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8화
짧은 사이 호감도가 순식간에 3% 증가했지만, 전혀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긴 어떻게…….”
“우선, 이것 좀 치워 주겠니?”
나는 흘긋 눈을 굴려 여전히 목 옆에 바싹 들이밀어진 목검을 가리켰다.
“차갑거든.”
“……아.”
탄성과도 같은 침음을 내뱉은 이클리스는 엄청난 빠르기로 목검을 든 손을 쳐들었다.
후욱-.
그 순간 길쭉한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나를 내리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콱-!
질끈 감겼던 눈은 무언가 ‘우지끈’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야 다시 뜨였다.
곧바로 바닥에 거세게 집어 던져져 두 동강이 난 목검이 보였다.
‘이게 무슨…….’
땅에 못 박혔던 고개를 천천히 들자, 이클리스가 질퍽한 흙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인님.”
“…….”
“잘못했어요.”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절절하게 제 잘못을 빌었다.
“제가 감히 주인님께…….”
잔뜩 일그러진 그 얼굴이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아이 같았다.
“벌을 내려 주세요.”
쏴아아-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가 한층 더 굵어졌다.
이클리스의 높다란 코끝과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쉴 새 없이 빗방울 들이 똑똑 떨어졌다. 퍽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내 왼쪽 검지에 끼어 있는 새빨간 루비 반지.
입 사이로 실낱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클리스와 두 동강 난 채 땅바닥을 뒹구는 목검 조각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을 내려 달라면서 손가락이라도 까딱였다간 바로 달려들 기세네.’
거세게 내던져진 충격 탓인지 부러진 검 조각이 비로 인해 질척해진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하늘로 솟은 단면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발이라도 헛디뎌 넘어지면, 그대로 꿰뚫릴지도 모를 만큼…….
‘으…….’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상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문득 꺼둔 지 한참 된 게임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게임이었으면, 이 장면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었겠지.’
그러면 나는 리셋을 눌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 장면을 반복했을 것이다.
물론 하드 모드에서 이클리스 루트를 진행해 본 적은 없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얼마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이 왔다.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것을.
‘……여기서 살려면 페넬로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클리스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애처롭게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그 속은 과연 어떨까.
하루아침에 고국이 사라지고, 노예가 되어 밑바닥을 구르는 검술의 귀재.
비싼 값을 주고 자신을 산 오만한 귀족 계집을 증오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고분고분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암담하고 끔찍할 것이다.
이클리스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들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선 것만으로도 누군지 분간도 않고 검을 휘두르던 모습. 방금 전 느껴졌던 그 숨 막히는 살기.
그것들이 그가 얼마나 분노를 삭이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케 만들었다.
답은 하나뿐이다.
노멀 모드의 여주처럼 살기 따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말하면 돼.’
하지만,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괜찮다고 할 수 있어?’
하마터면 목검에 처맞고 목이 부러져 죽을 뻔했는데.
“……이클리스.”
나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을 아득 움켜쥐며, 결국 다른 말을 꺼냈다.
“혹시 누가 널 괴롭히니?”
이클리스를 구해 왔음에도 나는, 여전히 살 궁리를 해야 했다.
내가 이 게임 속 악역 페넬로페인 이상.
“공작가는 기사들의 대우가 그리 팍팍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왜 이런 날씨에 훈련을 하고 있을까.”
“…….”
“그것도 너 혼자서.”
기를 쓰고 미소 지었다. 혹시라도 놈이 나를 목검의 잔해 쪽으로 밀 기미를 보이진 않는지 샅샅이 살피며.
“응?”
대답을 재촉하는 내 모습에 무표정했던 이클리스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흠뻑 젖었잖아.”
아무 소용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허리를 굽혀 쓰고 있던 우산을 그의 위에 기울였다.
빗방울이 가득 맺힌 기다란 속눈썹이 무거워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꺼풀 옆을 스치듯 닦아 주었다.
“말해 보렴. 감히 누가 네게 이런 짓을 하라고 시켰는지.”
내 손가락이 닿자 이클리스는 마치 화인이라도 찍힌 양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내 한숨과 같은 답을 토해 냈다.
“……아무도.”
“…….”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그럼?”
“그냥, 제가…….”
그가 불현듯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내 손에 못 박아 뒀던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하루빨리 정식 기사가 되어 주인 님의 곁에 있고 싶어서…….”
“…….”
“그래서 홀로 훈련하고 있었어요, 주인님.”
들려오는 대답에 나는 다정하게 웃었다.
“기특하구나.”
어느새 나를 응시하는 회색 눈동자에선 잔떨림이 사라진 후였다.
“열심히 훈련을 했으니 상을 줘야겠네.”
나는 다시 깜빡이기 시작하는 이클리스의 머리 위를 보았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속을 내색하지 않도록 연기했다.
“비를 맞지 않고 훈련에 매진할 수 있도록 아랫것들에게 천막을 치라고 일러둘까? 아니면 따로 원하는 것이라도 있니?”
“…….”
이클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도르륵 굴러가던 내 눈이 문득 흉악하게 부러진 목검에 닿았다.
“아, 그래. 검이 부러졌으니 새로 사 줘야겠구나.”
“…….”
“무기상을 불러야겠어. 아니면 아예 대장장이를 부르는 게 좋을…….”
“주인님이.”
불쑥 그가 내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자주 찾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상치 못한 답에 말문이 막혔다. 살짝 커진 눈으로 이클리스를 바라볼 무렵,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저를 여기에 둔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신 적이 없어서…….”
“…….”
“절 잊으신 줄 알았거든요.”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 눈빛이 언뜻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꼭 사랑을 갈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
조소인지, 자조인지 모를 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나는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살인 기계처럼 다른 이들을 패면서도 내 앞에서 쉽게 무릎을 꿇던, 그 모습에서 느꼈던 위화감.
내가 호감도를 위해 상냥한 주인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이클리스 또한 생존을 위해 충실한 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사실은 강아지가 아니라 승냥이 새끼를 주워 왔는지도 몰라.’
멍청하게도, 나는 그간 이클리스 루트가 안전하리란 것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선 잘 모르겠다. 어쩌면, 하드 모드의 모든 루트를 다 해 보지 못한 내 패착일지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멈출 수 없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호감도 25%]
내 대답에 이클리스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감기에 걸리겠어, 이클리스.”
격한 움직임을 멈춘 남자의 입술에 점점 푸르스름한 한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얼렀다. 그러나 그와 달리, 굽혔던 허리를 펴는 데엔 망설임이 없었다.
덩달아 내 손에 쥐어진 우산도 들렸다.
이클리스의 위로 다시금 빗줄기가 쏟아지며 헐벗은 상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오늘 훈련은 그만하도록 해. 이건 명령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곧장 등을 돌렸다.
막 한 걸음을 떼던 차였다.
“주인님.”
이클리스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바보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그저 나를 가만히 응시한 채.
“……벌을 내리지 않으세요?”
“…….”
“자칫하면 제가 주인님을 해칠 뻔했어요.”
아니야. 고작 해칠 뻔한 게 아니라…….
‘너는 날 죽일 뻔한 거지.’
나는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싱긋 웃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기사를 사소한 일로 징벌하는 건 멍청한 작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클리스.”
“…….”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지?”
나는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휙 몸을 돌려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연무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통수로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끝끝내 일어나라는 명령도, 용서도 받지 못한 나의 하나뿐인 호위 기사.
다행히 그가 제 주인을 다시 멈춰 세우는 일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치맛자락이 젖든 말든 빠른 속도로 걸었다.
주변 경관이 휙휙 지나갔다. 혹여 빗물이 튈세라 조심조심 걸어 올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클리스 루트라고 안전한 게 아니었어.’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기분이 바닥을 쳤다.
사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5명의 메인 남주 모두 호감도 0 아니면 마이너스.
하드 모드의 시작부터 그렇게 죽어 댔는데 쉬운 루트란 게 있을 리가.
‘그런데 대체 뭘 믿고 그 자식한테 겁 없이 다가갔을까.’
그에게 닿기도 전에 빗물을 가르며 목에 닿았던 싸늘함.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
몰려오는 현기증에 나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옆에 있는 나무 기둥을 짚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기어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뿌연 안개 너머를 노려보던 나는, 문득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빨리 뷘터를 만나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