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0화 (3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0화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 가물가물 눈을 떴다.

하지만 눈꺼풀을 벨 듯이 시리게 스치는 칼바람에 도로 감을 수밖에 없었다.

휘이익-! 바람에 휘말린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마구 헝클어졌다.

“으으!”

몸을 웅크린 채 허둥지둥하던 것도 잠시.

갑작스레 몰아친 돌풍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치 바람이 분 적도 없다는 것처럼 잠잠해진 주변에, 나는 조심스럽게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뀨?”

그 순간,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하니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바닥에 늘어진 내 치맛자락 위로 보이는, 새하얀 솜뭉치…….

“뀨!”

아니, 토끼가 있었다.

“이 무슨…….”

나는 이 황당한 전개에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토끼가 방 안에 솟아났다.

혹시 아직도 잠이 덜 깼나 싶어서 눈을 비벼 보았지만, 여전히 내 앞에 있는 것은 새하얀 아기 토끼였다.

“뀨뀨!”

멍하게 저를 바라보는 인간을 마주 보며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내 쪽으로 깡충깡충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흰 솜뭉치가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허. 너 대체 어디서 왔어? 여기 2층인데…….”

“뀨?”

“설마 바람에 휩쓸려 오진 않았을 테고.”

내 말을 영 알아듣지 못하는지, 토끼는 그저 빨간 눈을 도로록 굴리다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내 말을 알아들으면 그건 그것대로 호러겠네.”

그 순간이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던 토끼가 갑자기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앙증맞은 두 개의 앞니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귀여운 토끼의 입에서 굵직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악!”

1초간 얼어 있던 나는, 비명을 지르며 화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 탓에 무릎 위에 올라 있던 토끼가 거의 집어 던져지듯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차 싶었으나, 다행히도 토끼는 운동 신경이 좋은지 푹신한 카펫 위에 잘 착지했다.

그러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순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뀨?”

“뭐, 뭐야? 방금…….”

분명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토끼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는가.

고작 내 주먹 크기의 작은 동물이었지만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토끼를 경계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토끼에게서 또 다시 인간 말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멍하니 웅얼거렸다.

“뭐야. 환청이라도 들은 거…….”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답변을 원한다면 상단으로 직접 찾아와 주십시오.”

“엄마야!”

그러나 내가 환청이라고 치부하기도 전에 또다시 굵직한 목소리가 토끼의 작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다시 기겁을 하고 파다닥 뒷걸음질 쳤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는지, 어느새 등에 침대 기둥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를 더 겁박할 생각은 없는지, 토끼는 내게로 더 다가오진 않았다.

“흰 토끼 상단입니다. 그럼 이만.”

토끼가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밝히는 것을 끝으로 방 안에 다시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휘이익-.

바람이 잦아들었다. 흩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강한 존재감을 내뿜던 흰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무슨…….”

나는 방금 전까지 토끼가 있던 카펫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것이 뷘터가 노멀 모드에서 여주에게 연락을 보내던 방식이란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신분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일이 드물었다.

보통 새나 쥐, 강아지 같은 소동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중 자신의 상단을 나타내는 흰 토끼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기억났다.

그것이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던 과거 내 감상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 이유는.

“이렇게 목소리로 전해 준다는 건 안 알려 줬잖아…….”

실제 게임에서는 목소리 더빙이 없었다.

뷘터가 전하는 메시지는 문자로 떠서 눈으로만 읽었지, 동물을 통해 직접 목소리를 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

작고 귀여운 토끼에게서 흘러나오던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방금 전 상황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멀쩡한 편지나 심부름꾼 놔두고, 무슨 이딴 방법으로 의뢰인에게 연락을 한담.

‘설마 이놈도 좀 미친 건 아니겠지…….’

순간 드는 섬뜩함에 곧바로 강하게 도리질 쳤다.

나는 벌써 가장 수월할 것이라 믿고 몰빵하려 했던 이클리스에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상태였다.

호감도 폭락을 대비하여 보험이 될 루트에 새로이 도전하는 것인데, 이마저도 믿을 수 없다면…….

“아니야. 설마 다섯 명 다 미친놈들만 있겠어.”

나는 다시 한번 강하게 부정하며, 노멀 모드 스토리와 황궁에서 잠시 마주쳤던 뷘터를 떠올렸다.

그는 악역에게도 선뜻 제 손수건을 내줄 정도의 매너남이었다.

어쩌면 이쪽이 호감도를 올리기 더 쉬울지 모른다.

“일단 만나러 가 봐야겠어.”

놀란 마음이 차분히 진정되자, 나는 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일어나고 보니 원래 앉아서 졸던 자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고작 한주먹거리의 작은 동물에 겁을 먹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 좀 민망했다.

‘설마 그놈이 다 보고 있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은 희소식이 분명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온갖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순간 마침맞게도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지금부터 [수상한 마법사, 뷘터 베르단디]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상단으로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좀 기다려.”

시스템 창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멋대로 명령하며 뒤돌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나갈 채비를 했다. 남들 몰래 나갔다 들어오려면 약간의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일전에 이클리스를 구하러 갈 때 입었던 로브부터 찾아 입었다.

에밀리가 버린다고 난리 친 것을 몰래 빼돌려 옷장에 박아 두길 잘했다.

그리고 보석함에서 사파이어 목걸이를 하나 뺐다. 의뢰 값이었다.

뷘터의 흰 손수건과 그에게 줄 답례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덩달아 챙겼다.

“이것까지 가져가야 하나?”

나는 마지막으로 레널드가 사 준 하회탈같이 생긴 흰 가면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토끼를 내 방으로 직접 보낸 걸로 보아, 정체를 숨기는 건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은밀하게 남자를 찾는 고위 귀족 여식’ 콘셉트이지 않은가.

‘당분간은 콘셉트에 충실하자.’

가면을 얼굴 위에 주섬주섬 뒤집어 쓴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점검한 후 후닥닥 시스템 창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다 됐어. 고!”

* * *

하얀빛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서 있었다.

“여긴가?”

내 앞에는 허름한 건물이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문에 토끼 그림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물론 이미 게임을 통해 보았기 때문에 이 건물이 뷘터의 상단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려 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한 손을 들어 올리니 ‘끼이익-’ 하고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뭐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목덜미가 좀 섬뜩했다.

나는 컴컴한 문틈 새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기억하는 게임의 장면과 똑같았다.

책상과 책꽂이, 접객용 소파. 평범한 사무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찾는 이는 없었다.

“……어디 갔나?”

흰 토끼에게 메시지를 전달받고 거의 곧바로 온 것이나 다름없는데,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좀 허탈했다.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사실 돌아가는 길을 몰라서 상단에서 부리는 마차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여기는 마차가 택시나 다름 없으니까.

그런데 나름 이름 있는 고급 정보상이란 곳에 어째, 허드렛일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무슨 상단이 고용인도 안 써.’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나는 바로 납득했다.

‘하긴, 그러니까 성인 남자 목소리를 내는 소름 끼치는 토끼나 보내는 거겠지…….’

출입문을 닫고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어쨌든 초대받은 손님인 입장이니 편히 앉아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부를 쭉 둘러보던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엉덩이를 통해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벌떡 일어났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던 진동은 곧바로 사라졌다.

“……잘못 느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소파에 앉으려던 때였다.

쿠르르릉-. 다시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악!”

나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소파를 잡고 짧게 비명 질렀다.

‘뷘터 놈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왔는데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이야!’

소파마저 덜덜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진동은 곧바로 멎었다.

“지, 지진인가?”

나는 소파의 팔걸이를 꽉 붙잡고 다음 흔들림에 대비했다.

한참 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다행히도 추가적인 진동은 없었다.

그 틈을 타 소파에서 허둥지둥 내려온 나는 창문 밖을 확인했다.

게임 속 세계의 자연재해까지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기 위함이었다.

“……응?”

그러나 막상 바라본 밖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이렇게 커다란 진동이 두 번이나 강타했는데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 하다못해 길을 거니는 행인조차 없었다.

“아무리 인적 드문 골목이라지만, 이 건물만 있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아직 축제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수도에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아주 난리가 날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창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실내에 있어서 바깥 소리가 잘 들리지 않나 싶어서. 그런데.

쿠웅-! 정작 소음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바로 등 뒤쪽, 건물 안에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