 왔다는 것을.”

“네.”

이클리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공작가의 모든 이들이 널 이곳에 두는 걸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네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야.”

“임무…… 요?”

“응. 내가 언제까지고 쓸모없는 이를 이곳에 두겠다고 우길 수만은 없는 일이잖니.”

나는 딱딱하게 그가 해야 할 일을 읊었다.

말을 끝내고 나서야 너무 성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애써 상냥함을 가장했다.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어. 그럴 거지?”

이클리스는 내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가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호감도 20%]

그 순간 그의 호감도가 변했다.

노멀 모드에서 남주들에게 기본으로 주어지는 ‘호감도 30%’에 가장 근접한 수치였다.

‘하…… 언제 30% 찍고, 또 언제 더 올려서 엔딩을 보냐…….’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지치는 것 같았다.

“에밀리, 집사가 준비해 놓은 방으로 이클리스를 안내해 주고 오렴.”

“네, 아가씨.”

그때였다.

“주인님.”

나를 부르는 이클리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착잡한 내 심정과 별다를 바 없이 들렸다.

“칭찬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뻗어 그의 지저분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내 손바닥에 제 머리를 비볐다.

기계처럼 사람을 패던 그에 대한 생리적인 두려움이 아직 다 가신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절 구해 주신 분이 주인님이라서 너무 기뻐요, 주인님.”

나를 기꺼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 * *

이클리스를 집에 들인 이후 나는 한동안 자체 근신을 빙자한 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내게서 거짓된 자초지종을 들은 공작과 데릭은 결국 이클리스를 내쫓지 않았다.

또한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는 방자한 내 행동도 내버려 두었다.

다만, 에밀리를 통해서 공작이 최근 ‘클루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제국의 모든 귀족 가문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간담이 좀 서늘했다.

그뿐 아니라 요즘 들어 가문 내 기사들의 훈련 강도와 기강이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설마, 그 돼지 놈을 찾아내진 않겠지…….’

기어이 공작이 찾아내더라도 별일은 없겠지만, 왜인지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꺼림칙했다.

“아, 모르겠다!”

사색에 잠겨 있던 나는 들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며 그냥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반쯤 친 커튼 사이로 정오의 따스한 햇볕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쨌든 ‘이클리스 구하기’라는 큰 에피소드 하나를 해결해서 그런지, 불쌍한 내게도 잠시간의 평화가 주어졌다.

오후 늦게까지 침대 위에 늘어져서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며 책을 읽어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역시, 근신이 최고야.’

가능하면 엔딩을 볼 때까지 데릭이 근신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빨래해 줘, 청소해 줘, 때 되면 밥도 줘.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란 말인가!

똑똑-.

“아휴, 아가씨! 아직도 누워 계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생각하기 무섭게 때마침 밥이 찾아왔다.

“오늘 점심 뭐야?”

나는 여전히 나른하게 누운 채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단호박 샐러드와 구운 닭다리예요.”

“그게 다야?”

지나치게 조촐하다. 나는 대놓고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저번에 아가씨가 매콤한 게 먹고 싶다고 하신 걸 전했더니, 주방장님이 특별하게 소스를 개발했대요.”

“정말?”

그러나 덧붙여진 말에 나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동안 에밀리에게 ‘매운 닭다리’ 노래를 불렀더니 드디어 주방장의 귀에까지 전달이 된 모양이다.

“아가씨도 참. 요즘 부쩍 입맛이 변하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자극적인 음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니…….”

냉큼 테이블 앞에 앉은 내 앞에 조리된 접시들을 올려놓으며 에밀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속이 뜨끔했다. 아무리 무시하고 싫어해 왔을지언정 에밀리는 몇 년간 페넬로페의 시중을 든 하녀였다.

가끔 예전과 미묘하게 변한 주인의 간극을 아리송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원래 나이 들수록 입맛이 변한다잖아.”

“그렇긴 하죠.”

포크를 들며 태연히 대꾸하자 에밀리는 곧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에밀리의 위화감은 금방 사라졌다.

“드세요, 아가씨.”

더는 공녀가 먹을 음식에 장난을 치지 않는 에밀리는 직접 고기의 살을 발라 내 앞접시로 열심히 날랐다.

덕분에 나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잘 발린 살코기만 날름날름 받아먹기만 했다.

“맛은 괜찮으세요? 꼭꼭 씹어 드세요.”

에밀리는 고기를 바르는 중간중간에도 내가 먹는 것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더는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극진한 시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주는 것들을 순순히 받아먹으면서도 내가 가느다래진 눈으로 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나저나 이것보다 더 달아야 하는데…… 그 매운 양념 맛이 아니잖아.’

기미라도 보는 것처럼 신중하게 음식을 맛보던 나는, 몇 초가 지났음에도 아무 이상 없자 그제야 마음 놓고 식사를 했다.

원하는 것은 현생에서 대학 친구들이랑 종종 먹던 매운 치킨이었는데.

주방장의 야심 찬 요리는 그냥 맵기만 한 구운 닭다리였다.

‘이제 단짠, 단짠 노래를 불러야겠네.’

원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먹는 화끈한 맛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발라 주는 고기를 열심히 받아먹었다.

“이제 배불러.”

포크를 내려놓자, 에밀리는 재빠르게 접시를 물리고 디저트를 내었다.

“이제 건국제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가씨.”

메론 셔벗을 푹푹 퍼먹던 내게 에밀리가 여상히 말을 걸었다.

“그러니?”

“네! 매번 축제 때마다 나가셔서 신기한 보석들을 잔뜩 사 오셨잖아요. 이번에 나가셨을 땐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으셨어요?”

“글쎄.”

사실 정신이 온통 딴 데 쏠려 있어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레널드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이전의 페넬로페는 정말이지 보석에 환장한 듯했다.

‘참 부지런한 소비러야.’

축제 기간 내내 잡화점 앞을 걸어 다니며 보석들을 사들였을 그녀를 떠올리니 기가 다 질렸다.

“참! 그러고 보니, 집사님이 일전에 보석상에게 주문했던 것이 도착했다고 그러셨어요.”

“주문? 무슨…….”

“축제 기간 전에 보석상을 부르셨었잖아요.”

“아.”

에밀리의 말에 그제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클리스 때문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서 집사님께 받아올까요?”

심각해지는 내 표정을 알아챈 에밀리는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응,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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