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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2화 (3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2화

‘합!’ 하고 뒤따라오는 구호는 없었지만, 다행히 먹히긴 했는지 아이들의 입이 합죽 다물어졌다.

나는 기세를 몰아 빠르게 말했다.

“내가 누구고, 너희들이 누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너희들이 지금 소중한 유물을 부수려고 한다는 거지!”

“…….”

“말뚝이랑 망치 없니? 너희들 스승이 이런 식으로 얼음을 깨부수라고 지시했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혼내는 투로 들렸는지 아이들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요…….”

맨 처음 지팡이로 날 가리켰던 아이가 기가 팍 죽어서 웅얼웅얼 대답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사실 상단주님이 이걸 주고 가셨는데…….”

아이의 손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은 작은 손 크기에 꼭 맞는 작달만 한 송곳과 망치였다.

그걸 본 다른 아이들도 각자 주머니에서 제 것들을 꺼내 보였다.

“얼음이 너무 두껍고 딱딱해서 이걸로는 캘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몇 분 지나면 그 자리가 복원되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우리도 마법을 쓸 줄 아니까 상단주님처럼 금방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서러움을 앞다퉈 호소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줘 봐.”

한 아이에게서 송곳과 망치를 건네받은 나는 내 키만큼 커다란 얼음 덩어리 앞으로 다가갔다.

호기심이 들었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내 뒤를 쫓아왔다.

‘정말이네.’

깎인 단면의 얼음이 저절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곧 움푹 파여 모서리가 드러났던 곳이 조금씩 덮어졌다.

나는 증식되는 얼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증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드러난 모서리가 모두 덮이진 않은 것이다.

‘잘하면 캐낼 수 있겠어.’

나는 옆에 있는 사자 가면 아이에게 물었다.

“뜨거운 물 있니?”

“네! 마법으로 만들 수 있어요!”

“유물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튀어나온 모서리에 닿지 않게 이 주변에 조금만 뿌려 줄 수 있어?”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 주변에 제 지팡이를 갖다 댔다.

“워터 피쑌!”

지팡이 끝에서 분무기처럼 솔솔 물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이제 멈춰. 좀 기다렸다가 내가 뿌리라고 하면 다시 뿌려 줘.”

“네!”

나는 아이들의 잘못을 더 타박하지 않고 몸소 행동했다.

뜨거운 물이 닿자 꽝꽝 얼어붙었던 얼음 단면이 조금 녹아내렸다.

나는 상자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물러진 얼음 위에 송곳을 가져다 대고 망치로 세게 내리쳤다.

쩌저적-. 상자 주변으로 기다란 균열이 생겼다.

나는 이어진 균열을 따라 몇 번 더 송곳을 내려쳐 커다란 조각 한 덩이를 들어냈다.

유물 상자의 모서리가 다시 훌쩍 드러났다.

나는 더 손대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게다가 한번 깎였다가 자라난 부분은, 이후 다시 한번 깎였을 때 복원되는 속도가 훨씬 더뎠다.

“……유물이 상하지 않게 얼음을 깨려면 이 수밖에 없겠어.”

“어떻게요?”

“정공법.”

나는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에게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마법으로 쉽게 해결할 생각 말고, 일일이 녹이고 손수 깨야 한다는 소리야.”

“히잉…….”

아이들이 크게 실망했다. 쉽게 발굴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듯했다.

“그래도 한번 깎인 부분은 복원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 같아.”

“그럼 그 부분들만 골라서 계속 깨면 되겠네요?”

“그래, 맞아.”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내가 사자랑 같이 먼저 깰 테니, 너희들이 그 자리를 얼른 연달아 깨렴. 알았지?”

“네!”

나를 향해 초롱초롱 빛나는 눈들을 보니 조금 우쭐해졌다.

잘 아는 분야라서 조금 신이 나기도 했다.

힘차게 대답하는 꼬맹이들을 데리고, 나는 본격적인 출빙 작업에 나섰다.

사실 책에서나 수십 번 읽었지, 발굴을 직접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 가면 과제로 질리도록 할 줄 알았는데…….’

씁쓸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을, 난데없이 끌려온 게임 속에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 이제 여길 쳐 봐. 상자에 송곳 닿으면 안 돼. 스크래치 나니까.”

“나도 해 볼래!”

“나도, 나도!”

우악스럽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예상외로 나보다 훨씬 더 섬세했다.

그렇게 출빙을 시작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나도, 아이들도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쯤 소중한 유물 상자는 얼음 덩어리에서 절반이 빠져나온 상태였다.

물난리가 날 줄 알았던 바닥은 의외로 출토 작업 현장보다 깨끗했다.

떨어진 얼음 가루들에도 마법이 유효한지 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아, 허리야…….”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자, 삭신이 쑤셨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아이들도 칭얼대며 저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제 몸들을 두드렸다.

“힘들어…….”

“나도.”

“그래도 반이나 했다!”

그때, 한 명이 애써 기운 차린 목소리로 유물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네!”

덩달아 그쪽을 바라본 나는 조금도 상한 부분이 없는 상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고생했어, 다들.”

“아줌마 덕분이에요!”

“맞아요! 아줌마가 알려 준 덕분이에요!”

아이들이 내 쪽으로 몰려와서 짝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이것들이 아줌마 아니라니까.’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박수를 따라 쳤다.

그때였다.

“당신, 누굽니까.”

등 뒤에서 소름 끼칠 만큼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뼉을 마주친 자세 그대로 바짝 얼어붙었다.

애들이랑 좋다고 유물을 발굴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해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나는 기름칠 안 한 로봇처럼 삐걱삐걱 뒤를 돌아보았다.

흰 토끼 가면을 쓴 장신의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었다.

“마법을 걸어놔서 일반인은 알아채지도, 들어오지도 못할 텐데.”

가면에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군청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서서히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이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크고 우람한 지팡이가 내게 겨눠졌다.

“가면을 쓴 걸 보니 당신, 마법사인가?”

그 끝에서 하얀 빛 덩어리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그것이 쏘아질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히든 퀘스트 진행하느라 왔는데요.’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가면이라도 벗을까? 그래서 내가 누군지 그냥 확 밝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호감도 9%]

뷘터 놈의 머리 위가 불현듯 위태롭게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호감도 -1%’

‘호감도 -2%’

‘호감도 -2%’

‘호감도 -1%’

나는 그의 호감도 게이지 바위에 갑작스럽게 우르르 뜨는 작은 글씨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저거 뭐야!’

[호감도 3%]

‘안 돼! 안 돼, 제발-!’

9%였던 호감도가 순식간에 폭락했다.

그마저도 3%에서 완전히 멈춘 게 아니라 위태롭게 깜빡이는 것이다.

나는 벌벌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패널티 없다며. 분명 없댔잖아, 그런데 왜!’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손 쓸 틈도 없이 떨어진 호감도를 보며 꼴사납게 울었을지도 모르니까.

뷘터는 여전히 내게 겨눈 지팡이를 까딱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건지 당장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그게…….”

처음 겪는 호감도 폭락에 머릿속이 새하얬다.

너무나도 당황한 상태라,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처럼 입술만 달싹일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무렵.

“저희가 데리고 왔어요!”

뒤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와 내 앞을 막아섰다.

“아줌마가 유물 발굴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서 도와 달라고 했어요!”

“맞아요!”

“이 아줌마가 도와주셔서 거의 다 했어요! 봐요, 상단주님!”

아이들이 나를 감싸며 뒤에 있는 얼음 덩어리를 손가락질했다.

손짓을 따라 유물을 확인한 뷘터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엄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외부인을 절대로 이곳에 출입시키면 안 된다고 수차례 말했지 않느냐.”

“아줌마는 외부인 아니라 손님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상단주님이 내주신 숙제는 너무 어려웠는걸요…….”

고작 몇 시간 본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나를 도와줄 줄 몰랐다.

그런데 고맙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손님’이란 말에 뷘터는 눈빛을 달리했다.

유물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잠시 가늠하던 그는, 이내 빛이 나는 지팡이를 내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신 분께 제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인지라.”

이클리스의 입바른 사과 이후, 남주 후보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사과였다.

이곳에선 그 누구도 페넬로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뷘터에게서 무례를 사과받고도 나는 기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발굴 현장의 모습에 신이 나서 얼음이나 캐던 내가 너무 한심하고.

죽을까 봐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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