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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7화 (2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7화

일순 방 안이 북부 벌판처럼 싸늘해졌다.

저택 내에서 ‘황태자’는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당장이라도 칼로 내 목을 썰어 버릴 것처럼 스산하기 그지없던 새빨간 눈.

상처가 아물어 붕대를 푼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놈을 떠올리자 다시금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황궁에서 온 초대를 내 마음대로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애써 움켜쥐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신다니?”

“그게…….”

그러나 무엇을 묻는 즉답하던 집사는 드물게 뜸을 들였다.

“페넬로페 아가씨의 앞으로만 온 초대장인지라…… 공작님께서는 아직 모르십니다.”

“미친……!”

쾅-! 나는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이어 가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 아가씨!”

집사도, 에밀리도 대경실색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 미친놈 아냐, 이거! 게임보다 더하잖아!’

그 미친놈은 나를 잊지 않았다. 잊기는커녕,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2황자의 탄신 연회 이후로 황궁에는 얼씬도 안 하는 나를 기어코 끌어내서 죽이려고.

- 다음에 만날 땐 왜, 어떻게, 무슨 연유로 날 좋아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거야.

그때 놈이 음산하게 지껄였던 말이 귓가에 재생되자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이건 에피소드에 없었잖아, 망할 게임아!’

나는 맹렬히 머리를 굴리며 원래 게임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런데 되새겨 봐도 없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게임을 플레이할 적에, 페넬로페는 끝내 미로 정원을 살아 나오지 못했으니까.

“초, 초대장은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분을 참지 못하고 있는 내게 집사가 조심스럽게 의중을 물었다.

“후…… 어쩌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진분홍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나 아파.”

도로 의자에 주저앉은 후 눕듯이 등받이에 기댔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없던 병이 생기라도 한 듯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 열이 펄펄 끓고 있어, 집사.”

반쯤 눈을 내리깔고 나른히 말하자, 집사가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우리 아가씨, 이렇게 아프셔서 정말 큰일입니다. 감기 때문인지요?”

곧바로 연유를 되묻는 그는 과연 에카르트 공작저에서 몇십 년을 구른 수족다웠다.

“이왕이면 쇳독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더 좋겠지.”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사가 정중히 인사한 후 서둘러 방을 나갔다.

“하…….”

나는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런 내 모습에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공작님께 말씀드려서 의원을 부를까요?”

“됐어. 그럴 필요까진…….”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던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야. 그래, 의원을 불러 주렴.”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작저 전체에 아주 공표를 박아서 칩거 기간이나 늘려야겠다.

‘당분간 집 밖은 물론이고, 이불 밖도 얼씬 말아야겠어.’

황태자 놈이 내게서 완전히 관심을 끌 때까지 말이다.

* * *

늘어난 내 근신 기간 동안 에밀리는 순조로이 내 명령을 수행했다.

커프스가 제때 만들어져서 다행이었다.

축제 기간이 한창이라 뻔질나게 밖을 나가는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처음엔 시큰둥하더니, 보석함을 꺼내니까 눈빛이 달라지는 거 있죠?”

이틀간 정보상 네 군데를 돌아다니고 온 에밀리는 조잘대며 다녀온 곳들에 대해 보고했다.

대부분의 수다를 흘려듣던 나는, ‘다른 직원 하나 없이 흰 토끼 가면을 쓴 사내만 덜렁 앉아 있는 이상한 상단’이란 대목에서 눈을 번뜩였다.

‘좋아. 미끼를 물었어.’

게임에서 나오는 뷘터의 신상과 일치했다.

나는 나머지 상단들에 대해 더 설명하려는 에밀리를 한 손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비도 오는데 고생했어. 그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

“네. 그럼 이따 저녁 시간에 다시 돌아올게요!”

비 맞은 생쥐 꼴에도 에밀리는 활기차게 외치며 방을 나섰다. 다행히 감기라도 걸려 온 것은 아닌 듯했다.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몸을 돌려 커다란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 화창했던 것이 무색하게, 창밖은 온통 회색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왜 하루 종일 비만 내리냐.”

턱을 괸 채 멍하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니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싫어했다. 유독 내 치부가 드러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우산을 가지고 학교로 데리러 와 주는 엄마를 가진 친구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결국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운동장을 걸을 때, ‘넌 엄마 없냐’는 순진한 물음들이 그렇게 부끄럽고 비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릴 적 그 치기 어린 감정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었다.

우산을 챙겨 온 애들에게 붙어 삼삼오오 학교를 떠나가던 애들.

그리고.

- 도련님! 얼른 뛰어오세요!

- 아씨, 오늘 비 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짜증 나게 다 젖었잖아. 김 비서, 얼른 집으로 가.

- 그런데, 아가씨는…….

- 뭔 상관이야? 알아서 오겠지! 빨리 출발해.

부우웅- 멀어지는 자동차.

순식간에 텅 빈 교정에 한참 동안 서 있던 나는 결국…….

“……재수 없게.”

문득 떠오른 기억 한 조각에 와락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진저리를 치다시피 고개를 저으며 애써 우울함을 털어냈다.

“지금 한가하게 비 내리는 거나 구경할 때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마따나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이 망할 게임에서 벗어날 테니까.

우산을 챙겨 든 나는, 곧바로 살며시 방을 빠져나갔다.

뿌연 안개에 휩싸인 공작저 부지는 무척 고요했다.

끈질기게 내리는 비로 인해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나오긴 했는데, 막상 나오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더 없을 만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공작의 아들놈들이 없을 만한 곳으로.

찰박, 찰박. 사색에 잠긴 채 얼마간 빗길을 걸었을까.

발 가는 대로 몸을 맡기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이 묘하게 익숙했다.

“여긴…….”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숲길이었다.

개구멍을 찾느라 한동안 미친 듯이 들쑤시고 다녔더니, 지형만 봐도 어디쯤인지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레널드랑 마주칠지도 모르는 장손데.”

나는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이미 한번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레널드와 마주친 전적이 있었다.

레널드는 물론이고, 데릭과도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에비, 에비!”

너무 멀리까지 왔다. 나는 얼른 도리질을 치며 뒤로 돌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나오긴 했지만, 그건 나를 안 봐야지만 호감도가 오르는 두 놈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다시 저택 쪽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휙, 휘익-!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검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비가 오는데도 훈련을 한단 말이야?’

최근 들어 기사들의 훈련 강도가 높아졌다는 소리를 여러 번 접해 들은 후여서 그런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 없었다. 외부에서 데리고 온 정체 모를 노예를 호위 기사로 지정한 나 때문이란 것을.

멈칫했던 걸음을 다시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최근 기사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증이 들었다.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으려나.’

그래도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욕 먹는 건 진짜 내가 아니니까.

겸사겸사 이클리스가 껴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겠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서 홀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처음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비에 푹 젖은 회갈색 머리칼이 암울한 회색 하늘과 꼭 닮아 있어서.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하고 느리게 움직였다.

멀리 있던 인영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사내는 상의를 탈의한 채 기계처럼 아래위로 검을 휘둘렀다.

거칠게 움직이는 오밀조밀한 등과 어깨 근육 사이로 깊게 파인 흉터들이 가득했다.

안쓰럽기보단 되레 흉악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추울 텐데.’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남자는 내가 다가가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바로 뒤에 도달한 순간.

휘익-.

별안간 남자가 번개처럼 상체를 돌렸다. 날카로운 것이 사납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눈을 한번 깜빡이자, 목덜미에 서늘한 감촉이 닿아 있었다.

“허억, 헉…….”

이클리스는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오롯이 향해진 시퍼런 살기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방금 전까지 위아래로만 검을 휘두르고 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한 반사 신경이었다.

곧바로 내 목을 벨 듯 노려보던 그의 눈이 곧바로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살기가 가시고, 점차 당황으로 물들었다. 종국엔 나를 완전히 알아본 이클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주…… 인님.”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나는 그제야 그때까지 내 호흡이 멎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간 바르르 입술이 떨리더니,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듯 음성이 터져 나왔다.

“비가…….”

여전히 목 옆에 차가운 목검이 닿아 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놀라지 않은 척, 두렵지 않은 척 안간힘을 쓰며 상냥히 말을 건넸다.

“비가 오잖니, 이클리스.”

나를 바라보는 잿빛 동공이 길을 잃고 흔들렸다.

그의 머리 위의 글씨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호감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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