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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4화 (3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4화

“오늘 제가 지키지 못한 약속과 아까 저지른 무례로 인해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

“상단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고객과의 신뢰가 아니겠습니까. 기억을 지우게 되면 저희 상단에 의뢰를 맡기신 일까지 모조리 지워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경청하던 나는 지운다는 기억의 범위에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온갖 무도회를 돌며 뷘터를 찾아다니는 척해야 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부디 오늘 본 공간에 대한 비밀을 지켜 주십시오.”

“…….”

“대신 레이디께서 찾는 이에 대한 정보를 대가 없이 원하는 만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바로 덧붙여지는 파격적인 조건에 깜짝 놀랐다.

대관절 저 비밀 공간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입단속을 하는가.

“안에 있는 아이들이 뭐기에? 반역자의 자손들이라도 돼?”

“반마법 단체에 의해 감금된 채 학대받다가 구출된 고아들입니다.”

“반마법 단체……?”

‘이 게임에 그런 심오한 설정도 있었나?’

머리를 굴려 떠올려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뷘터는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이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신실한 교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마법사들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리를 그르치는 사특한 흑마술이라 모함하면서 말입니다.”

“…….”

“현 황가 또한 정통성을 신의 신탁에 결부하고 있기에, 마법사들의 처우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뷘터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몇몇 이교도 중에서는 사특한 요술을 부리는 자들이 모두 사라져야 신이 선택한 진정한 황제가 탄생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

“얼마 전 황태자가 군대를 이끈 전투에서 패배한 레일라 신국의 잔당들이 요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레이디께서도 아시겠지요.”

“물론.”

물론 전혀 몰랐다.

그러나 모두 아는 척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의외로 제국의 귀족 중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국의 귀족들이……?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주로 마도구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업을 하는 자들이 그렇지요. 마법사들을 이용은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지워야 마법을 이용한 모든 시장을 본인들이 독점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게임을 할 때는 뷘터가 왜 자신이 마법사임을 숨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제작자 설정값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심오한 사정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전에 겪었던 황태자의 배경도 그렇고, 그저 기본 설정이라 생각했던 것에는 다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내가 알고 있던 원래 게임과의 괴리감을 떨칠 수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그때, 뷘터가 머리 숙여 한 번 더 당부했다.

“아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뷘터의 머리 위로 [호감도 6%]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답하느냐 따라 호감도의 감소와 증가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입조심하겠다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여기서 왜 호감도가 관련되는 거지?’

오늘 겪은 일은 모두 돌발 상황들이었다. 특히 히든 퀘스트는.

‘정보상에 뷘터를 찾는 의뢰를 넣는 것부터 원래의 게임 스토리에 없는 일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돌연 눈을 부릅떴다. 내 생각의 커다란 오류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게임 설정의 기준은 모두 노멀 모드 기준이라는 것을.

‘……나는 하드 모드의 뷘터를 모른다.’

뷘터는 게임에서도 주기적으로 뒷골목 고아들을 거두어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량한 이미지란 설정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빈민가를 전전하던 마법사는 어느 가난한 평민이 주워 키우던 진짜 공녀를 발견한다.

마법사의 도움으로 공작저로 돌아온 마음씨 착한 여주는, 그를 따라 성심성의껏 불우한 아이들을 돕고 아낌없이 제 것을 기부했다.]

머릿속에 줄줄 설정을 나열하던 나는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정하고 인성이 착한 뷘터가 왜 하필, 페넬로페의 성인식에 여주를 데리고 왔을까?’

가짜 공녀가 가장 주목받는 때.

누가 봐도 페넬로페를 엿 먹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레이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뷘터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불렀다. 순식간에 묘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뜬금없이 등장한 히든 퀘스트. 폭락한 뷘터의 호감도.

하드 모드의 스토리를 정확히 모르는 나는,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 원 스토리를 파괴하며 죽음을 잘 피해 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게 하드 모드에 포함된 루트 중 하나라면?’

나는 떨리는 손을 꾹 다잡으며, 오랜 기간 꺼 둔 선택지를 켰다.

‘……선택지 ON.’

당장 확인해야 했다.

곧바로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선택지를 [ON]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나는 [예]를 눌렀다. 그러자 바로 선택지가 생겼다.

1.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2. 글쎄…… 별로 구미 당기는 제 안이 아니네. 뭐 희귀한 보석 없어?

3. 내가 만약 아이들에 대해 떠들어 대고 다닌다면? 그럼 어쩔 건데?

‘아…….’

나는 탄식했다. 왜 불길한 생각은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

노멀 모드에서 모든 남주들에게 미움을 산 페넬로페의 이면에는 이미 이러한 상황들이 촘촘히 깔려 있던 것이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내가 만약 아이들에 떠들어 대고 다닌다면? 그럼 어쩔 건데?”

오랜만에 내 통제를 벗어난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면에 뚫려 있는 구멍 틈으로 보이는 뷘터의 눈동자가 무섭게 굳어졌다.

그에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면 지금 쥐고 있는 알량한 지위마저 위태로워질 겁니다, 손님.”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내 정체에 대해 속삭였다.

머리를 숙였다고 부탁이 아니었다. 이건 경고였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흰 토끼를 받았다고 말한 이상 내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노멀 모드에서 페넬로페는, 뷘터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생각 없이 떠들고 다녔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선택지 OFF.’

다시 선택지를 끄며 나는 비로소 내 의지로 입을 열었다.

“……입조심하도록 하지.”

내 확답에 남자에게서 쏟아져 나오던 살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호감도 8%]

폭락했던 호감도가 처음과 엇비슷하게 회복됐다.

그것에 안도하는 내가 너무 비참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 얘기는 다 끝났나?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만 가 봐야겠어.”

혼자만의 가면 무도회에 나는 너무 지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답답하게 가면을 쓰고 오지도 말걸 그랬다.

뷘터가 나를 따라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레이디께서 찾는 분에 대한 정보는…….”

“그건 됐어.”

서둘러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짧은 사이 결정을 빠르게 끝낸 나는 냉정하게 뇌까렸다.

“사실 다른 정보상에서 찾아내서 이미 누군지 아는 상태니까.”

그가 움찔, 몸을 굳혔다. 예상치 못한 한 방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별로 통쾌하지도 않았다.

다른 남주들에 비해 뷘터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지만, 결국 보험으로 삼겠다는 계획은 실패다.

망할 히든 퀘스트 때문에 놈의 비밀을 강제로 알게 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게다가 뷘터는 곧 노멀 모드의 여주를 찾아낼 예정이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빈민가의 아리따운 아가씨와 오늘로써 입에 폭탄을 품은 공작가의 미친개.

내가 희망을 걸었던 뷘터의 ‘다정함’은 결국 양날의 검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차라리 아직 여주를 만나기 전인 놈들을 공략하고 말지.’

나는 그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든, 신경 쓰기를 관뒀다. 그리고 [호감도 8%]를 싸늘하게 지나쳤다.

“아참.”

그러다 문득 여기 오기 전 꾸역꾸역 챙겨 온 부산물들이 떠올랐다.

“입을 다무는 대가로 정보를 제공한다고 했지.”

나는 다시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로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보는 됐고, 이것들을 그 사람한테 전해 줘. 오늘 여기 온 건 이걸 추가로 의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찻잔 옆에 흰 손수건과 고풍스러운 벨벳 상자를 차례대로 올려놨다.

“뭐라고 전달드리면 될까요?”

“답례, 라고 하면 알아듣겠지.”

군청색 동공이 조금 커졌다.

그 순간.

[호감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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