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6화
에밀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석이 담긴 상자를 들고 되돌아왔다.
고운 벨벳으로 감싼 작은 상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상자를 받아 든 나는 지체 없이 그것을 열었다.
“와! 색이 너무 고와요!”
깊은 심해를 고스란히 옮겨 담은 듯한 군청색의 동그란 보석이 드러나자, 에밀리가 나 대신 감탄했다.
청금석(Lapis Lazuli)은 보통 금색이나 백색의 자잘한 반점들이 혼입되어 있다. 반점이 없고 청색이 짙을수록 상등품에 속했다.
상자를 돌려 가며 확인했지만, 검푸른 보석 알에는 작은 티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호언장담하던 보석상에게 비싼 값을 치른 보람이 있었다.
“공작님께 선물 드리려고요, 아가씨?”
커다란 청금석이 박힌 남성용 커프스를 연신 들여다보며 에밀리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럴 리가.’
속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한 나는 이내 다른 말을 꺼냈다.
“가서 보석함 중 아무거나 하나 가지고 와 주겠니?”
“보석함이요? 네, 아가씨.”
에밀리는 영문 모를 지시에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별말 없이 따랐다.
탁-. 잠시 후 그녀가 책상 위에 커다랗고 묵직한 원목 상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적당한 때에 말했다.
“나 대신 누군가한테 시킬 일이 하나 있는데.”
“네에? 무슨 일이요?”
“혹시 상단 거리의 정보상에 대해 아는 게 있니?”
“정보상이라면…….”
에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저와 같은 방을 쓰는 동기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애는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상단 거리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거든요.”
“그래?”
나는 잠시간 틈을 두고 되물었다.
“그 애 이름이 뭐야?”
“레, 레나라고 하는데…….”
“지금 어디 있는데?”
“……하, 하지만 레나보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아가씨!”
에밀리는 채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덧붙였다.
“그 애는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입이 가볍거든요.”
그녀는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내가 자신을 내치고 바로 그 애를 부를까 봐 겁이 난 듯했다.
“에밀리. 이 일은 무척 비밀스럽고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해. 때에 따라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야 할 필요도 있어.”
사실 이런 일을 시키려고 도로 전담 하녀로 쓰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에밀리 말고는 적당한 자가 없었다.
“그런데 그간 공녀인 나를 괄시해 오던 너를.”
하지만 나는 부러 위기감을 조성했다.
“내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페, 페넬로페 아가씨!”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주제였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렸는지 에밀리의 얼굴이 단숨에 사색이 됐다.
“저, 저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불경한 생각 품은 적 없어요, 아가씨! 제가, 제가 얼마나 아가씨를 극진하게 모셨는데, 어떻게…….”
“그런 말은 공작저의 누구라도 할 수 있잖니, 에밀리.”
울먹이며 억울함과 서러움을 호소하던 에밀리는 곧바로 막아서는 내 차가운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제, 제가…….”
흐느낌 대신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노선을 바로 틀었다.
“제가 눈치 하나는 기똥찬 거 그간 지켜보셨잖아요, 아가씨.”
나는 곧장 태세를 전환하는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대단한걸.’
확실히 에밀리는 다른 엑스트라들에 비해 약삭빠른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머리카락 속에 대바늘을 숨기고 수년간 페넬로페를 주도면밀하게 괴롭혀 왔겠지만.
내가 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에밀리는 간절한 얼굴로 호소했다.
“기억해 보셔요. 지금까지 아가씨께서 시키시는 일은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어요.”
“…….”
“그러니 제게 맡겨 주세요. 그래도 제가 아가씨 전담 하녀잖아요…….”
긴 침묵이 흘렀다.
톡, 톡. 방 안에는 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발을 동동거리며 초조하게 서 있는 하녀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기 직전.
“……좋아.”
마침내 나는 수락했다.
“이번엔 널 한번 믿어 볼게.”
“아가씨…….”
에밀리는 찡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바늘로 협박한 후 그녀가 내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상전의 신뢰가 다른 이로 옮겨 갈지 모른다는 가정이 이토록이나 충성을 맹세하게 만드는 것이다.
“감사해요, 아가씨!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나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에밀리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석함을 열어 보렴.”
혹여라도 짧은 새 내가 변덕을 일으킬까 두려웠는지 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직였다.
“앞으로 내 근신이 끝날 동안은 아침 시중을 마친 후에 정보상들을 찾아가도록 해. 그들에게 사람을 찾는 의뢰를 맡길 거야.”
“사람이요? 어, 어떤 분을 찾으시길래…….”
“그에 대한 건 따로 적어서 줄게. 너는 그 종이를 상단주에게 보여 주면 돼. 값을 치르기 위해 저 보석함에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써도 좋아.”
함 안에는 가짜 공녀의 극에 달한 사치를 대변해 주듯, 빛나는 보석들이 미어터질 만큼 가득 쌓여 있었다.
아쉽게도 페넬로페는 큰 액수의 현금을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재화는 보석뿐이었다.
하지만 설령 저것을 몽땅 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공녀의 귀중품을 보관하는 창고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보석함이 쌓여 있었으므로.
“네! 할 수 있어요, 아가씨! 찾는 분을 금방 찾으실 거예요.”
“단, 진짜 사람 찾는 일을 하는 일반 정보상은 안 돼.”
내 말에 에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러면 어떤…….”
“무척이나 희귀한 정보나 물건 거래를 취급하는 곳들. 고위 귀족들만이 이용할 법한 고급 정보상 말이야.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잘 찾을 수 있겠지?”
“네! 그럼요!”
게임에서는 그런 류의 상단 중 뷘터가 운영하는 곳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고 서술됐었다.
‘그러니 쉽게 찾을 수 있겠지.’
물론 나는 이미 그가 후작이고 마법사이며 비밀리에 상단을 운영한다는 사실까지 모조리 알고 있다.
만나고자 한다면 그가 참석할 법한 연회만 골라 나가면 된다.
그러나 뷘터는 이클리스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남주 중 한 명이었다.
좀 더 극적인 만남을 위해서, 나는 노멀 모드의 에피소드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여주는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원래의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을 찾아 헤맨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흰 토끼 가면을 쓴 마법사란 사실뿐.
그러나 ‘진짜 공녀’로서 데뷔하기 위해 참석한 연회에서 뷘터를 마주한 그녀는, 눈동자 색을 보고 단번에 그가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말이 돼? 어떻게 눈동자만 보고 사람을 알아차리냐고.’
쉽게 깨서 좋다며 희희낙락하던 지난날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주처럼 뷘터 하나 만나겠답시고 온갖 연회에 다 참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본인이 찾아오게 만들면 되지.’
나는 에밀리를 향해 다시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네가 높으신 귀족 아가씨의 하녀라는 것을 티 나지 않게 티 내야 해.”
“네? 어떤 식으로…….”
“귀족 여식이 첫눈에 반한 남자를 남몰래 찾는 것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렴.”
“어머, 아가씨!”
낮게 속삭여지는 내 목소리에 에밀리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런 건 차라리 저한테 물어보시는 게 더 빠르실지도 몰라요.”
나는 그녀의 반응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녀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매 높으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뿐인걸요. 그것도 외모가 출중하신 미혼의 귀족 남성분들이라면 모두들 빠삭하게 외우고 있는…….”
“에밀리.”
나는 묻지 않았음에도 재잘거리는 에밀리를 칼같이 가로막았다.
“내가 시키는 일 할 수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제가 아가씨의 정인이 어떤 분인지 기필코……!”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딱 잘라 부정했다. 그녀가 무슨 엄한 상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러나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것인지, 에밀리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만치 반짝였다.
“우리 아가씨께도 드디어 봄이 찾아오나 봐요…….”
나는 들뜬 그녀를 다시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소매를 걷고 손등을 들이밀었다.
“신중하게 행동해. 이번 일에 네 바늘의 존폐를 결정할 거니까.”
“헙……!”
“이건 엄연히 네게 주어진 기회야, 에밀리. 괜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지르다가 이번에야말로 쫓겨날지 모르는 일이잖니.”
새하얀 손등은 이제 흉한 바늘 자국 하나 남지 않고 말끔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바늘로 협박했던 것을 잊지 않았는지 에밀리는 급히 흥분을 갈무리하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그 모습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아가씨, 펜넬입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방문을 알렸다.
이제 예전처럼 방문이 벌컥벌컥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몇 초간의 간격을 둔다.
“……들어와.”
마침내 떨어진 허락에 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이야?”
“황궁에서 페넬로페 아가씨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내 앞으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 2황자의 탄신 연회가 끝났으니 황궁에서 초대가 올 일은 당분간 없었기 때문이다.
“네, 아가씨. 이번 건국제 마지막 날에 제국의 승전을 기념하며 황궁에서 간소하게 연회가 열리는 모양입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놈의 황궁은 어떻게 돼먹은 건지 무슨 연회를 허구한 날 연단 말인가.
“귀환 연회는 이미 성대하게 치렀지 않나?”
“이번에는 황태자님께서 직접 주최하셨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집사의 대답에, 내 목은 기름칠 안 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황…… 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