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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5화 (3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5화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나는 미련 없이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수고해.”

이걸로 그에게 진 빚은 모두 끝났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종이에 엑스부터 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출입문을 열던 찰나였다.

탁,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다시 닫혔다.

‘……응?’

다시 문고리를 돌리던 나는, 불쑥 머리 위로 뻗어져 나온 팔을 보고 당황했다.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남자가 손을 뻗어 출입문을 막고 있었다.

황급히 뒤돌자 토끼 가면이 코앞에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커다란 덩치 아래 갇힌 상태였다.

“……레이디.”

머리맡에 낮고 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한 자세에 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뭐야? 아직 할 말이 남았나?”

뷘터는 잠시간의 틈을 두고 말했다.

“……오늘 아이들을 돌봐 준 것에 대해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됐어. 내가 먼저 출입하면 안 되는 장소에 들어간 것이니…….”

“저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말입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며 천천히 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가면과 가면 사이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확실하게 입 다물라고 협박하는 건가?’

목이 바싹 탔다. 그렇게 압박하지 않아도, 놈과 더 엮이지 않도록 알아서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다.

나는 그를 피해 문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필요한 거 없는데?”

답례는 무슨, 여기서 나가면 넌 뒤도 안 돌아보고 엑스다.

내 말에 뷘터는 잠시 침묵하다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전 마법삽니다.”

“…….”

“일반인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나는 좀체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당황했다.

‘그래서 일반인은 날 죽이지 못하지만, 자기는 날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뭐야.’

신종 협박에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릴 때였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이곳을 다시 찾아 주십시오.”

그 순간이었다.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인 뷘터의 머리 뒤편으로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히든 퀘스트 [마법사의 비밀을 밝혀라!] 미션 완료!

〈SYSTEM〉 마법사의 은밀한 공간에서 무사히 비밀을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마법사의 도움 1회]가 주어집니다.

〈SYSTEM〉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하.”

보상의 내용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퀘스트로 인해 내가 겪었던 두려움, 치열한 고민, 결정.

이젠 다신 놈을 만나지 않을 생각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치곤, 참으로 터무니없지 않은가.

“……진짜 너무하네.”

“예?”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에 뷘터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위를 막고 선 그의 가슴팍을 살포시 밀었다.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짓이었는데, 문을 못 열게 막아서던 방금 전과는 달리 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이윽고 완전히 시스템 창 뒤로 밀려난 그에게서 손을 떼는 척하며 [예.]를 눌렀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지.”

나는 그 기막힌 보상이나마 받아 놓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목숨이 위태위태한 내 상황에, 어디서 어떻게 써먹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물론 최대한 그럴 일은 없어야 한다.

〈SYSTEM〉 [마법사의 도움 1회]를 획득했습니다.

사용 시에는 [도움]을 외치십시오.

마지막 시스템 창을 확인한 후, 나는 몸을 돌려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마침내 뷘터의 상단에서 빠져나왔을 때, 골목길은 노을이 지고 어두컴컴한 땅거미가 길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하, 미친…….”

터덜터덜 출입문 앞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깊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마차 불러 달라는 걸 깜빡하면 어떡해, 멍청아…….”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돌아갈 땐 순간 이동 기능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들어가서 도와 달라고 할까?’

꽉 닫고 나온 문을 돌아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그 고민을 털어냈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나와 놓고, 다시 들어가서 마차를 불러 달라 그러면 얼마나 황당할까.

오늘치의 철판을 다 써 버린 나는 더는 수치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 언제 돌아가냐. 공작이 아직 퇴근하기 전이어야 할 텐데.’

나는 우선 일직선으로 이어진 골목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골목 끝은 바로 대로변으로 이어지는지 환한 불빛이 가득했다.

아직 축제 기간이 끝나지 않아 왁자지껄한 소음도 전해져 왔다.

‘일단 큰길로 나가자. 그럼 마차를 잡아타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있겠지.’

이클리스를 구할 때처럼 깊고 미로 같이 꼬인 골목이 아님에 감사하며,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짧은 골목을 금방 가로지르자, 예상대로 큰길이 나왔다.

거리에는 일전에 공작의 아들놈들과 함께 구경했던 축제의 거리와 흡사한 광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차를 잡아타야 하는데 마차가 지나다니기는커녕, 사람 떼가 넘쳤다.

나는 인상을 북북 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문득 익숙한 문양이 그려진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신분 패 좀 보여 주십시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인상이 썩 좋지 않은 사내 한 명을 잡고 검문했다.

“내 시, 신분 패는 왜 보려는 거요.”

“축제 기간 동안 수도에 숨어든 범죄자들을 철저히 단속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어서 꺼내십시오.”

“그, 그게…….”

기사들과 사내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갑옷이네.’

곰곰이 생각하며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부릅 홉떴다.

‘헐! 저거 에카르트 문양이잖아!’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니 공작가의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쫙 깔려 있었다.

‘기사들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설마, 내가 없어진 걸 벌써 눈치채고 날 잡으러……?’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이 느꼈다.

큰일 났다. 현재 가문의 기사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데릭이었다.

주변에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몰래 나온 거, 걸리면 죽는다.’

내 입으로 근신한다고 했지만, 아직 공식적인 철회가 떨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릭 놈에게 들키지 않고 집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실랑이가 벌어졌던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오셨습니까!”

기사들이 각 잡힌 자세로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나는 설마,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칼. 에카르트의 문양이 순은으로 음각된 갑옷 위로 화려한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남자.

데릭이었다.

놈은 바로 근방까지 당도했다. 들킬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로브 후드와 가면으로 완벽하게 얼굴을 숨긴 상태라는 것이었다.

‘설마 가면을 알아보진 않았겠지.’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나를 혐오하는 데릭은 내가 산 가면까지 기억할 만큼 섬세한 인간이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우글거려서 그는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적당한 때 인파에 몸을 숨겨 이동할 생각이었다.

‘좋아, 저 무리다!’

때마침 나처럼 가면을 뒤집어쓴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데릭을 힐끗거리며 타이밍을 잴 무렵이었다.

부하에게 자초지종을 듣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의문이 서렸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너…….”

‘X됐다.’

나는 그가 완전히 나를 알아보기 전에 뒤돌았다. 그리고 골목 안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골목 끝은 뷘터의 상단을 비롯한 건물들이 들어선 막다른 길이었다.

데릭 놈이 쫓아온다면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쾅!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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