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1화
“헉.”
나는 화들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문득 벽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웬 선이지?”
벽지 위에 사각형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쿵! 그러는 사이 묵직한 소음이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이번에야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소리가 선이 그려져 있는 벽 쪽에서 나고 있다는 것을.
한달음에 벽에 도달한 나는 손으로 반듯한 네모를 그린 선을 매만져 보았다.
“이건…….”
가까이서 보니, 선이 아닌 균열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이었다. 아마도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듯한.
“오. 그래도 진짜 마법사라 이건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밀 통로에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게임에서 뷘터는 여주가 슬프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서 샤랄라한 마법들을 선보였다.
뷘터란 캐릭터에 대한 제작자의 의도야 뻔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 재롱을 피우는, 나만을 위한 키링남!’
을 노렸겠지.
노멀 모드는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쉬웠지만 뷘터 루트는 더더욱 쉬웠다.
까칠한 다른 놈들과는 달리, 자신 이 발견한 진짜 공녀한테 처음부터 호감을 거의 퍼 주다시피 했으니까.
그래서 엑스 치지 않고 놔뒀다. 기본 값이 다정하니까, 혹시나 해서.
‘지금은 빨리 보험으로 만들어야 하는 패가 됐지만.’
자조적으로 웃던 나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선이 그어진 자리를 샅샅이 훑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문고리도 없고, 미닫이문처럼 열 수 있는 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 모양으로 균열만 덩그러니 나 있을 뿐이다.
“인테리어는 당연히 아니겠고.”
턱을 매만지며 심각하게 문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벽에 가져다 댔다.
혹시 주변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버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더듬거리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문득 눈앞에 새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히든 퀘스트 발생! [마법사의 비밀을 밝혀라!]
〈SYSTEM〉
마법사의 은밀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보상 : 알 수 없는 무언가.)
[수락 / 거절]
뜬금없는 히든 퀘스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노멀 모드에는 없던 퀘스트였다.
보상부터 빠르게 확인하던 나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아오!”
히든 퀘스트는 말 그대로 ‘히든’이라서 보상도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일전의 [선택지ON/OFF] 기능처럼 말이다.
“굳이 가야 하나?”
나는 수락 버튼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사실 내겐 뷘터의 호감도만 중요할 뿐, 놈의 비밀이 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이란 다 각자만의 프라이버시가 있기 마련인데, 그걸 밝혀서 뭐에 쓴단 말인가.
‘보상으로 호감도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이거 괜히 건드렸다가 역풍 맞는 거 아니야? 에비!’
그렇게 생각하고 미련 없이 거절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쿠웅-. 문득 한 번 더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벽이 진동했다. 이번에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마법사의 수상한 공간이면, 뷘터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오래 지났는데도 놈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근시안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어쩌면 이건 내가 게임할 때 미처 열지 못한 하드 모드의 루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번 시스템 창 안의 글씨를 신중히 읽었다.
역시나 보상만 적혀 있을 뿐 실패 시 패널티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퀘스트를 실패하더라도 별 이상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나는 마음을 바꿔 수락을 눌렀다.
그러자 드르르륵, 하고 벽이 옆으로 밀리면서 비밀 통로가 나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벽 너머에는 어둡고 널찍한 복도가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이 정도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건물이 전혀 아니었다.
막상 이런 곳으로 들어오니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좀 설렜다.
쿠우웅, 쾅-!
그때, 또 한 번 미약한 진동을 수반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 폭음의 원인은 복도 너머의 공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았다. 그 쪽에서부터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귀를 꽉 틀어막은 채 긴긴 복도를 가로질러 건넜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복도 끝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공작저 뒤뜰 부지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 나타났다.
각 벽마다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커다란 책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공작저의 서재도 만만치 않은 규모였지만, 여긴 거의 국립 도서관 규모였다.
“와…….”
나는 넋을 잃고 게임에서도 본 적 없던 마법의 공간을 구경했다.
높다란 책벽 말고도 이 넓은 공간 안에는 볼거리가 정말 많았다.
바닥 곳곳에 있는 커다란 유리 케이지. 그 안에는 처음 보는 보석이나 액세서리, 혹은 알 수 없는 광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다른 쪽에는 듣도 보도 못한 동물의 박제나 공룡의 화석을 복원한 것 같은 거대한 뼈들도 존재했다.
“여기 꼭…… 박물관 같잖아?”
나는 꿈결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대박, 여기 너무 좋다.”
비밀스러운 공간 안에 더더욱 비밀스러운 것들이 존재하다니!
좀 더 안쪽으로 가서 이곳저곳 구경할 요량으로 귀를 막고 있던 양손을 뗐다.
그리고 신나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이었다.
쾅! 쿠웅-!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커다란 굉음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야, 멍청아! 저길 맞추라고!”
“이, 이렇게?”
“이렇게!”
쾅, 콰직!
“악! 파편 조심해!”
한쪽 구석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 뒤로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동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사자, 고양이, 다람쥐, 강아지, 돼지…….
“아오, 씨! 살살해! 이러다 안에 든 상자 망가지면 우리 상단주님한테 죽어!”
아슬아슬하게 얼음 조각을 피해 바닥을 뒹굴던 사자 가면을 쓴 아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알았어. 이번에는 주변만 살살 깎아 볼게…….”
한 명이 울적하게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들었다.
‘지팡이? 마법사들인가?’
문득 쏟아지는 얼음 조각들을 피해 도망갔다 돌아온 다른 아이도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다.
“이번엔 네가 왼쪽 해! 난 오른쪽 한다!”
총 다섯 명의 아이들이 그들의 키보다 훨씬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둘러쌌다.
나는 유심히 얼음 덩어리를 관찰했다. 한가운데에 무언가 갇힌 채 얼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왠지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고대 마법사의 유물!’
[고대 마법사의 유물 획득!
이 목걸이는 뷘터가 북부에서 발굴한 유적 중 하나로 고대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아티팩트다. 근처에 독성 물질이 있을 시 색이 변하여…….
……출빙할 때 다른 유물들은 모두 파괴되고 오로지 하나만 남은 것으로, 이 아이템 획득 시 희소성이 인정되어 뷘터의 호감도가…….]
뷘터의 호감도가 몇 퍼센트나 올랐는지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다른 유물들은 모두 파괴되고 하나만 남은 이유가 있잖아!’
그때였다.
“놈 페르다뇽 페로 쑴!”
돼지 가면을 쓴 아이 한 명이 요상한 주문을 외쳤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에서 하얀빛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콰앙-!
빛이 얼음덩어리에 닿자마자 폭발을 일으켰다.
“아악! 피해!”
꼬맹이들이 다시 우르르 피했다.
한차례 뿌연 연기가 가시고 나자, 상자에 근접한 부분이 푹 파여 있었다.
“와, 애들아! 드디어 모서리가 튀어나왔어! 우리가 해냈어!”
“정말이네? 한 번 더 같이해 보자!”
나는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애들을 보며 경악했다.
‘이런 무식한 것들! 유물은 아기 다루듯 다뤄야 한다고!’
쟤들이 하는 짓을 보니 저러다가 곧 얼음 덩어리는 물론이고, 그 안에 있는 상자까지 다 부숴 먹겠다.
“얘들아!”
나는 헐레벌떡 아이들 근처로 뛰어갔다.
“놈 페르다뇽…….”
“얘들아, 그만!”
나는 또 괴상한 주문을 외는 아이들의 앞을 다급히 막아섰다.
“너희들 대체 뭐 하고 있니?”
열 살, 열한 살쯤 되었을까. 똘망똘망한 눈들이 내게로 확 쏠렸다.
사자 가면이 얼음을 가리키고 있던 작은 지팡이로 나를 가리켰다.
“헉! 아줌마는 누구예요?”
“아줌마라니!”
나는 정색했다.
“하지만 귀족 아줌마들 얼굴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데요!”
“맞아, 맞아! 무서운 귀족 아줌마들 얼굴이야!”
나는 그제야 내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웬 귀족 아줌마?’
근본 모를 비유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대충 혼자 이해했다.
아이들 눈에는 웃고 있는 흰색 가면이 하얗게 분칠한 귀족 여성을 연상케 하는가 보다.
“귀족 아줌마 아니야. 손님으로 왔단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른답게 설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니?”
“우린 상단주님 수제자들이에요.”
“멍청아! 말하면 어떡해!”
“그런데 손님들은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데!”
“여기 못 들어오는데! 어떻게 왔지?”
아이들이 한꺼번에 왁자지껄 떠들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원래 현생에서도 아이들한테 취약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중, 문득 유치원 구호가 떠올랐다.
“애들아! 그만, 그만! 합죽이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