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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9화 (2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9화

25%.

이클리스는 현재로서 압도적으로 높은 호감도를 가졌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간과하고 있던 찜찜함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데릭이나 레널드는 기껏해야 2, 3%, 많아 봤자 5%가 오르는 정도다.

그러나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는 이클리스의 호감도는 폭주 기관차처럼 치솟고 있었다.

‘높이 나는 새가 더 빨리 떨어지기 마련이야.’

되새겨 보면, 하드 모드에서의 호감도 폭락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주 발생하곤 했다.

때문에 이클리스를 탈출의 주구로 삼되,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혹시 모르니 보험을 하나쯤 만들어 놓는 게 좋겠지.”

우산 밖으로 드러난 팔에 차가운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점점 차분하게 정리됐다.

“그래, 그러면 돼. 예상 가능했던 일이니까 초조해할 필요 없어.”

나는 스스로를 재차 다독였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차차 고르게 변했다.

그러자 현기증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에밀리가 난리 치겠네.”

문득 차가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내리자, 어깨까지 쫄딱 젖어 버린 옷소매가 보였다.

쯧, 혀를 찬 나는 이내 다리를 움직였다.

마음이 안정되자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으슬으슬 몰려왔다.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의외로 연약한 페넬로페의 몸뚱이는 필시 앓아 누울 것이 자명했다.

* * *

에밀리가 다녀온 상단들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의뢰를 완수했다.

“아가씨. 여기, 맡기신 일에 대한 답신들이어요.”

부탁한 홍차와 케이크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에밀리가 쟁반 옆에 은밀히 봉투를 올려놓았다.

봉인한 밀랍 위에 각 상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모두 뜯어보았다.

모든 봉투 안에는 수많은 이름과 가문 명이 빽빽하게 기입된 종이 한 장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적혀 있는 이름의 수만 한두 개 차이가 날 뿐 목록은 세 개 모두 비슷했다.

“이것뿐이니?”

나는 그것들을 보는 둥 마는 둥 대강 훑어보며 물었다.

에밀리는 부쩍 몸을 바로 했다. 제가 가져온 결과물을 내가 탐탁지 않아 한다고 생각한 듯, 그녀는 허겁지겁 덧붙였다.

“심부름꾼들이 전하기로는, 찾는 분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요, 아가씨. 그래야 그 목록에서 더 특정 지을 수 있다고…….”

내 손에 들린 종이들을 흘긋 곁눈질한 에밀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금방 찾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나갔는데, 터무니없이 많은 이름들이 적힌 목록이 돌아왔으니 그녀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그건 에밀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2황자의 탄신 연회에 흰 손수건을 지참한 채 참여한 귀족 남성.]

내가 그녀에게 적어 준 종이는 애당초 누군가를 특정 지을 수 있을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연회장에 손수건을 지참하는 것은 귀족 남성들의 기본 중 기본 소양이었기에.

“다, 다른 상단에도 의뢰해 볼게요, 아가씨.”

“아니. 목록은 이걸로도 충분해.”

나는 진짜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으므로 에밀리의 의기소침한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건 상단의 수야. 분명 네 군데를 다녀왔다고 했잖니.”

“아…….”

에밀리는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한 군데에서만 아직 연락이 없네요.”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다시 손에 들린 세 장의 종이들을 확인했다. 어디에도 ‘흰 토끼’ 문양은 없었다.

‘바로 답이 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잠잠한 뷘터의 반응에 허탈해졌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노멀 모드 여주처럼, 후작이 올 만한 연회마다 참석해서 직접 찾아 헤매야 한다.

‘귀찮게 됐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다녀올까요?”

실망스러운 내 기색을 알아챈 듯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됐어. 그보다 정보 값은 잘 치렀니?”

“네. 찾아온 심부름꾼들에게 모두 원하던 보석을 들려 보냈어요.”

“잘했어.”

나는 노멀 모드에서 나왔던 앞으로 열릴 연회를 떠올리며 대충 흘려 말했다.

“며칠간 고생했으니 보상으로 보석함에 남은 것들은 모두 네가 가지렴.”

“그, 그런……!”

생각보다 너무 후한 보상이었는지, 에밀리가 입을 떡 벌린 채 기함했다.

“아니에요, 아가씨! 정리를 끝내고 곧바로 들고 오도록 할게요.”

“왜? 보석 싫어? 그럼 금화를…….”

“아뇨, 아뇨!”

에밀리가 마구 도리질을 치며 연거푸 거절했다.

“저는……! 저는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아가씨.”

나는 그제야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밀리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보통 이런 거 준다고 그러면 희희낙락 받지 않나?’

하지만 연이어 내게 호소하는 목소리는 언뜻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보상은 괜찮아요, 아가씨. 저는 그것보단…….”

“아.”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가 보상으로 약속했던 또 한 가지를 떠올렸다.

“걱정할 것 없어. 약속대로 네 바늘은 없애 줄 테니.”

“어, 없애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셔요.”

“……응?”

나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바늘 때문에 그간 전전긍긍하던 사람이, 이젠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나는 도통 알 수 없는 그녀의 반응에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원하는 걸 정확히 말해.”

싸늘해진 내 안색에 에밀리는 내 눈치를 보다가 이내 우물쭈물 원하는 것을 털어놨다.

“저는…… 저는, 아가씨의 진짜 하녀가 되길 바라요.”

“…….”

나는 잠시 진의를 가늠하듯 에밀리를 응시하다, 이내 무심하게 말했다.

“넌 이미 내 전담 하녀야. 그 이상의 직책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아니란다.”

“아가씨!”

에밀리는 별안간 책상 옆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

“이전까지 제가 아가씨께 크나큰 죄를 저질렀어요. 제가 감히…… 감히 주제를 모르고…… 아가씨께서,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해요.”

“에밀리.”

“그, 그렇지만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주시면, 증명해 보일게요! 제가 얼마나 쓸모 있는 하녀가 될 수 있는지요!”

나는 그녀의 반응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내 수족이 되고 싶다고?”

“네!”

나는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간 에밀리는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만큼 이 집에서 페넬로페의 영향력은 최하위였다.

일하는 고용인들보다 못한 존재. 그것이 바로 ‘가짜 공녀’의 위치가 아니던가.

‘앞으로 나한테 붙으면 이깟 보석함보다 더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치가 극심한 페넬로페에겐 따로 책정되는 예산이 없었다.

그때그때 떼를 써서 공작이나 집사를 통해 상인을 불러 보석을 구매할 뿐, 개인 소유 재산은 하나도 없다.

몇 년간 전담 하녀를 맡은 에밀리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꿍꿍이지?’

미심쩍은 내 시선에 에밀리는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바늘은 그대로 가지고 계시다가, 제가 못 미더우시면 공작님께 보여 드리도록 하셔요.”

“……진심이니?”

내 되물음에 에밀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에밀리를 앞에 둔 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적당한 보상을 쥐여 주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패 정도로 생각한 엑스트라가 자진해서 내 편이 된다니.

‘이것도 게임 에피소드 중 하나인가?’

현실이라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개연성이다. 그렇지만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뭐든, 충성스러운 하녀가 하나쯤 있는 것도 좋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럼 남은 보석들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놔.”

“아가씨……!”

내 대답을 눈치껏 알아들은 에밀리는 감동을 한 움큼 집어 먹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가씨! 앞으로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그만 나가 봐.”

에밀리는 귀찮다는 내 손짓에도 연거푸 감사의 말을 읊조렸다.

탁-. 얼마 후 그녀가 방을 나가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흰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공작가 주변인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10 되었습니다. (total : 15)

“별일이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네모 창 안의 글씨를 바라보았다.

진작에 포기했던 내 명성은 놀랍게도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 * *

방 안에 있는 커다란 통창으로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창문 앞에 뒀던 테이블을 옆으로 미뤄 두고, 맨바닥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산책이라도 나갈까 싶었지만, 언제 어디서 엑스 친 놈들을 만날지 몰라 자중하는 중이었다.

산책 대신 볕이라도 쩔 겸 이러고 있으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평화롭네…….’

사실 이럴 때가 아니긴 했다.

에밀리가 정보 상단에서 받은 답신들을 전한 후에도 이틀 정도 더 기다렸지만, 뷘터 놈에게선 끝내 연락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 고위급 젊은 귀족 남성들이 참여할 만한 파티 초대장 좀 싹 모아 놔.

라고 말이다.

다시 사교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암시에 집사는 퍽 불안한 표정부터 지었다.

그간의 페넬로페가 얼마나 밖에서 패악을 떨었으면 자동 반사적으로 저런 얼굴이 나올까.

‘에휴, 내 해피 근신 라이프여. 이제 이 평화도 끝이로구나…….’

앞으로 뷘터 놈의 꽁무니를 쫓기 위해 온갖 연회에 다 참석해야 할 내 앞날이 너무 안쓰러워, 나는 조는 중에도 눈물을 머금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조금 열어 뒀던 창문이 느닷없이 밀리면서 활짝 열렸다.

그리고 곧바로 열린 창문 너머에서 강한 돌풍이 방 안까지 몰아쳤다.

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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