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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36화 (3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36화

나는 필요 없다고 허세 부리며 나온 지 5분도 안 돼 퀘스트 보상 구호를 외쳤다.

“헉, 허억…….”

“…….”

내부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뷘터는 문 앞, 나를 막아 섰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커다랗게 확장된 군청색 동공에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가면을 써서 천만다행이다. 괜히 썼다고 불평했던 것이 무색하게 손바닥 뒤집듯 생각이 뒤집혔다.

“……일단 문부터 닫으시고 안으로 들어오시죠.”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뷘터는 이내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큼, 큼.”

‘제기랄, 쪽팔려.’

나는 몰려오는 수치심에 억지로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꽉 닫기 전에 문틈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데릭은 없었다.

‘따돌린 건가?’

그렇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놈이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 내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하면 끝이었다.

“갑자기 말 바꿔서 미안하지만, 아까 주겠다던 도움은 아직 유효하겠지?”

“물론입니다.”

“그 도움, 지금 쓰지. 나를 헤밀튼 스트릿으로 데려다줬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

숨도 안 쉬고 말을 토해 냈다. 데릭보다 빨리 저택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뷘터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헤밀튼 스트릿이라면…….”

그는 내가 말한 거리명이 어딘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디긴.’

에카르트 공작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어차피 이미 내 정체가 들통난 상태이니, 대놓고 내 방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면 훨씬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계속 모른 척 연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다시 볼 놈도 아니었기에.

“축제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차를 잡기 어려워.”

나는 한발 늦게 변명을 중얼거렸다.

“호위를 데리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토끼 가면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진중함으로 물들었다.

나는 저택에 놓고 온 내 하나뿐인 호위를 떠올렸다.

말이 호위지 이클리스를 정말로 그렇게 쓸 생각은 없었다.

‘몰빵이 확정됐으니 이제 앞으로 더더욱 아기 다루듯이 다뤄야 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답을 했다.

“……레이디에게는 하나쯤 은밀한 비밀이 있기 마련이니까.”

의문스러운 눈빛이 거둬졌다. 뷘터는 내 대답을 대충 납득한 것 같았다.

그는 품에서 지팡이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얹어 주시겠습니까?”

예상대로 마법을 써서 이동하려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크게 안도하며 기꺼이 그가 내민 손 위에 한 손을 겹쳐 올렸다. 불현듯 그가 와락 힘을 줘 내 손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마법사의 도움 1회]가 사용됐습니다.

〈SYSTEM〉 [헤밀튼 스트릿]으로 이동합니다.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를 끝으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와 뷘터는 익숙한 거리 옆의 인적 드문 골목에 서 있었다.

마법으로 순식간에 헤밀튼 스트릿까지 이동한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확실히 데릭 놈보다 앞서 왔겠지.’

회심의 미소를 짓던 나는,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뷘터의 마법으로 이동한 건데, 그 느낌이 꼭…….

‘……내가 시스템으로 순간 이동할 때랑 비슷하잖아?’

아리송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불쑥 옆에서 뷘터가 말을 걸었다.

“응? 뭘…….”

“잡고 계신 제 손 말입니다.”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외간 남자의 손을 깍지까지 껴서 꼭 붙들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으헉!”

나는 기겁을 하며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내팽개치듯 털어냈다.

‘뭐야. 언제 이렇게 꽉 잡고 있던 거지?’

우왕좌왕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거둬지는 그의 손을 보니 좀 과했나 싶어 미안해졌다.

어쨌든 요긴하게 그의 도움을 써먹긴 했으니, 나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뷘터는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레이디께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신뢰는 확실히 회복했네.”

칼 같은 빚 타령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따지고 보면 후작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는 남자가 아닌가.

상단을 위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게, 어떻게 보면 ‘괴짜 마법사’란 설정에 충실하기 그지없었다.

내 농담에 뷘터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희 상단을 또 찾아 주시는 겁니까?”

“……글쎄.”

나는 뷘터의 물음에 웃음기를 지우고 그를 마주 보았다.

“우리가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서늘한 밤바람이 한차례 골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두 사람.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겠지.’

끝까지 모른 척하는 게 나았다. 곧 여주를 찾아낼 그도, 나도.

서로에게 득 될 것 없는 비밀만 쥐고 있을 테니.

“안녕.”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막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만약 레이디께서 전달해 달라 하셨던 물건을 전한 후.”

바람결에 실려 온 뷘터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었다.

“그에 대한 답변을 듣는다면…….”

“…….”

“그걸 다시 전해 드리는 건 됩니까?”

나는 잠시 멈춰 흘깃 그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골목에 우뚝 서 있는 토끼 가면이 어쩐지 오싹했다.

“아니.”

가면 아래 가려진 그의 얼굴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호감도 15%]

단호한 거절에도 상승하는 호감도가 조금 의외였다.

* * *

뷘터와 헤어진 나는 곧장 거리를 돌아 공작저로 갔다.

정확히는 저택을 감싸고 있는 높다란 담벼락으로.

“분명 여기 어디쯤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눈을 최대한 커다랗게 뜨고 담벼락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개구멍을 찾기 위해서였다.

담벼락의 범위가 워낙 넓기도 했고, 어두운 시야 때문에 벽인지 구멍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데릭이 곧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식은땀이 새어 나올 무렵.

“찾았다!”

드디어 개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구멍의 폭이 워낙 좁아서 바닥을 기다시피 해야 했다.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린 후 머리부터 구멍 안으로 막 집어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불현듯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페넬로페 에카르트.”

등 뒤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역시, 네가 맞았군.”

나는 바닥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제발…….’

나는 짧은 사이 온갖 신을 부르짖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제발 환청이라고 해 주세요.’

그러나 이 망할 게임에 신은 없었다.

“당장 일어나.”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살벌하게도 나를 노려보는 시퍼런 동공이, [호감도 13%]보다 더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기가 막힌 전개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 어떻게…….”

“그런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닐 계집이 너뿐인데 못 알아볼 리가.”

어떻게 난 줄 알고 득달같이 쫓아왔냐는 뜻을 바로 알아들은 데릭이 사납게 비웃으며 답했다.

‘우스꽝스럽다니!’

놈의 조롱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칼 위가 위태롭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데릭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강요했다.

“말해.”

“…….”

“밤늦게 축제 구경을 하러 가겠답시고 날뛰던 것도 가만 놔뒀다. 호위를 두고 싶다기에 근본 모를 노예 새끼를 집 안에 데려온 것도 묵인해 주었지.”

“…….”

“그런데 대체 뭐가 불만이라 이런 짓거리를 또 하는 거지?”

그가 말하는 ‘이런 짓거리’란 호위 하나 없이 몰래 빠져나가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한테 대답을 강요해 봤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나는 앵무새처럼 사과를 되뇌었다.

억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별수 없었다. 네놈들에게서 살 구멍을 찾느라 이러는 거라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을게요, 소공작님.”

“그놈의 벌, 벌, 벌.”

그러나 이제 데릭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 방법인지, 방금 전까지 잠잠했던 놈이 갑자기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네가 내게 하는 소리라곤 매번 벌을 내려 달라는 것뿐이군.”

“그게…….”

“그렇게 벌을 받고 싶은 건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데릭의 모습에 당황했다.

‘벌을 받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니.’

당연히 나도 벌받기 싫었다.

그러나 채 부인하기도 전에 놈이 탁, 손을 잡아챘다.

“따라와.”

“어, 어…….”

놈이 막무가내로 걷는 바람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왜 이래! 대, 대체 무슨 벌이길래!’

나는 좋지 않은 놈의 기세에 더럭 겁이 났다.

페넬로페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와 이런 접촉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소공작님.”

나는 불안한 눈으로 연신 데릭의 머리 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 오늘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납냐…….’

지금이라도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어야 하는 걸까.

자꾸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설마. 아무리 꼴 보기 싫은 가짜 동생이라지만, 집 밖으로 좀 나갔다고 황태자처럼 칼로 찔러 죽이기라도 하겠어?’

나는 필사적으로 긍정 회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섬뜩한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물론 칼로 찔러 죽이진 않겠지만, 말려 죽이긴 하겠지?’

이를테면, 이대로 저택으로 끌고 가서 놈이 말한 내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모든 공작가 일원들에게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작은 실수 하나라도 크게 부풀려 모든 이들의 눈 밖에 나게 하기.

특히 페넬로페를 입양해 온 공작의 눈에는 더더욱.

게임에서 잘못된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놈들이 곧잘 하던 짓이었다.

‘에휴. 그래, 마음대로 해라.’

나는 빠른 포기를 택했다.

지금 와서 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현생에서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나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끝내 괴성을 지르며 제 명을 재촉하던 페넬로페와는 다르게 말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데릭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그가 가는 방향은 예상대로 저택의 대문 쪽이었다.

굳게 닫힌 웅장한 철문 옆에 서 있던 문지기들이 다가오는 데릭을 알아보고 깎듯이 묵례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당연히 문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갈 줄 알았다.

“어……?”

하지만 데릭 놈은 그대로 철문을 지나쳤다.

‘얘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애써 잠재워 뒀던 불안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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