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3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손 쓸 새도 없이 호감도가 마구 떨어지는 그 순간의 공포, 두려움.
잠시라도 즐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위험이 닥치는 이 게임 속 세상이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호감도 폭락에 대한 충격의 여파로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뒤로 감춰 맞잡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비밀 공간인지 몰랐어. 내가 실례했군.”
턱 끝을 잠식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는 움츠러드는 턱을 필사적으로 치켜들어야 했다.
두려움 따윈 모른다는 듯 악착같이 오만한 귀족 여식을 연기해야 했다. 끔찍했다.
뷘터는 예상외로 여린 미성과 당당한 태도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이곳은 의뢰 상담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는 예의 바른 몸짓으로 안내를 도맡으려 들었다.
말이 안내였지, 당장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쫓아내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시스템 창이 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퀘스트 내용대로 ‘수상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왔지만, 성공했다는 창은 뜨지 않았다.
호감도가 폭락한 것으로 보아, 들키지 않고 들어갔다 나오는 게 ‘히든 퀘스트’였던 듯했다.
그리고 나는 장렬하게 실패했다.
하드 모드의 히든 퀘스트는 원래 이렇게 모든 정보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일까.
‘미친 게임 같으니라고. 퀘스트고 뭐고 다신 수락 안 해.’
나는 수차례 다짐하며,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뷘터의 곁에 도달했다.
그는 내가 다가오기 무섭게 몸을 돌려 복도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애들 해치는 괴물이라도 되니?’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다.
물론 몰래 들어온 건 잘못했지만, 애들이랑 같이 유익하고 재밌게 잘 놀았는데 왜 이런 취급까지 당해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귀족 아줌마! 잘 가요!”
“다음에 또 같이 놀아요, 아줌마!”
문득 들리는 소리에 뒤를 바라보니, 새끼 동물들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개중 제일 먼저 나를 감싸 준 사자 가면의 아이가 검지를 제 입에 ‘쉿’ 하고 가져다 대며 찡긋 윙크했다.
‘깜찍한 것들.’
감싸 줘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쫓겨나듯 이곳을 떠나야 해서 영 미안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비록 가면에 가려져 내 웃는 얼굴이 보이지 않겠지만 활짝 웃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토끼 가면에 놀라 후닥닥 손을 내리고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처음 들어올 땐 혼자였던 복도를 뷘터와 함께 되돌아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나는 음울한 눈으로 [호감도 3%]를 바라보았다.
앞을 막아서며 거짓말을 해 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놈이 쏜 마법인지 레이저인지에 맞고 죽었을 것이다.
보험으로 삼기는 개뿔, 호감도가 더 떨어지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하…….’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오는 복도는 훨씬 짧았다. 뷘터는 열린 문 옆에 비켜서서 내가 먼저 바깥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속으로는 벌벌 떨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앞을 지나쳤다.
곧바로 내 뒤를 따라 나온 뷘터는 나를 등지고 선 채 열려 있는 문을 향해 지팡이를 까딱였다.
드르르륵- 옆으로 밀렸던 문이 닫혔다.
‘어?’
나는 다시 벽으로 변모한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던 네모난 선조차 완벽히 사라졌다. 다음에 왔을 땐 어디가 비밀 통로인지 전혀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뷘터는 마법 행위를 내가 보는 것이 개의치 않은 듯했다.
아주 그냥 이중삼중으로 잠그는 듯, 여러 번 지팡이를 까딱이던 그가 마침내 손을 내리고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지만 의뢰를 받기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찾아와 주시지요.”
솔직히 나는 그가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냐고 더 추궁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정중한 어투로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그의 말에 흘긋 출입문 옆,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어느새 넘실넘실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중하는 바람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내가 방에 없다는 것을 에밀리가 눈치채고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틀렸어.”
‘공작이랑 면담 확정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치솟는 눈물을 삼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의뢰를 맡기러 온 게 아니라, 흰 토끼를 통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답변을 들으러 온 거야.”
“아…….”
“아무도 없어서 꽤 오랫동안 기다렸어. 바로 돌아가도 됐지만, 내가 또다시 이곳을 방문할 만큼 한가하지 못해서 말이야.”
실상은 시간이 남아돌았지만, 나는 바빠서 두 번은 못 오는 척 말했다. 공녀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들이 저곳에서 나와서 도와 달라고 했어.”
알겠냐?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네놈이 늦게 와서 그런 거라고.
나는 마지막까지 철면피를 뒤집어쓰고 쐐기를 박듯 빠져나온 벽을 손가락질했다.
뷘터는 확실히 ‘흰 토끼’란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당황하는 눈치였다.
마법사라도 비밀스러운 공간에 마구 침입한 무뢰배가 오늘 연락드린 고객일 줄 알아보는 능력은 없나 보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의뢰자분들은 보통 연락을 받고 하루나 이틀 후에 찾아오시기 마련인지라…… 이렇게 빨리 방문하실 줄 몰랐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뭐야, 그런 관례가 있었단 말이야?!’
귀족 놈들이 연락받고 하루나 이틀 후에 찾아오는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참을성도 없이 답변을 듣기 위해 메시지를 전달받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이 돼 버렸다.
게다가 그 듣겠다는 의뢰 내용이.
‘연회에서 본 남자를 애타게 찾는다는 거였잖아……!’
어쩌면 뷘터는 이 의뢰를 받자마자 내가 찾는 이가 본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손수건’이란 힌트를 줄 때부터 그런 걸 의도했으니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의뢰는 없었던 걸로 해. 날 기다리게 만든 것에 대한 무례는 내가 저곳에 들어간 것으로 대신하지.”
나는 몸을 강타하는 쪽팔림에 아무 말이나 내뱉고 휙 뒤돌았다.
계획이고 추가 의뢰고 모르겠다. 일단 여기서 나가고 보자.
허둥지둥 출입문으로 뛰쳐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다급한 목소리가 분주한 발걸음을 붙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지?”
나는 더 도망가지 못하고 마지못해 토끼 가면을 돌아보았다.
군청색 눈동자가 나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리시게 만든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돌봐 준 은인께 큰 무례를 저질러 놓고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는 못 쫓아내서 안달 내었으면서 갑자기 왜?’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과장된 그의 말을 부인했다.
“됐어. 은인까진…….”
“제게 부디 엄수하지 못한 신뢰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레이디.”
그러나 뷘터가 내 말을 자르며 한 번 더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다음에 만회하자며 거절하려 했다.
말도 없이 공작저를 나선 것이 대대로 알려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히든 퀘스트로 인해 전부 어그러진 계획을 재정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머리 위가 반짝이더니.
[호감도 6%]
나는 곧바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럼 의뢰에 대한 답을 들어 보도록 할까.”
도도하게 대꾸한 채 먼저 발을 옮겨 접객용 소파에 앉았다.
얼마 후 뷘터 또한 내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가 문득 무언가를 부르듯이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휙, 하고 찻잔과 주전자가 날아왔다.
나는 내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찻잔에 김이 나는 뜨거운 홍차가 저절로 따라지는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 마법 처음 보는 촌사람 티는 안 날 것이다.
“드시죠.”
그가 손을 내리자 주전자도 테이블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나는 잔을 들어 적당한 온도로 우러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뷘터가 곧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마법사가 운영하는 상단이라는 것은 극소수만이 아는 사실입니다.”
‘난 네가 후작인지도 알고 있다고.’
난 속으로 우월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더군다나 저 공간을 본 자는 아무도 제 발로 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들려오는 말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뿜을 뻔했다.
다급히 잔을 내려놓은 나는 싸늘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예? 아닙니다. 그건 범죄지 않습니까.”
뷘터가 황당하다는 듯 답했다.
“기억을 지우는 마법은 몸에 무리가 많이 가서 깊은 잠에 들기 때문에 제 발로 걸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크흠!”
나는 급 무안해져 헛기침했다.
“본래는 레이디의 기억 또한 지워야 마땅하나…….”
다행히 뷘터는 내 민망함을 모른 척해 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